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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인생은조연]
제35편. 경찰관

꽃잎이 져야만 열매가 맺히는 법

by 김현이

어제는 퇴근을 십 여분 앞두고 내부 게시판에 뜬 글 한 편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내용을 읽어 보기 전 제목에서부터 어떤 애잔함이 묻어났기 때문에 평소 게시판 글을 잘 보지 않던 나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저절로 몰입이 되었다. 서울 한 복판의 분주한 지구대, 야간 근무동안 한 번쯤 벌어질 법한 흔한 사건, 술값 시비 현장에서의 실랑이, 그리고 건장한 체격의 취객의 주먹질에 출동한 경찰관의 아래턱이 나가고 입속에 짭조름하고 미지근한 액체, 피가 고인 것도 남이 안 보는데 가서 조용히 뱉어내야 하는 그런 모습이 그려진 경험담이었다. 별로 길지도 않고 담담하게 사실만을 적어낸 그 글을 다 읽은 순간 내 마음속에는 어떤 무거운 덩어리가 차 올라와 목구멍을 틀어막는 것 같은 기분에 숨이 가프면서 나도 몰래 눈물이 찔끔 나왔다. 나는 이제 햇수로 12년째 근무를 하고 있는 대한민국 경찰관이다. 대한민국 경찰관이라야 저 글을 읽고 나서 나와 비슷한 동정심과 애잔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제목 : 새빨간 동백꽃은 새벽이슬에 떨어지고......


나는 거의 처음으로 다른 분의 글에 댓글을 달았다.


진 꽃잎에도 그다지 슬프지 않은 것은 붉게 멍든 그 자국을 새벽이슬 방울 떨어질 때 함께 닦아내던 긴 세월을 지내 와서 그러는가 봅니다.


라고 짤막한 글을 남겼다. 나는 경찰관인데 근무복을 입지 않고 평소에 다른 곳에서 나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거의 내 직업을 전혀 짐작하지 못할 정도의 체격과 태도와 생김새를 갖고 있다. 신임시절에는 동기들과 농담처럼 나누던 대화에서 그들이 ‘와! 내가 지금 근무복만 안 입고 있었어도 너는 한 주먹도 안 될 거야.’ 말할 때 나는 언제나 정 반대로 ‘내가 지금 근무복만 입고 있었더라도 가만 안 있었을 거야.’ 라고 말했었다. 성격에서 오는 소심함과 겁을 많이 타고 나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거의 언제나 대한민국 경찰관 제복을 입은 내 모습에 진심으로 당당함과 자부심을 느꼈고 사복을 입었을 때보다 마음이 넓어지면서 더 큰 용기도 생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그들보다 한 계단 우위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우선 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나를 경계하지 않고 다가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 또한 폭 넓은 다양한 도움을 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할 수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비록 언제나 최선을 다해 근무를 하지는 못하지만 경찰관이라는 사명감만큼은 늘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퇴근 무렵 게시판에 뜬 글에서 경찰관의 정당한 직무를 방해하고 그 마음속에 있는 자존심까지 으깨버린 취객의 주먹한방도 남몰래 삭여버려야 하는 그 모습에 저절로 감정이입이 되어 마음이 찡했다. 지구대에서 근무하는 경찰관은 언제나 최고의 일선에서 최고로 빨리 주민들에게 최대한 가깝고 최대한 친절하게 근무를 하고 있음에도 그렇게 턱주가리나 얻어맞아가면서 고인 피조차 남몰래 뱉어 내야 한다는 것을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나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누가 알아봐주지 않더라도 고맙다는 인사를 받지 못하더라도, 비록 그 곳이 어두운 음지가 될지라도 언제나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킬 뿐이다. 그 분들이 바로 지구대 경찰관들이다. 봄비가 추적추적 흐느끼며 눈물을 튕기는 4차선의 아스팔트를 뚫고 가서 나는 오늘 진짜 38권총으로 총알 35발을 쏘고 왔다. 나는 이렇게 자유롭게 총도 쏠 수 있지만 또한 총 쏘기를 두려워하는 경찰관이다.


다른 사람들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내가 보니 그런 것일까! 도로 옆, 아직 이파리 한 장 안 달린 벚나무가 빗물에 흠뻑 젖어 퉁퉁 부은 채로 서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더 검게 보였다. 나무껍질 틈을 비집고 피어난 연분홍 벚꽃 잎들이 작은 어깨를 가볍게 흔들며 흐느끼는 것을 바로 보지 못하고 곁눈으로만 훔쳐보았다. 꽃잎부터 피우는 벚꽃나무가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아름답기도 하고 그들의 마음까지 온화해지도록 해 주는지 모르지만 정작 벚나무 자신은 생존하려고 꽃망울부터 터트린다는 그 속내를 과연 우리들은 얼마나 짐작 할 수 있을까 싶어서 왠지 똑바로 보는 것조차 미안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얻어맞아서 입안에 고인 피조차 함부로 뱉어내지 못하는 경찰관의 모습과 그 속내가 닮아 있는 것 같아서 비를 맞고 우두커니 서 있는 벚나무한테서 나는 친근하고 애잔한 동정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시작한 비는 오후가 한 참 지났는데도 소리를 내면서 쉼 없이 내리고 있다. 한 밤중, 경찰관이 일종의 침묵과도 같은 끊임없는 무전기 소리에도 매우 익숙해지듯 오늘 낮, 정오에 잠시 비가 그친 순간의 정적이 오히려 훨씬 큰 소음처럼 들렸던 것은 모두가 잠 든 늦은 밤, 이른 새벽시간의 조용한 무전기가 안심이라는 편안함이라기보다는 깨어있을 경찰관에게는 오히려 더 큰 심리적 부담이 되는 큰 울림과도 비슷하기 때문이 아닐까.


먼저 핀 꽃은 먼저 지기 마련인 줄 알지만 나는 지금이 아무리 벚꽃 한창인 4월의 초순이라도 어릴 때 천변에 늘어져 제법 오랫동안 피어있는 꽃 과즙이 달큰한 5월 초순의 아카시아 꽃이 문득 그립다. 12년 전 3월, 나도 살기위해 꽃을 먼저 피운 벚나무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그때부터는 이제 꽃망울은 맺지도 못하고 푸른 이파리만 돋는 것은 아닌가 싶어져 한번쯤은 초심으로 돌아가 봐야지, 그래야 하는게 맞나 싶지만 어차피 꽃은 지려고 피어나는 것이다. 그래야 열매를 맺을 수 있으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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