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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이 Nov 09. 2017

4. 여름 안에서


  우리 집을 중심으로 신작로를 따라 올라오면서 가장 첫 번째 집, 반대로 내려갈 때는 제일 마지막에 있는 집은 동네에서 가장 잘 났기로 소문난 정치아저씨가 살고 있는 집이다. 그냥 사람들이 국회의원이나 군수 같은 정치하는 사람들을 따라 다니면서 꽤나 힘 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그러는 거라고 수군거리는 말을 엿 듣고서 나는 나름대로 그 집 아저씨를 정치아저씨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는 거라고’ 하는 표현을 자세히 설명해 보자면 우선은 동네 사람들의 애 어른을 할 것 없이 누구의 인사라도 받는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었을 뿐더러 심지어 말을 할 때도 마치 누군가를 훈계하고 가르치려 드는 것처럼 건방지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한 번씩 보이는 아저씨는 마치 수탉처럼 뒷짐을 지고서는 잔득 거드름을 피우는 걸음걸이로 도대체 누구에게 고개를 숙이는 법이 없었으며 항상 검은 색 계열의 양복을 입고 동네에서 유일한 자가용을 끄는 사람이었다. 

  그 집은 봉수 네가 살고 있는 기와집처럼 으리으리하게 보이는 것은 아니었으나 회색 빛 감도는 하얀 페인트칠이 되어 있는 양옥과 한옥을 반씩 섞어 놓은 것으로 마치 시골과 도시를 한데 모아 놓은 특유의 분위기가 풍기는 그런 집이었다. 물론 나는 그 집안을 들어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둥그렇게 에워싸인 붉은 색 벽돌 담장은 내 키를 훨씬 넘는 높이였었고 어디 한군데 녹이 슨 곳을 볼 수 없는 빨간색 페인트칠을 한 쇠 대문은 마치 기름이라도 발라 놓은 것처럼 매끈하게 윤이 나는 상태로 항상 굳게 닫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사람이 드나드는 반쪽짜리 대문만 비스듬히 열려 있던 날에 틈 사이로 보이는 집 안의 내부를 상상만 했을 정도였고 특이하게도 집 마당이 흙으로 된 것이 아니라 신작로와 같은 시멘트로 발라져 있던 것은 참 인상적이었다. 그 집은 대단한 비밀이라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높은 담장 밖으로 고개를 살짝 내민 넝쿨 장미와 이름 모를 꽃과 나무의 가지들을 보면서 작은 오빠가 읽어 준 [비밀의 화원] 속 정원같이 분명히 아름다운 꽃밭이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곤 했었다. 학교를 사이에 두고 있던 그 집은 정말로 한 번씩 나를 상상의 나래로 데려가는 신비스러운 공간쯤으로 여겨졌던 것이었다. 

  그 집 뒷마당 담벼락에 바짝 붙어서 왼쪽을 따라가면 작은 틈도 없이 철마다 연분홍 꽃을 피우는 무궁화나무가 한 겹으로 심어 있었고 그건 마치 그 집과의 불편한 관계를 상징이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무궁화 울타리 안쪽으로는 회백색 페인트칠을 한 작은 양옥 건물의 교실 두 칸짜리 작은 학교가 있었는데 학교는 마치 앉아 있던 것처럼 나지막한 높이의 건물로 운동장 한쪽 구석에서 그네를 타던 내가 반듯한 직사각형 모양의 창문들과 눈을 맞출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작고 아담한 건물이었다. 동네의 여덟 살과 아홉 살 꼬마들만이 다녔던 분교였으므로 학생을 다 합한 수도 스무 명이 채 되지 않았었고 그래서 그런지 교실에 앉아서 공부를 했던 것보다 학년의 별다른 구분 없이 들로 산으로 놀러 다니던 기억이 더 많았다. 

  학교 정문 앞으로는 아스팔트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었지만 나는 언제나 2학년을 맡고 있던 선생님네 식구들이 살고 있는 작은 관사를 끼고 난 개구멍을 통해서 다니곤 했었다. 내 계산에는 그 길이 집으로 통하는 지름길이었고 무엇보다 개구멍을 나가면 곧장 이어지는 신작로가 내가 하루에도 수 십 차례 오르내리며 뛰어 놀던 길이였으므로 정문의 아스팔트 포장도로 보다는 더 친숙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신작로 가로의 끝, 가장자리를 따라서 걷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그것은 마치 바닥에 그려진 안내선처럼 보였고 그 선만 따라가면 길을 잃어버릴 염려도 없이 곧장 집으로 갈 수도 있었으며 이미 눈을 감고서도 그 길가의 풍경을 완벽히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나 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지금에야 고백하지만 한 번은 정말로 눈을 감고 매번 하던 식으로 길 가장자리를 걷다가 거의 완벽히 90도 아래 붙어있는 논바닥으로 고꾸라져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진흙덩어리를 뒤집어 쓴 뒤로는 눈을 감고 걷는 것은 포기했었지만 그 길은 내가 태어나서 이제 까지 계절마다 새로운 옷들로 바꿔 입어가면서 나의 몸과 마음을  키워주었던 익숙했지만 절대로 지루하지 않았던 길이었다. 

  그 날은 여름방학이 시작 되는 마지막 수업이 있던 날 이었으므로 평소보다 조금 일찍 학교에서 돌아오던 길이었다. 신작로를 따라 직소퍼즐 모양처럼 붙어있던 논의 벼들이 제법 진녹색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제 계절은 달력을 들춰 보지 않더라도 7월의 끄트머리까지 와 있다는 것을 누구라도 알아차릴 수가 있었고 나는 한 여름, 한 낮, 발 언저리를 따라오는 동그란 내 그림자를 밟으며 거의 집 앞까지 와 있었다.

  집 앞에 검은색 승용차가 서 있다. 낯설지 않은 그 자동차가 집으로 들어가는 내 발걸음을 주춤하게 만들었고 우리 집 담장 아래 옆구리를 타고 흘러가는 도랑 옆에 난 영길네 집 앞 담벼락에서 한참을 숨죽이며 서 있었다. 마치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나는 집안의 누군가에게 들키는 것이 두려워 이제까지 걸어 온 길을 되돌아 내려가 오른 쪽 호두나무를 끼고 난 골목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 길을 지난다는 건 덩치 커다란 개 짖는 소리의 공포심과 약 10초간 숨을 견뎌내며 소똥냄새 진동하는 두엄 막사를 반드시 지나쳐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리고 우리 집이 얹혀 있는 동산으로 올라갔고 집 마당이 제일 잘 보이는 바위에 우뚝 올라서서 집안에 누가 왔다 갔다 하는지 살펴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으니 어두운 색깔의 양복을 입은 아저씨가 지붕 처마 밑으로 머리통을 드러냈다. 예상대로 염사장이다. 우리 집 식구들은 아빠가 다니던 광산의 사장을 염사장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엄마의 머리가 보였고 염사장은 집 앞 검은색 자가용에 탔고 자동차는 이미 출발하고 있었으나 엄마는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사람처럼 이미 출발해버린 차를 향해 허리를 구부리며 정중한 인사를 하고 있었다. 입 속까지 꽉 차 오르는 욕을 겨우 꾹 참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았다. 혹시 모습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울퉁불퉁한 바위 바닥에 몸을 웅크려 엎드려서는 한참을 그렇게 염사장이 탄 차가 신작로로 빠져나가 행이짓거리를 지나가는 것까지 바라보았다. 

  나는 그제 서야 몸을 일으키고는 시내 건너편에 자리한 동쪽의 동네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집과는 45도 쯤 반대쪽에 있던 비교적 평평하고 나지막한 바위에 올라앉았다. 떡갈나무 이파리들이 다 가리지 못한 구멍사이로 쏟아지는 7월의 따가운 햇살이 내려앉은 탓에 더 무겁게 느껴지는 책가방을 맨 채로 그대로 아무생각도 없이 앉아만 있었다. 눈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염사장이 우리 집까지 왔다는 것은 그것도 이 대 낮에 그 검은색 차를 타고 왔다 갔다는 것은 분명히 아버지가 다쳤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런 상태로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너무나 무섭고 겁이 났기 때문에 소똥냄새 따위는 아무 상관도 없이 그대로 도망을 쳤다. 아빠가 다니는 광산은 산을 깎아내고 거기서 나오는 돌을 팔아서 돈을 버는 그런 곳이었다. 산 임자가 누구였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고 야생 산양이나 오르내릴 만한 그런 절벽의 틈에서 아빠는 직접 착암기를 돌려 산의 껍질을 까는 일을 하셨다. 가만히 서 있으라고 해도 현기증이 날 법한 높이에서 착암기가 만들어내는 진동과 소음까지 어린 내가 보아도 너무나 위험한 일이란 것을 알 수가 있었고 절벽의 중간쯤 높이에서 내 엄지손가락 크기로만 보이던 아빠를 본 적이 있던 터라 심각한 상황을 상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얼마 동안을 그렇게 움직이지도 않고 앉아 있었는지 뱃속에서 꼬르륵하는 소리에 다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내가 그렇게 그 시각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가 깨소금에 직접 짠 들기름을 간을 해서 부뚜막위에 비벼 놓고 간 깨 밥을 먹을 생각에 방학을 맞이한 기분을 한 층 더 높여 놨기 때문이었다. 그 자동차는 아버지가 일하는 도중 가벼운 부상을 입었을 때도 꼭 그 자리에 마치 그 위엄을 과시라도 하는 것처럼 서 있었고 오늘도 염사장 자동차는 반갑지 않은 손님처럼 오후 나절의 내 모든 계획을 엉망으로 망쳐 놓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린 내게 염사장은 아버지에게 월급을 주는 고마운 아저씨가 아니라 우리 가족을 모두 함께 위험에 빠뜨리는 존재밖에는 안됐었던 것이다. 

  잠시 멈춘 듯 했던 꼬르륵 소리는 아까보다 더 큰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더 이상 배고픔을 참지 못했던 나는 동쪽으로 나있던 올라왔던 길보다는 두 배는 가파른 길로 동산을 내려왔다. 어차피 처음 올라왔던 길을 돌아가나 이 길로 내려오나 소똥 무덤에서 풍겨지는 두엄 냄새는 피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고 배고픔보다는 아버지를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안해서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지로 된 방문에 난 구멍사이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작은 구멍에 눈을 갖다 대니 방안이 훤히 다 보였고 아빠는 머리를 뒷문 쪽으로 하고 누워 계셨다. 외관상으로는 반창고 같이 하얀 테이프 자국도 붕대를 감은 곳이 없으니 일단 안심은 되었다. 나는 오돌토돌한 돌기가 나 있는 동그란 모양의 문고리를 잡아 당겨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엄마는 윗목에서 약봉지 같은 것들을 정리하며 앉아 계셨다. 

  " 너 어디 갔다가 늦게 왔어?"

  " 엄마! 아버지 지금 왜 집에 와 있어? 어디 다쳤어?"

  " 응. 머리 조금......."

  " 밥 먹어야 하지? 오늘 방학하는 날이라고 했지?"

  " 나 그거 해줘 엄마. 깨소금 비빔밥."

  엄마는 늘 하시던 대로 둥그런 스텐 쟁반에 반찬도 없이 밥 한 그릇을 비벼 내온다. 잠이 든 것 같은 아버지를 확인하고 나는 약간 붉어진 엄마의 얼굴을 아주 잠시 바라보다가 쟁반을 들고 방을 나와서 마루 끝자락에 발을 내리고 걸터앉아서 큰 숟가락으로 한 술 떠먹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 맛을 느낄 수가 없다. 참기름 내 고소한 깨소금 비빔밥이 아니다. 하얀 밥 알 사이사이에 분명히 으깨진 깨와 모양이 온전하게 살아남은 깨들이 한데 섞여 있는 진짜 깨소금 비빔밥인데 짠 맛이 난다. 엄마가 울었던 것 같았다. 붉어진 얼굴로 그냥 머리만 조금 다친 거라고 말했던 엄마가 울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일이지만 아버지는 그날도 어김없이 산벼락의 끝에서 착암기를 돌리고 계셨는데 진동으로 굴러 떨어진 돌덩어리에 머리를 맞았고 그 돌덩이는 참 자비스럽게도 아버지의 머리 정수리에서 1센티미터도 안된 자리를 비켜나 착지하면서 구멍을 내는 바람에 열 바늘 가까이 꿰매야 했고 정신을 차리려고 가까스로 바위 사이에 난 틈을 손가락만의 혼신의 힘으로 부여잡고 있어서 아래로 떨어지지 않아서 살아나셨다는 것을 말이다. 그 돌덩이가 설령 잘 비켜서 그 정도의 상처로 끝냈더라도 만일에 아버지가 정신을 잃고 그 돌덩이와 같이 땅에 떨어지기라도 했더라면....... 나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생각이 들어서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 사건 이후로 엄마는 집에 없는 날이 더 많았다. 아버지는 사고로 당분간은 광산 일을 하실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진 것은 좋았지만 엄마가 전 보다 더 자주 잎담배를 따러 가야한다는 사실은 매우 가슴 아프고 슬픈 일로 다가왔다. 아버지와 함께 집에 있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덕구와 이야기하는 경우도 줄었다. 그리고 작은 오빠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개선문>, <날개>, <무영탑>, <막심 고리끼 전집>과 같이 이상한 책을 읽으면서 그 작은 사랑방에 거의 온 종일 틀어 박혀 지냈다. 이따금씩 방문을 열고서,

  “작은 오빠! 뭐해!!”

하면은 마치 무엇을 훔쳐 먹다가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서는 쓰고 있던 공책을 등 뒤에 감추고서 무서운 도끼눈을 하고는 

  “너 당장 문 안 닫을 거야?”

하고 겁을 주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그 해악의 고지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여름 방학이 시작 된 이후로 저렇게 두문불출하며 밤낮으로 미친 사람처럼 방구석에서 뭔가를 한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됐었고 정말로 정신이 반쯤 나간 것은 아닌가 걱정스러운 마음까지 들었던 것이었다. 그러면 나는 

  “작은 오빠! 괜찮아?”

말하고는 더 이상의 방해하기를 멈추고 문을 살포시 닫아 주곤 했다. 그리고 작은 오빠가 빠져 있는 세계가 지나치게 심각할 정도로 진지하게 보여서 적당한 기회가 왔을 때 내가 그 속에 동참하여 꼬마가 아닌 동무로서 진정한 대화의 상대가 되어 주리란 생각을 했었다. 

  정수리에 난 아버지의 상처는 빠른 속도로 좋아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 사고로 인해 침체되어 있었던 집 안에 다시 활기와 기쁨이 살아나는 것으로 여겨졌고 항아리 조각에 베였던 내 손목의 상처도 이젠 밴드 따위는 필요가 없을 정도로 두꺼운 갈색 딱지가 붙어 있었다. 나는 딱지를 계속 만지작거리다가 결국에는 떼 내는 것이 어떤 아픔과 약간의 붉은 피를 동반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딱지가 살에서 떨어져 나갈 때 느껴지는 내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통증을 느끼는 것이 이상하게도 신비한 놀이쯤으로 생각되었다. 새 딱지가 앉자마자 그것을 떼 내느라 바빴지만 아버지는 딱지가 떨어져 나간 상처를 보고는 그러면 더 오래까지 아프고 흉터도 크게 남는다면서 조금 겁을 주기도 하셨다. 지금에 와서야 말하지만 손목에 난 상처를 치료받으러 꼭 다시 오라는 봉수의 엄마 말을 듣지 않았었다. 그 사건이 봉수와 나와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밤잠까지 설쳤던 내 흥분과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릴 정도로 봉수는 전처럼 그렇게 말없이 혼자 지내는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제 여름 방학을 한지도 2주일째가 되었고 나도 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으므로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던 터라 봉수의 모습은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도 내일부터는 광산에 다시 나가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앞으로 내 생활의 모든 것은 정상적으로 되돌아 올 것이라고 믿었다. 

  “수인아! 아버지랑 같이 읍내 장 구경이나 다녀올까? 장에 가서 우리 수인이 좋아하는 짜장면도 먹고.”

  “아버지 좋아~! 나 장 구경 가고 싶어!! 가서 엄마 좋아하는 풀빵도 사오고.......”

  내 말에 아버지는 씽긋 웃으며 꿰맨 자리에 붙인 하얀 거즈를 숨기고자 했던 건지 모자를 눌러 쓰셨다. 그 당시 내가 내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부러움을 받았던 것 중의 한 가지는 바로 아버지의 오토바이였다. 아버지가 다니던 광산을 걸어서 다니기에는 너무 먼 거리에 있던 곳이었고 그래서 광산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 오토바이 한 대를 집안에 들여와 타고 다니셨던 것이다. 나는 입고 있던 옷 그대로 신발만 갈아 신고서 아빠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앉아서 허리춤을 꼭 끌어안았다. 

  “수인아! 꽉 잡아라!”

  십리 정도는 가야 제법 시장다운 규모의 장을 구경할 수가 있었다. 나는 거의 1년 내내 동네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으므로 불과 10분간의 거리에 떨어져 있던 곳이라도 품고 있던 호기심을 발산시킬 수 있던 곳이라서 기분이 들뜨는 것을 억누르지 못했다. 나는 아버지 등 뒤에 매미처럼 붙어서는 우리와 거의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먼 산자락에 걸린 구름을 구경했다. 머리꼭대기위에 있던 해도 처음부터 우리를 계속 따라 온 것인지 아버지와 나를 태운 오토바이의 그림자의 크기를 내내 일정하게 유지시켜주고 있었다. 

  시장에는 우리 마을의 시냇물 너비보다 약 세배 정도는 넓은 천변 옆길을 따라 다양한 모양과 색깔의 천막으로 구분지어 각자의 물건이 전시 되어 있었다. 만물상도 이것만큼은 다양하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 아직 눈도 채 뜨지 못한 새끼 강아지부터 옛날식으로 상투를 올린 아저씨가 흥겨운 춤을 추며 엿가락을 잘라내는 모습까지 어느 곳에다 눈을 놓아도 그 풍경 하나 하나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재미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지나치기 가장 힘들었던 곳은 풀빵을 굽는 아줌마가 있는 시장의 중간 쯤 되는 곳으로 빵 굽는 달콤한 냄새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코를 자극하기 딱 좋아서 1개에 100원하던 그 풀빵을 사지 않고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였고 장 구경을 나온 사람들 손에는 그것이 마치 필수품이라도 되는 듯 풀빵 봉지를 들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눈짓으로 사주겠다는 의사표시를 했지만 나는 고래를 가로 저었다. 풀빵은 구운지 오래되면 될수록 밀가루 냄새가 났으므로 엄마에게 가져다주는 풀빵은 오늘 시장 구경을 다 마친 맨 마지막에 거쳐야 하는 마치 미리 정해져 있던 시장구경의 모범 교본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약속한 대로 내게 짜장면 한 그릇을 시켜 주시고 당신은 보기에도 매워 보이는 빨간 기름이 둥둥 떠 있는 짬뽕을 주문하셨다. 나는 음식이 나오기 전에 미리 나오는 반달 모양의 노란색 단무지가 몇 개 인지 숫자를 세워본다. 숟가락과 나무젓가락이 무질서하게 꽂혀 있는 연필꽂이 모양의 동그란 통에서 각각 두 개씩 꺼내어 아버지 앞과 내 앞에 마치 한 쌍의 부부처럼 키를 맞춰 놓았다. 

  “아버지가 잘라. 내가 하면 삐뚤게 되서 다른 거 다시 써야 될 수도 있으니까 그건 아버지가 잘라줘.” 

  아버지는 한데 붙어 있던 나무젓가락을 금방 두 쪽으로 만들어 내 앞에 놔 주신다. 나는 아버지가 두 쪽 낸 젓가락을 손바닥 사이에 넣고 부싯돌 불 붙이 듯 비빈다. 나무젓가락에서 하얀 때 같은 가루가 조금 떨어져 나왔고 나는 그것을 앉은 탁자 위에 두 번 탁탁 내리치고 아버지 숟가락 옆에 놓아 준다. 그 사이 우리가 먹을 음식이 나왔고 아버지는 내가 비빈 젓가락으로 면과 장의 양념을 먹음직스럽게 잘 섞어서 그 젓가락 그대로 내 앞으로 내 민다. 어쨌든 내가 비빈 젓가락이 내 그릇으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젓가락을 그릇 한 가운데 찌르고 빙빙 돌려 큰 덩어리로 만든 다음 입을 최대한 크게 벌리고 한 입에 쏙 넣고 매달린 면발을 앞니로 잘라낸다. 정말 맛있는데 담배 밭에 있을 엄마 얼굴이 떠오른다. 방학 중에도 학교에서 하는 보충수업 때문에 학교에 간 두 오빠 얼굴도 보인다. 나는 먹다 말고 아버지를 보면서 말했다. 

  “아버지! 집에 갈 때는 엄마 좋아하는 풀빵이랑 오빠들 잘 먹는 순대도 사 갈 거지?”

  “우리 수인이 엄마랑 오빠들 생각나는 가보네? 엄마를 닮아서 그렇게 마음씨가 고운 거냐.”

하시고는 탁자 위 정육면체 모양의 파란색 플라스틱 곽에서 휴지 한 장을 뽑아 내 입가를 닦아주신다.

  아버지는 꼭 해야 할 일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내 손을 잡고 시장의 맨 끄트머리 쪽으로 갔다. 그쪽은 항상 크다만 새끼 동물들이 작은 망이나 큰 대야 속에서 마치 품평회라도 나온 것처럼 전시되어 있었다. 먼저 팔려나가는 것이 그 대회에서 1등이라도 한 것처럼 주인들은 강아지 배를 손바닥으로 받쳐 높이 들어 올리면서 어미와 아비가 아주 크다고 말하기도 하고 새끼 토끼의 귀만 잡고서는 한 달 안에 완전히 다 큰 다는 사기꾼 같은 말들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몰려들게 하고 있었다. 겁에 질린 듯 한곳에 몸을 포개고 모여 있는 강아지를 보면서 집에 혼자 있을 덕구가 생각났다. 사실 최근 얼마동안 덕구에게 소홀하게 대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보다도 우리 집에 내가 세 살 무렵부터 함께 살게 되면서 그동안 새끼를 다섯 번이나 낳았어도 강아지가 젖을 떼고 엄마가 사온 분유 냄새 나던 사료 한 포대를 다 먹을 때쯤이면 덕구 새끼들도 이렇게 장에 끌려와 팔려 나갔기 때문이었다. 제 새끼를 그렇게나 여러 번 빼앗겼어도 단 한 번도 이빨 드러내며 으르렁 거린 적 없이 온순하고 영리했던 덕구는 그렇게 가난한 엄마의 살림살이를 돕고 있던 우리 집의 듬직한 버팀목이었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강아지가 진열된 곳을 지나쳐 토끼장 쪽으로 가셨다. 그곳에서 내게 맘에 드는 것으로 한 놈 골라보라고 하셨고 나는 이상하게도 약간 겁이 났다. 촘촘한 철망 사이로 토끼 다섯 마리가 자리를 바꿔가며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허리를 수그리고 토끼장 안을 더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유난히 움직임이 없는 한 마리, 뒤쪽 구석에서 갈라진 코만 실룩거리면서 소처럼 씹고 있던 아이에게로 눈이 고정되었다. 다른 녀석들보다 등치는 작아 보였지만 더 큰 귀를 쫑긋 세우고 마치 새침때기 고양이가 앞발을 직선으로 쭉 뻗고 앉아 있는 것처럼 바르게 앉아 있던 조금은 슬퍼 보이는 빨간 눈의 가장 작은 토끼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혼자 있는 것은 언제나 심심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작은 토끼 옆에 바짝 붙어 있던 또 다른 한 녀석도 집으로 데리고 왔다 

  아버지는 구멍이 좁은 철망으로 약 1미터 정도의 사각형 모양의 틀을 감쪽같이 만들어 내셨다. 지붕으로는 양철 재질의 곱슬곱슬한 파마머리 모양의 사각형을 처마가 생기도록 경사지게 올리고 그 모서리를 돌아가며 철사로 단단히 묶었고 길이를 맞춘 다리 내개를 사각형 각자의 모서리에 단단히 고정시켜 놓아 작은 여닫이문이 달린 토끼장을 금방 만들어 내셨다. 나는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도깨비 방망이처럼 뚝딱하고 만들어 내는 아버지를 보고 자랐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놀랍다고 칭찬하던 것도 사실은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적이 많았었는데 이번만큼은 예외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 말대로 따 놓은 자격증만 없다 뿐이었지 못하는 게 없는 마법사와도 같은 분이셨다. 

  토끼장 안에는 부드러운 풀들을 베어다 깔아 주고 이가 빠진 그릇 두 개를 찾아다가 토끼장 한쪽 벽에 놔두고 장에서 데려온 그 겁 많은 토끼들를 조심스럽게 넣어 주었다. 아버지는 본채와 사랑채 사이를 잇는 좁은 꽃 밭 옆에 토끼장을 놓았주셨다. 그 장소는 동산으로 연결된 바로 위에는 한 낮에도 내 몸 하나 쯤 가릴 수 있는 그늘을 언제나 드리워 주는 개복숭아나무 한 그루가 어색하게 서 있었던 곳으로 토끼장이 들어오면서 균형이 잡힌 제법 그럴싸한 풍경으로 변해 있었다. 덕구는 대문 옆 기둥에서 마치 못마땅한 듯 비비 꼰 두 앞다리에 뚱한 얼굴을 올려놓고서는 오후 내내 아버지와 내가 새 식구의 집을 마련하느라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흰자위가 보이도록 눈동자만을 굴려가면서 무관심한 척 했다.  

  여름은 사계절 중에서 가장 장점이 많은 계절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여름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정말로 신비로운 경험을 하기도 했다. 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저 먼 곳의 한 곳에 떨어져 나가서 마치 내 몸이 저절로 공중 부양을 하는 풍선처럼 거대하게 부풀어 올라서는 모든 나무와 풀과 심지어 구름과 해까지도 삼켜버려서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을 느끼는가 하면 반대로 먼지처럼 그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작아져서 대기 공간속을 자유로이 차지하는 공기의 일부처럼 변해버려서 그 가벼움에 참을 수 없는 부드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또 가끔씩은 납덩어리처럼 엄청나게 무거워진 몸이 점점 땅 속으로 꺼져버리는 모습을 또 다른 내 자신이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기도 했었다. 

  날씨가 나쁜 날을 제외하고는 나는 여름 방학 내내 거의 모든 시간을 토끼장 앞에서 살다시피 했다. 아버지가 토끼장을 선물하시면서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의 일거리를 갖고 있어야 인생을 보람 있게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작고 약했던 토끼들은 자라는 것이 하루하루 눈에 보일 정도로 몸집이 커져 갔고 들에서 뜯어다 주는 풀의 양도 점점 많아졌기 때문에 나에게는 토끼의 식사를 준비하는 시간도 점점 길어지게 되었다. 여름 내내 햇볕을 먹을 대로 먹은 풀잎들은 살이 통통하게 올라서 그 무게를 못 이기고 낮게 가라앉아 있었고 나는 손가락에 미세한 생치기가 나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토끼를 먹여 살렸다. 그것이 여덟 살 내 여름의 소임이며 어쩌면 막중한 책임이라고 까지 생각되었기 때문에 따가운 생채기 따위는 나의 임무를 완수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조건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나는 토끼장 앞에서 내가 뜯어다 주는 풀로 살이 쪄가는 토끼들을 바라보면서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 있어서 그야말로 최대의 관조의 시간을 경험하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무엇인가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그 이전까지 전혀 상관이 없던 일들이 조금씩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방안에 누워 있기에 몹시 더운 날 밤에는 대자리를 들고 나와서 시내 옆 길가에 펴 놓고 우리 다섯 식구는 나란히 누워서는 물소리를 들으며 하늘의 별들을 세기도 했다. 운이 좋은 어떤 날은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을 구경할 수 있었다. 빛이 다 꺼질 때까지는 하나 둘 셋 안에서 모든 것이 결정되어 버렸지만 작은 오빠가 <별 헤는 밤>을 아주 그럴 듯하게 읊기 시작하면 정말로 그 순간만큼은 신기하게도 흘러가던 냇물도 잠시 걸음을 멈춰 주었고 논바닥에서 시끄럽게 울어 대던 개구리 울음소리도 그만 뚝 그치면서 시간이 멈춰 버린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오빠! 작은 오빠는 이다음에 커서 뭐가 될 거야?”

하고 물으면 이럴 때는 나를 꼬마라고 놀리는 법도 없었다. 그저 마치 우리는 영혼의 친구라도 된 것처럼 그럴 듯한 대화를 이어가곤 했으니까. 작은 오빠는 내 예상대로 멋진 작가가 될 거라고 말했다. 

‘그럼 너는 뭐가 될 건데?’

하는 질문에 나는 항상 같은 대답으로 오빠를 웃기게 했었는데, 

  “나는 당연히 가수지, 아주 유명한 가수가 되어서 돈을 많이 벌 거야. 그래서 아버지 자가용 사드리고 엄마는 금반지 사 줄 거야.” 

라고 말하고는 나 자신도 멋쩍었는지 흐흐흐 하고 웃어버리기도 했다. 그리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하고 콧노래를 낮게 흥얼거렸는데 그 순간 유난히  별들이 반짝 거리는 이유는 우리의 노래를 서글프게 듣던 별들이 눈물을 닦느라 잠깐 눈을 깜박여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다. 

  별똥별이 떨어진다는 것은 오빠의 말대로 라면 어떤 한 사람이 막 목숨을 다해 저 하늘의 별이 된 대신에 새 생명의 아기가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라고 했다. 나는 아스라이 멀어지기도 또 어느 순간 내 눈 앞까지 낮게 내려앉은 것 같은 별들을 바라보면서 사실은 이 별빛이 이미 오래전에 우주 공간 속에서 빛났던 빛을 지금에서야 내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임을 알고 오빠의 별똥별 이야기도 아주 먼 옛날이야기라고 생각 되었다. 그래서 떨어지는 별똥별에 태어난 아기도 이미 이 세상에 없을 지도 모른다는 조금은 슬픈 상상을 했던 것이었다. 

  여름은 나를 아이에서 작은 어른으로 바꿔 놓았다. 눈을 감아도 잔상으로 남아있던 별 빛들은 나의 생각을 조금씩 꼬마에서 멀어지게 만들어 주면서 점점 복잡하고 미세한 선들로 머릿속에 뒤엉켜 있는 느낌이 들었고 그래서 인지 나는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들이 늘어 갔다. 저녁 무렵 서쪽 하늘에서 불타던 노을은 날이 갈수록 불꽃같이 화려하게 변해가고 있었지만 그 대신 점점 빠르게 꺼지고 차갑게 식어 버렸다. 타고 남은 재만이 앞산 위에 흩뿌려 진 듯 회색빛 어둠도 하루가 갈수록 조금씩 빨리 찾아오기 시작했다. 

  석양의 풍경이 변하는 것은 여름 안에 나를 가두었던 모든 시간은 이제 가을에 서서히 그 문을 열어 주기 시작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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