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을 한 시간여 앞두고 갑자기 오늘까지 해결하고 가야 할 문서들이 내려왔다. 나는 꼼짝없이 퇴근 시간을 맞추려고 마치 몇 끼를 굶은 사람이 밥을 먹듯이 급하게 문서를 작성했고 겨우 퇴근시간을 맞출 수가 있었다. 나와 사정이 다른 사람들이야 조금 연장 근무를 하고 시간외 수당도 챙기고 하면 좋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아이의 하원시간을 맞춰야 하고 또 집에서 이제나 저제나 엄마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기에 정규 근무 시간 이후의 초과근무를 꿈꿀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퇴근 후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본다고, 아니 그것도 아니라면 타인과의 약속이라든지 심지어 사무실 회식자리에도 항상 참석하지 못했었다. 그렇게 10년을 지내왔다. 그러니 이렇게 퇴근 전까지 결재를 받아야 할 일이 갑자기 생기는 날에는 몸과 마음이 조급해지고 내 책상과 수직으로 이어져 있는 벽에 걸린 시계를 계속 쳐다보게 되는 것이었다. 근무복을 갈아입고 겨우 퇴근 시간을 맞출 수 있었지만 그래도 평소보다 10분이나 늦어졌다. 아이들이 홀로 10분을 더 기다리려면 얼마나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을지 복도의 발자국 소리에 얼마나 귀를 쫑긋 세우고 숨죽였을 지를 나는 잘 알고 있었기에 정말로 급하게 막내아이 유치원으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퇴근을 기다리는 원의 선생님들이 혼자 남겨진 우리 아이를 데리고 바깥 놀이터에서 아이에게 미끄럼을 태워주고 계셨다. 그분들도 나를 기다린 것이다.
“죄송해요, 선생님. 오늘 제가 좀 일 때문에 늦었어요.”
“단우야! 엄마 많이 기다렸지?”
선생님은 그래도 평소와 같이 밝은 표정으로,
“어머니 오늘 단우 상담하셔야죠?“
그래 맞다. 무엇인가 잃어버린 사람처럼 일을 하면서도 마음이 더 급해졌던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오늘 마침 막내 아이가 원에서 그동안 어떻게 생활하는지 상담하기로 벌써 전부터 약속이 되어 있었고 달력에도 파란색으로 표시까지 해 놓고서는 그만 급하게 내려온 일처리로 모든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시계를 다시 보았다. 큰 아이들도 지금 평소보다 늦는 엄마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렇다고 이미 선생님과의 약속을 갑자기 취소하고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가버릴 수도 없고 선생님께서도 상담을 위해 아이에 대한 상담 자료를 준비해 두고 계셨을 테고 사실 오늘 나는 사무실에 말씀을 드리고 평소보다 10분이라도 더 빨리 나왔어야 했었다. 그런데 모든 시간이 계획보다 최소한 20분이나 뒤로 밀려나 있었던 것이었다.
“네, 선생님. 상담해야죠.”
솔직히, 유치원을 새로 들어가고 아이가 아침에 헤어지기를 힘들어 한 것은 딱 2주일뿐이었다. 아이가 항상 친구들의 이름도 대가면서 놀던 이야기를 들려주고 표정도 밝았으니 특별히 아이에 대한 걱정을 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하루하루 아이가 잘 다녀주는 것에 고맙다는 마음뿐이었다. 또한 큰 아이부터 어릴 때부터 아이들을 돌봐주셨던 선생님들은 언제나 비슷한 말씀으로 아이와의 떨어져 있는 시간에 대한 미안함에 내게 용기를 주기도 하셨다.
‘어머니, 솔직히 단우가 거의 항상 어린이 집에 가장 오래 머물지만 정서적으로는 무척 안정되어 있어요. 그것은 엄마가 나를 여기에 데려다 놓았더라도 꼭 나를 데리러 오실 거라는 확신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는 뜻이에요. 분리 불안을 갖고 있는 아이들은 원에서도 단우처럼 저렇게 안정된 모습을 보이지 않아요. 그건 어머님이 아이와 함께하는 동안 친밀한 애정으로 아이에게 믿음을 주셨기에 가능한 행동입니다. 아이를 바쁜 와중에도 정말로 참 잘 키우고 계신 거예요.’
나는 그날도 선생님께 이와 비슷한 말씀을 들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야 이것보다 훌륭한 칭찬이 또 어디 있으랴. 사실 대화가 20분이 넘게 지속되면서 나는 집에 있을 큰 아이들 생각 때문에 선생님과의 대화를 제대로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선생님께서 단우의 특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일화를 말씀해 주셨다.
“어머니, 일전에 단우를 안아 보다가 3월 입학 때보다 몸이 좀 자라있는 것 같아서 ‘우리 단우 살쪘네?’ 하고 말하니 글쎄 단우가 이렇게 말을 하더라구요.”
“어~? 살은 정우 형이 쪘는데?”
“그래? 정우 형이 살쪘어? 그런데 단우야! 살이 찐 것은 좋은 거야.”
나는 그 순간 모든 걱정거리는 싹 잊어버리고 아주 유쾌하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평소에 집에서 통통하게 살이 찐 정우에게는 ‘퉁퉁이’, 마른 체형인 둘째 선우에게는 ‘비실이’라는 별명을 부르면서 애들이 좋아하는 도라에몽의 케릭터를 따라하며 장난을 치고 놀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우리 단우는 볼 살이 아주 귀여우니까 주인공 도라에몽이라고 추켜 세워주면서, 그러니 아이가 선생님의 살쪘다는 말에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살은 정우 형이 쪘는데.’라고 대답한 것이다. 정말로 귀엽고도 단우만이 할 수 있었던 대답이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도 혹시 단우 형 중에 정우가 있느냐고 물으셨고 내가 이런 상황을 말씀드리자 선생님께서도 단우는 원의 선생님들한테도 예쁜 행동을 참 많이 한다면서 그래서 더 귀여움을 받고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또 일전에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했었고 그러자 모두들 ‘단우가 참 영리하구나.’하시면 아이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으며 모두들 한바탕 웃으셨다. 그러면서 언니가 단우를 들어 안으면서 ‘우리 단우 살쪘구나.’ 말하니 단우의 대답은 더 어른들을 놀라 게 만들었다.
‘살찐 건 좋은 거예요.’
사실 그렇다. 단우는 두 형들과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낸 탓인지는 몰라도 말을 참 빨리 배웠었다. 그런데 아이가 하는 말들이 그냥 보통의 아이들이 하는 그런 말들이 아니라 간혹 어른들을 깜짝시키면서 반성을 시키기도 했던 적이 많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단우를 꼬마변호사라고 부르시기도 했다.
가끔 아이들을 혼낼 때가 있는 날에는 나만의 설명하는 방식이 있다. 왜 엄마가 화가 났는지 혼을 낸 이유가 무엇인지 혹시 혼이 난 것에 불만은 없는지 대화로서 풀어보고자 하는 이유도 있으며 그렇게 해야 나의 미안한 마음도 자연스럽게 사과할 수도 있고 그러면서 상한 마음을 서로 서로 달래기 위한 이유에서다. 그렇게 아이 셋을 앉혀 놓고 오늘 혼이 난 이유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혹시 엄마가 잘못 오해하고 혼을 낸 것이라 억울한 사람이 있다면 그런 것까지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보라고 한다. 그러면 정우는 제 나이보다도 그 날 상황의 본질을 더 정확하게 꿰뚫고 어떤 날에는 내가 진심으로 미안한 생각이 들게끔 이야기한다. 선우는 정직하게 사실대로 엄마를 화나게 만든 것이 자신들의 이러 이러한 행동 탓이라고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아주 교과서처럼 표현한다. 그러고는 보통 단우한테는 발언권을 주지 않았었다. 이 복잡한 상황을 아이에게 설명해 보라고 한다는 것이 아이 자신한테도 스트레스가 될 것이 뻔하고 솔직히 그 작은 아이가 잘못을 했다면 또 얼마나 대단히 잘못한 것이 있을까 싶어서 거의 언제나 단우에게는 형아 들이 말하는 것을 지켜보게만 해 왔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단우는 다섯 살이 되면서부터 자기도 말하겠다고 먼저 말을 했고 거의 언제나 형아 들이 말을 다 마친 후에야 시작했었지만 형아 들의 말을 아이의 마음속에서 생각하고 다시 자신만의 생각대로 표현해 내는 것이 아니던가. 나는 정말로 놀라웠다. 처음 아이가 자기도 발언권을 달라고 했던 그 자체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아이의 말을 다 듣고 났을 때의 그 놀라움이란 아이의 진지한 표정과 정확한 발음, 연결어를 통한 문장의 표현력으로 나는 진심으로 놀라고 말았던 것이다.
가끔씩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쳐버리는 순간도 단우의 작은 입속에서는 어른을 놀라게 하는 수많은 탄성어로 바뀌어 쏟아져 나온다. 여전히 내 품안에서 잠을 자고 잠결에 엄마 쮸쮸가 잘 있는지 몇 번씩 만지고 물고 확인을 하면서도 그 마음속에 얼만큼 큰 꿈이 자라고 있었던 것인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쳐버린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나는 이 순간 ‘모든 초안은 끔찍하다.’고 헤밍웨이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인생의 모든 것들은 전부다 글로 옮겨 쓸 수 있는 것들이다. 다만 우리는 수많은 핑계로 그것들을 외면하면서도 제각자의 이유를 끌어들여 합리화시켜가면서 소위 ‘자기만족’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예전에는 글로 쓸 만한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고자 다짐했었다. 그렇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느낀다. 내가 영위하는 모든 일상들은 글로 쓸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며 오히려 내면의 성찰과 반성을 통해 그것들을 발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다만, 그것을 쓸 만한 용기와 기억력과 상상력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글을 써낼 수 있으며 창작의 적은 오로지 내 안의 불신뿐이라는 것을.
내가 퇴근이 늦었던 그날, 큰 아이들은 내 예상대로 우리 집 아파트 1층의 슬로프로 된 주진출입로에 걸터앉아서 웬일인지 늦은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의 하얀색 승용차가 모퉁이를 돌아서 우리 집 앞의 주차장으로 들어오기를 얼마나 기다렸을지 나는 그 마음을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차 안에 있는 형아 들의 모습을 먼저 발견하고는 ‘엄마 형아 들이다.’하면서 무척 반가워했고 주차선이 조금 삐뚤어지게 됐어도 고쳐 댈 생각도 없이 그냥 차에서 내렸다. 엄마가 무슨 일로 늦는지 혹시 평소 잘못한 일로 정말로 엄마가 우리를 남겨두시고 집에 안 오실까봐 염려도 했을 것이고 조촐하게 차린 저녁상에 엄마와 함께 둘러앉아서 낮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배고픔을 채울 그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을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아이들은 엄마가 왜 평소보다 늦게 되었는지 계속 반복해서 물었지만 나는 그냥 일이 조금 있어서 그런 것이라면서 많은 말은 하지 못했다. 그저 평소보다 서둘러 저녁상을 내어 아이들이 밥을 먹는 그 입 모양을 바라보고 통통하게 불러올 배를 상상하고 잠들기 전에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까하는 마음만 들 뿐이었다.
목욕물을 받아 놓고 옷을 벗겨 주면서 나는 아이의 오동통한 몸을 안고 말하고 아이는 엄마 품에 안겨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