6. 난독증 -, 천재의 잠재적 발현이 되었던 사람들
2019. 8. 22.
안데르센 동화는 우리의 이야기
알쏭달쏭한 사람, 한스 크리스티앙 안데르센 의 본래 꿈은 작가가 아닌 배우가 되는 것이었다. 매우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아버지는 엉뚱하게도 나폴레옹의 대단한 추종자로 그의 전쟁에 참전했다가 부상으로 인한 정신병을 앓다 안데르센이 어린 나이에 사망한다. 어머니 또한, 평생을 가난으로 고생하며 굶주렸고 아버지가 사망 후 재혼하게 되면서 안데르센은 어머니마저도 함께 지내지 못하는 외로움과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한다. 어린 나이부터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고 다만 그의 맑은 목소리로 그는 연극배우의 꿈을 꾸며 겨우 14살이 될 때 상경하지만 ‘코펜하겐의 오랑우탄’이라는 치욕적인 별명만을 얻은 채 꿈만 좌절된다. 그렇지만 낙담하지 않고 극본을 쓰기 시작하면서 왕실의 후원금으로 그제야 비로소 정규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된다. 남들보다 6년은 더 늦은 나이에 시작했던 공부지만 23세가 되던 때 코펜하겐 대학에 입학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글쓰기를 시작하는데 그에게 유명세를 안겨준 책이 바로 [즉흥시인]이었다. 그 후로 안데르센은 동화를 썼고 그의 동화를 읽은 지인은 ‘[즉흥시인]이 자네를 유명하게 해 주었다면 이 동화들은 자네를 불멸의 작가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격찬하기도 했다. 실제로 안데르센은 끊임없이 실패를 거듭하게 되지만 끝내 동화작가로서 위인으로 남았다. 그런데 나는 어째서 안데르센이 난독증을 앓았다는 것인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짐작해 보건대, 안데르센은 매우 불우한 가정환경 탓으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고 그로 인해 글을 일찍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찍 배우지 못한 것과 난독증은 전혀 별개의 문제로 그가 난독증을 앓았던 사람이었다는 단서는 되지 못했다. 다만 배우지 못하고 배운 적이 없었는데도 실제로 그가 쓴 동화의 삽화를 직접 그렸을 정도로 상당한 그림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 2차원의 평면 종이를 오려내는 것을 통해 3차원적인 조형물로 만들어 낼 줄 아는 능력이 탁월했다는 것을 짐작해 본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는 무수히 많은 작품을 썼다. 우리 꼬마 만해도 벌써 안데르센 동화라면 손가락으로 셀 정도로 알고 있을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과 인정을 받는 위인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정작 그의 내면의 삶은 외로웠고 우울했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으며, 물론 그의 성 정체성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는 많지만, 아무리 그의 장례식에 덴마크 국왕이 참석했을지라도 그의 친척은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유명한 인생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한편으로는 매우 불행한 삶은 삶았다고 느낀다. 어쩌면 그의 동화가 동시대 동화작가였던 그림 형제와 비교해 보았을 때 대부분 슬픈 결말로 끝나게 되는 것만 보더라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아이들을 대단히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아니 어쩌면 내 오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동상을 세울 때 원안은 아이들과 함께 있는 동상이었는데 그가 반대했다는 것을 안다면 내 생각이 틀렸다고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했던 말은 그의 동화가 아이들만을 위한 동화로 읽히는 것에 불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나는 한 번도 아이를 내 등에 태우거나 무릎 위에 올려놓은 적이 없다. 어린이들은 단지 내 이야기의 표면만 알 수 있으며 성숙한 어른이 되어서야 온전히 작품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요절이 모티브가 된 [눈의 여왕], 평생 가난으로 고생하며 살았던 어머니를 그린 [성냥팔이소녀], 언제나 소외되고 외면당했던 자신을 희화시킨 [미운오리새끼], 다리를 얻기 위해 혀를 내주지만 끝내 물거품으로 사라져 버린 [인어공주] 역시 상류사회 진입을 꿈꾸지만 가난하고 배우지 못해 실패했던 바로 그 자신이었다. 솔직히 그의 말은 충분히 수긍할 만하다. 하지만 그가 난독증으로 고생했었다는 전문가들의 말에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처음 ‘어떻게 난독증이 있는데 그렇게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었지’ 생각하고 희망적인 기대감에 차 있었던 나는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어려움을 이겨내고 이룩한 결실에 대한 노력과 삶의 극복 의지를 충분히 거울로 삼을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요전 날 아이들과 함께 읽었던 [공주와 완두콩], 높게 쌓인 침대 매트리스 가장 아래 놓은 그 초록 완두콩 삽화도 안데르센이 직접 그린 것, 그리고 그 그림이 매우 잘 그려진 삽화라는 것이 생각났다.
2019. 8. 23.
아인슈타인,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천재성의 상징으로 바꿔버린 사람.
유대계 미국인, 본래 독일 울름에서 출생하였으나 세계 2차 대전을 겪으면서 미국으로 망명하게 되면서 미국인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이 낙제생이었으며 못생겼고 발달이 더딘 아이였다는 사실은 아인슈타인 인물 자체가 워낙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므로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그 또한, 난독증을 앓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천재 물리학자로 남아 있게 된 데는 어머니의 교육이 매우 컸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또한, 아인슈타인에게 매우 특별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공학자였는데 언제나 퇴근 후 글이 서툰 아들을 무릎에 앉혀 시를 읽어주었다고 한다. 시의 내용이 정점에 달하거나 다 낭독 후에는 아들에게 느낌을 물었고 언어적으로 표현이 서툰 아들이 천천히 자신의 느낌을 말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칭찬하며 기다려 주었다고 전해진다.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특별한 믿음과 노력, 아버지의 남다른 방식은 아인슈타인의 장애를 천재성이 발현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던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그의 이론이나 핵무기를 포함한 다양한 발명품들은 국가 간 외교 전략을 바꿔버렸으며 인류 전체의 삶을 변화시켰다.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자나 연구원, 과학자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일반인의 사고력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훗날, 그의 동그랗고 뚱뚱한 몸매, 헝클어진 머리와 스타일, 얼굴의 주름까지도 그의 개인적인 하나하나가 천재 그 자체를 상징하는 영향력으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순전히 그의 개인적인 삶은 행복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라 짐작하게 된다. 그는 정작 본인의 가족, 아내와 아이들과는 그다지 행복한 삶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가 업적과는 별개로 크게 비판을 받은 부분이라면 아무래도 결혼생활에 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캠퍼스커플이던 밀레바와의 결혼 후 그들 사이는 아들을 둘 두었는데 그마저도 둘째는 정신박약에 시달리고 발작을 일으켜 어머니를 목 졸라 죽이려 들기까지 했으며 끝내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하는 불행을 겪고 아내마저도 곧 죽게 된다. 아인슈타인이 임종 직전 독일에 있는 장남에게 보고 싶다고 와 달라는 의사를 전달했지만 무시당했다고 하며 사실 큰아들은 부모의 머리를 닮았던 것인지 당시 버클리 주립 대학에서 수력학 교수로 재직 중이었고 아버지 아인슈타인이 사망한 당시 신문에 짤막하게 부고 몇 줄을 냈을 뿐이었다고 한다.
“I want to go when I want. It is tasteless to prolong life artificially. I have done share, it is time to go. I will do it elegantly.”
그는 사망 무렵 복부 대동맥류 파열로 내출혈이었는데 이스라엘 건국 7주년 기념행사의 연설을 준비하다가 쓰려져 병원으로 실려 갔을 당시 수술을 거부하며 위 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까지 연구를 계속하다가 결국 사망한다. 이렇듯, 아인슈타인 본인 자체도 그다지 여생에 큰 미련은 없던 것으로 보인다. 큰아들이 임종 직전에 오지 않았던 것에 큰 실망감 또한 없었을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단순히 천재 물리학자로 알려진 그의 삶을 들여다보고 나서 나는 마음이 한층 더 무거워지고 말았다. 아마도 평범한 사람으로 평범한 행복을 느끼면서 살다가 간 사람이었기를 더 바랐는지 모른다. 그리고 어쨌든 아인슈타인은 난독증이라는 장애를 극복하고 천재 물리학자로 남았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건대, 그가 난독증 자체를 극복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학 때도 물리, 수학, 기하학에서 만점을 받았다면 그리스어, 문학에서는 중간 성적 이하로 여전히 고군분투했었기 때문이었다. 맞지 않은 부담이 점점 그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버린 것이라고 여겨졌을 뿐이다.
나는 또다시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조금은 실망하고 말았다. 단지 그의 부모님의 끝없는 믿음과 지지, 그리고 헌신이 조금씩 그를 변화시키고 성장시킬 수 있었다는 교훈적인 사실만을 얻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 순간 나는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그래서 더 노력해 봐야겠다가 아닌 서글픈 생각만이 밀려온다. 그리고 작은 아이한테는 한집에 살면서 평생 지지하고 응원해줄 아빠도 없지 않은가. 내가 처한 모든 현실이 왠지 작은 아이에게로 대물림되는 것이 아닐까 암담한 미래의 형상이 자꾸만 나를 죄지은 사람처럼 움츠러들게 하기만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