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소리
생각하는 소리-나는 그 사람의 얼굴의 표정에서 소리를 듣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들리는 소리로 짐작할 수 있다.
아이에게
누구도 크게 신경쓰지 말고 걱정도 오래 하지 말고
무엇보다 인생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마음속에 오래 담아두거라
지나가 버린 일들엔 시간이라는 마법이 묘한 약을 써
슬픔도 괴로움도 분노도 또한 대단한 기쁨이나 즐거움도
한낮의 꿈결같이 흐릿한 기억이 될 뿐이니
그래서 아이야!
기쁨을 오래 기억하는 사람일수록 든든한 지금을 만들지
어디 부자가 따로 있겠느냐
마음이 행복의 순간들로 차면 그게 부자이지 않겠느냐
2021. 9.22. 수
딸기잼 통을 땄는데 쇳가루 냄새가 났다. 집 근처 마트에 나갔다가 문득 어릴 때 나에게는 아주 고급 간식이었던 식빵에 잼을 발라 먹을 생각에 높은음(!)자리표 딸기잼 한 통과 식빵 한 줄을 사 들고 들어왔다. 쇠로 된 뚜껑에 라벨을 떼고 힘껏 돌렸는데 잼 통 안의 기압을 이겨낼 만큼의 손아귀의 힘이 부족했던 탓인지 유리병으로 된 잼의 몸통이 미끄러지기만 할 뿐 계속 헛돌기만 했다. 이럴 땐 언제나 큰아이를 부르면 되었다.
“ 정우야! 엄마 좀 봐줘. 이것 좀 해 줘봐”
이렇게 한마디만 하면 큰아이만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두런두런 앉아 놀던 둘째부터 막내까지 서로 힘을 써 보겠다면서 하던 일을 당장에 멈추고 무엇보다도 이때처럼 선착순인 경우가 없다. 역시 사내 녀석들이라 그런 것인가. 힘이 세다는 것을, 이제는 잼 병쯤은 눈감고도 따낼 수 있다는 듯, 잼 병 앞에서 쩔쩔매며 괜한 병 탓을 하는 엄마를 이겨 볼 몇 안 되는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자기도 엄연한 남자라는 것을 엄마 앞에서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달려든다. 결과는 뻔하지만, 큰아이는 열세 살, 두 살, 다섯 살 터울이 있는 동생들을 아주 가볍게 이긴다.
‘이리도 먹는 게 어려워서야!’ 그래선지 뻥 소리와 함께 따진 딸기잼에서는 쇳가루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이게 오래된 건가? 유통기간을 보고 아예 코를 잼 통에 갖다 대고 개처럼 킁킁 냄새를 맡아보기도 했다.
“엄마! 원래 그게 딸기잼 냄새야.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 거 같은데?”
딸기가 아니라 딸기잼을 산 것이다. 나는 딸기잼을 앞에다 두고 딸기의 향긋함을 기대했던 것인가. 식빵에 납작하게 잼을 펴 바르고 아이들이 한 손에 들고 먹을 수 있도록 해 두었다. 만들었다기에는 어쩐지 부끄러운 간식이었다. 나도 한입을 물었는데 역시나 달콤한 꿀맛에 설탕 맛만이 강하고 윗니 아랫니 사이에서 딸기의 까만 씨가 똑똑 터지는 식감에서야 비로소 내가 딸기잼을 먹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 역시나 나는 싱겁고 밀가루 냄새가 풍기는 그냥 맨 식빵이 더 먹을 만했다.
지난주, 동갑내기로 지내던 직장 동료가 목을 맸다는 연락을 받았다. 온종일 그 생각에 사로잡혀 뭔가를 할 수가 없었는데 그 일이 있었던 뒤 며칠 뒤 또 다른 동갑내기 동료로부터 그 친구의 의식이 되돌아 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며칠 전의 감정과는 정반대의 기분이었으나 어쩐지 바닥으로 가라앉아버린 우울감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채 평소 그 친구의 모습과, 함께 차를 마시면서 혹은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하던 표정과 말투와 대화의 내용을 기억해내 보았다. 돌아오면 남들은 그 친구에게 ‘힘을 내’라고 말하겠지. 만일 그의 그런 건강하고 밝은 모습이 정말로 힘을 내서 지내온 데서 나온 결과라면은 나는 절대로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좀 쉬어봐’ 이 말도 사실은 하기가 어려울 듯 했다. 내가 가까이 있는 게 부담될 수 있을 테니 그냥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든 누워서든 좀 쉬어봐. 나도 저만치 네 모습이 보이는 데에서 앉아서든 있어 볼 테니까. 그러다 다시 또 힘을 내어 전처럼 밝고 건강한 모습으로 지내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그때 하면은 되지 않을까. 그럼 되는 거지 뭘. 나도 그럴 것이다. ‘힘을 내!’ 이런 말은 수천 개로 된 가파른 계단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나 목이 말라 거의 죽을 지경에 다다른 사람한테나 하는 말이다.
“엄마! 그런데 왜 요즘은 글 안 써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냥 부끄러웠고 그렇게 묻는 큰아이 앞에서 잠시 말문이 막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있지, 엄마는 본래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야. 그냥 실력은 그냥저냥 형편없었는데 어떻게든 좋아하는 것이 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
“그래? 아니야. 내가 아는 친구 중에 엄마 같은 엄마를 둔 아이는 본 적이 없는걸….”
아이 셋은 인생 게임이라는 보드게임을 거실 한가운데 펼쳐놓고 나를 데려다 앉히면서 사람 모양의 말을 고르라고 했다. 나는 초록색으로 된 뛰어가는 자세를 한 사람의 말을 택했다. 그리고 바로 직업을 가질 것인지 대학에 진학할 것인지를 선택하라고 했다. 그래서 엄마는 좀 교양을 쌓아야 한다면서 대학을 가겠다고 말한 뒤 보드 정중앙에 놓인 룰렛 판을 돌렸다. 룰렛을 돌리는 손가락 근육이 어색한 탓인지 12까지 된 시계 모형에서 처음 한두 차례 1, 2 혹은 고작 4 정도의 숫자에 화살표가 멈춰 아주 더딘 출발을 했다. 게임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중간에 어디에 멈추느냐에 따라 돈도 잃고 돈도 받고 심지어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단계가 있다. 결국, 나는 최고로 빨리 목표에 도달한 선수가 되어 1등이 받는 어마어마한 상금을 받고 게임을 마쳤다. 그런데 남은 아이들이 룰렛을 돌리고 계속 게임을 하는 것을 지켜보는 동안 1등이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노력해서 바쁘게 1등이라는 목표에 도달하여 어마어마한 상금을 받았지만, 더 이상의 룰렛을 돌릴 기회는 없다. 그냥 쉽게 말해 일찍 죽어버린 것이다. 처음엔 교양을 쌓겠다고 대학에 진학했지만 바로 취업이라는 단계에 멈춰버려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대학을 관두고 직업을 가졌다. 그때부턴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건물을 사고 월세를 받고 비행기를 타고 요트를 타고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내 의지대로 교양서적 한 권을 사들이지 못하고 그렇게 돈만 벌다가 어느새 목표에 도달해 1등으로 죽고 인생 게임이 끝났다. 나는 그렇게 1등을 해서 1등으로 죽었다. 열심히 뛰고 운 좋게 룰렛을 잘 돌린 결과 일찍 죽게 된 것이다. 차라리 꼴찌로 달려 마지막까지 저 룰렛을 돌릴 때의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긴장과 재미를 더 느껴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계속 남았다. 인생이란 것이 정말로 게임과 같은 게 인생 게임이라는 보드게임으로 무엇이 1등인지 꼴찌인지를 그 정도의 가치를 되짚어 볼 만한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렇지. 딸기잼은 딸기가 아니므로 딸기향이 날 리가 없고 언제나 밝고 건강하게 보이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우울하고 암담한 날은 없을 거라는 정형화된 이론 같은 것도 있을 리가 없고 인생도 보드게임과 마찬가지로 꼭 1등이 되어 그 영광과 환희의 갈채를 받는 행위는 퇴장이라는 한가지 선택만을 두고 허무함과 아쉬움은 언제나 뒤로한 채 기쁨에 즐거워한다는 결론이 당연하다고 여긴 것이 과연 상식적이던가. 나는 식빵을 그냥 무덤덤하게 뜯어 먹는 게 더 맛있고 그 친구도 그런 모습이 늘 최선의 힘을 낸 것이라면 왜 그렇게 힘들게 힘을 내고 살았는지 누구라도 의식하고 경계하지 말고 앉아서든 누워서든 쉬었으면 바라고, 또 앞으로 인생 게임을 할 때는 룰렛을 힘껏 돌리지 않아 절대로 1등으로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을 것이라고 호기롭게 말하고 싶었다.
*덧붙임: 글을 거의 일년만에 쓰고 그것도 단 한시간마저도 집중하지 못한 상태였었지만 그동안 나를 짓눌러왔던 부담의 무게를 감당해나가야지 하는 마음에 다시금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작지만 내 생활의 에너지의 많은 부분들이 여기서 온다는 걸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냥 머리카락만 흔들 정도의 미풍처럼 기운이 살살 살아났다. 그렇지, 기운이 펄펄 난다면은야 아마도 그 에너지를 스스로조차 소비하지 못하여 들뜨고 붕뜬 기분에 차분하지 못한 불안함을 또 다시 느껴 나는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기운이 살살 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아니 나에게 얼마나 잘 맞는지 알고 있기에 해 봐야지 그런 말로 나에게 다정한 위안을 해 주련다. 추석달이 새벽까지 떠 있다가 일찍 나온 흰 구름뒤로 가려졌다. 달은 언제나 그 모습이지, 달이 차면 기우는것에 마음이 흔들리면 안돼. 심지어 내 몸도 그렇잖아 어쩔 수 없는 순리인걸. 모든 건 나에게 걸려있는거야. 꼭 보름달만 보고 소원을 빌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처럼 내 마음속에 달린거야. 가을이 왔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달디단 가을이 오고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