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이, 둘째아이, 셋째아이가 옹기종기 모여서 물이 가득 찬 욕조에 보드라운 몸을 담그고 턱과 키 크기가 나란한 동그란 어깨를 들락날락 하는 미동에 동그라미보다 더 동그란 물결이 번져나가고 머리카락이 반 쯤 젖은 상태로 마치 막대사탕을 빨고 있는 것처럼 각자의 칫솔을 물고 목욕을 하고 있는 중에 큰 아이 정우가 이제 두 돌을 지낸 막내 아이 단우에게 건네는 말이다.
지금 이 글을 써내려가고 있는 이 사람 – 나는 누구인가? 이 한마디로도 현재 육아중인 엄마들의 동정을 한 몸에 받을 만한 탈 많은 남자아이만 셋 키우는 대한민국 워킹맘이다. 얼마 전에 큰 아이가 학교에서 받아 온 안내장을 보여주며 “엄마! 엄마도 독후감 쓸 수 있어? 여기 있는 책을 읽고 쓰는 거래.” 하며 잰 손놀림으로 순식간에 책갈피 한 장을 접어 건네준다. ‘녀석! 괜한 부담을 주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다가 추천도서 중 [엄마 말공부]라는 책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사실 그동안 수많은 육아지침서들을 읽어봤던 터라 어떤 변화를 기대하고서 책을 읽었던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아이에게 엄마의 참여하고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주며 그 와중에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들을 자연스럽게 보고 어떤 느낌을 줄 수 있겠다는 기대가 더 컸던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책장이 한 장씩 넘어갈수록 기존의 내가 접해왔었던 양육서적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점점 작가가 알려주는 말 그대로 나는 말을 공부하며 그 동안의 나의 행동과 언행들에 대한 깊은 후회와 반성으로 아이들에게 정말로 부끄럽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사실, 지금에서야 고백하지만 나는 아들 만 셋을 키우는 그냥 워킹맘이 아니라 조금은 억세고 격한 환경을 접할 때가 많은 경찰관이다. 어떻게 보면 남들과 조금은 다르다는 여건을 두고 내 아이들을 대할 때 마치 어떤 대단한 희생이라도 하는 듯 내 조건을 정당화 시켜가며 윽박지르고 내 말이 옳다고만 강요해왔던 행동들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괴기하게만 보였을지 또 얼마만큼 한없이 과장된 사람이었는지 부끄럽고 짠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정우가 단우에게 ‘형아 말을 잘 들어줘서 고마워’라고 하는 걸 듣고 그동안 아이들을 얼마나 몰랐는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한 기분이었다. 무조건 “하지마!” 말했던 나와는 달리, 단우는 “응” 대답을 했었고 전처럼 샤워기물을 함부로 켜 놓아 거실까지 물이 흥건하게 젖도록 하는 행동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두 팔을 길게 뻗어도 엄마 키 높이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아이들이지만 그 속에는 어쩌면 나보다 더 커다란 마음이 자리하고 있구나 싶어서 항상 미미한 객체로 취급하며 겁주고 혼을 냈던 게 얼마나 아이에게 큰 상처가 되었을까 싶었다. 어쩌면 아이는 엄마인 나보다도 ‘말 한마디의 놀라운 기적’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 같아서 그 순간에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라는 사람이 과연 타인이 보는 그대로 야무지고 똑 부러진 엄마일까. 이렇게 자문해 볼 필요조차도 없었다. 내 아이에게 받아쓰기를 시키며 맞춤법을 가르쳐줘야 하는 게 아니라 나야말로 말공부를 더 해야만 하는 엄마였고 아이의 받아쓰기보다 몇 배로 더 곱게 말하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걸 절감했다.
아이들을 크게 혼내고 한바탕 소동이 있던 어느 날 밤, 둘째와 막내가 잠이 들자 큰 아이가 내 옆자리에로 오더니 한숨을 크게 쉬며 한동안 말없이 천정만 바라보는 게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다정하고 친절하게 표현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던 엄마였으므로 어떤 따뜻한 말이라도 해주어야했던 그 순간에 우리는 한동안 어색하게 같은 곳을 바라보며 누워있기만 했다. 내 속으로 낳은 아이를 엄마인 나조차도 보듬어주지 못하는데 세상의 어느 누가 감싸줄 수 있단 말인가. 나도 정우처럼 저절로 한 숨이 나왔다. 그리고 처음 내 쉰 한 숨과는 다른 큰 심호흡을 내 뱉고 정우를 팔베개로 가까이 끌어안으며, “정우야, 엄마는 매일매일 너희들을 챙기는 게 어느 때는 무척 힘이 들 때가 있어. 그런데 이렇게 어른인 엄마도 힘이 드는데 너처럼 작은 아이가 항상 동생을 데리고 다니고 돌봐주려면 얼마나 힘이 들겠니. 정우야!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힘들었을 거야! 엄마가 정우 마음 잘 몰라줘서 정말 미안해.” 아이는 조용히 말이 없었고 아이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작은 물방울들만이 내 팔뚝을 적시고 있었다. ‘아, 내 아이 마음속에 이런 보물이 들어 있었구나!’, 벅찬 마음에 나한테서도 말없는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동안 수도 없이 훈육이라는 이유로 나조차도 이겨내지 못하는 온갖 성질을 부리며 아이들을 화풀이 대상으로 여겨왔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절대로 화풀이 대상이 아니며 엄마의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마땅히 보호받아야 하지 그 짐을 함께 지는 상대가 아님을 절대적으로 동감하고 명심한다. 아이와 시소를 타다가 무거운 사람이 앞으로 거리를 맞춰가며 균형을 유지하는 시소게임이 부모와 아이의 관계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와의 관계는 비대칭적인 것이 아니며 아이는 엄연한 인격체로서 존중받고 부모가 아이와의 일정한 거리를 맞춰준다면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인 아이로 자랄 것이다. 아이도 어른과 똑같이 친절하고 다정한 말을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런 말을 들으며 자란 아이가 그렇게 말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한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말 한마디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 번 느끼고 내 자신에 대해 다짐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