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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편. 어차피 소꼽장난

인생은 소꼽장난-, 그래서 더 명심해야 하는 사실들

by 김현이

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빛이 어둡다. 미세먼지 탓이라고 하기 에는 하루 중에 볕이 가장 크고 넓게 드는 시간임에도 낮게 내려 앉아 하늘을 지저분하게 어질러 놓은 구름의 두께를 통과할 만한 힘을 쓰지 못하는 것 같다. 반나절을 야외에서 활동한 탓인지 맨살로 노출된 팔뚝에 붉은 경계선이 생겼다. 봄이 사라져 버린 요즘이라서 봄볕을 얕잡아 봤다는 생각을 해 봤자 이미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4계절이 뚜렷하던 전과 달리 겨울과 여름사이에 있으면서 늘 설렘과 기다림의 대상이었던 봄은 우리들이 제대로 즐겨볼 여유마저 주지 않고 그저 멀어져 가기만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봄 처녀’라는 단어도 ‘봄바람 났다.’는 말도 자연스럽게 쓸 일이 없어지게 되면서 이렇게 환경오염은 우리의 생활뿐만 아니라 사람의 전유물인 말까지도 함께 가지고 가 버리면서 인간이 오염시킨 자연은 마치 복수라도 하는 듯 부메랑이 되어 갖가지 변화를 몰고 왔다.


일 년에 한 번은 꼭 거쳐야 하는, 마치 벼를 수확하기 위해서는 모내기를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것과 같이 경찰관에게 체력검정은 통과의례와도 같다. 연령대별로 급수와 등급이 정해져 있어서 나름대로 합리적인 기준을 갖추고 있을지라도 내게는 언제나 피하고 싶은 백 미터 달리기가 필수 종목으로 들어가 있다는 것이 매년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몸을 움츠려들게 까지 했다. 다른 동료들은 ‘어차피 승진할 것도 아니니 그냥 대충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가볍게 생각하고 넘기는 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내 경우엔 승진과 근무평정, 그리고 기타 성과등급과 관련된 모든 사안들을 차치하고서라도 꼭 잘 해내고 싶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언제나 백 미터 스타트라인만큼 나를 긴장시키는 것도 없었다. 역시나 올해도 나는 백 미터 달리기에서 2등급을 벗어나지 못했다. 다소 부끄럽고 양심적인 고백을 하나 하자면 아마도 내가 우리 경찰서 여자 경찰관 중에서 백 미터 달리기의 기록이 가장 늦을 것이리라. 나를 평소에도 유난히 아끼던 선배님이 내가 뛰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다가 다 뛴 기록을 확인하고 기록 판정관 앞으로 다가와서는 내 평가기록을 적는 종이를 다시 되찾아가면서 한 말씀 하셨다.


‘현이 한 번 더 뛸 겁니다.’


나는 한사코 괜찮다고 말했지만,


‘내가 손잡고 뛰어줄게. 기분이다. 한 번 더 뛰자.’

고 하셨다.


나는 평소 내게 보여주셨던 그 선배님의 친절과 관심에 고마움을 갖고 있으면서도 딱히 감사의 표현을 하지 못하고 지냈는데 그 날은 내내 그 분의 진심을 다시금 느끼게 된 것에 마음 한구석에 뭉클한 감동을 느꼈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뒤 우연히 차 한 잔을 마시게 된 자리에서 그날 내가 느꼈던 마음을 아주 조금은 전할 수가 있었다. 참 오랜만에 직장생활에서 진심을 받았다고, 그래서 선배님께 정말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고 말이다.


가족이 아닌 사회에서 맺어진 보통의 관계에서 누구도 나서주지 않는 상황에서 단 한명이라도 내 편을 적극적으로 들어줄 사람이 있는 사람은 정말로 잘 살아온 사람이다. 계약과 이익관계로 맺어진 관계들 틈에서 그런 진심을 받을 수 있는 사람도 선뜻 그런 마음을 나눠 줄 수 있는 사람도 선량하며 행복한 사람인 것이다. 아마도 시간이 점점 미래로 가면서 더 그럴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날 비록 백 미터 달리기의 기록이 전년보다 더 느려졌더라도 기록을 단 얼마라도 단축했을 때의 마음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그런 기분을 느꼈었던 것이다.


어르신들 앞에서 못하는 말도 없다는 말을 들을 법한 이야기 좀 해볼까. 나이의 앞자리 숫자가 바뀐 지 얼마나 되었다고 힘이 부족해진다는 것을 느낀다. 마흔은 정말로 젊은 나이지만 나에게는 늦은 밤까지 깨어있을 만한 체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게 했고 그래서 아이들을 재우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아이들보다 먼저 잠드는 날이 많아졌다. 가끔 고3 수험생에게 공부도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어른들을 생각해 보았을 때 나는 그런 몸 상태로는 잠들기 전까지 다섯 쪽의 책도 읽기가 어려웠다. 전처럼 잠을 깨볼 의지조차 없어져 버리면서 체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고 있었다. 그러니 점점 내 스스로에게 불만이 생겼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은 마음에 날이 일찍 밝아오는 것을 잘 이용해서 새벽시간에 조금이라도 부지런을 떨어야겠단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직은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가 내 계획이 잘 지켜지도록 도와주고는 있지만 솔직히 이렇게라도 몸을 움직여야 하루를 지날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기는 것 같았기 때문에 더 정신을 차리게 되었고 이런 날들이 하루 이틀 늘어날수록 책 한쪽 읽지 못하고 잠드는 밤들에 대한 죄책감에서 조금씩 벗어난다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요전 날에도 나는 어김없이 새벽에 일어나 밤사이 연락 온 것이 있는지 확인을 하던 중 마음이 매우 심란해져서 온 거실바닥을 걸레질을 하면서 아침을 기다린 날이 있었다. 평소 나와 친분이 있는 어느 분이 자정이 되기 전에 보낸 장문의 메시지였다. 금방 읽은 메시지임에도 나는 다른 말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쓴 글을 보면 그냥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싶다는 첫 문장만 생각날 뿐이었다. 걸레질을 그렇게 오래했는데도 아직도 아이들을 깨우기 전까지는 한참 남은 시간 탓과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책상 앞에 정좌를 하고 독서대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눈으로 첫 단락을 읽었으나 계속 같은 단락만을 보고 있었던 나를 발견했고 이번에는 아예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면서 책을 낭독했다. 하지만 목청을 타고 나오는 단어와 문장들은 전혀 조합되지 못한 채 제 각자 공중으로 흩어져 버리고 내 머릿속에는 공허함만이 남는 것 같았다. 그저 내 목소리만이 공중의 먼지와 부딪히면서 아침을 재촉하는 울림으로 번져나가고만 있었다. 순간, 나는 ‘내가 요즘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니구나, 어디에다 정신을 빼 놓고 살고 있는 것이지. 어쩌면 내가 실제로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불안하게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불쾌감만이 나를 엄습할 뿐이었다.


보통은 그 사람이 어울리는 사람을 보게 되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충은 짐작할 수가 있다. 이런 것을 두고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고 한다는 것쯤은 초등학생만 됐어도 다 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서 또 다른 누군가는 과연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까? 그런데 내가 만나는 사람이 누굴까?, 내가 어울리면서 함께 취미를 공유하고 자연스럽게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누굴까, 생각해 보았지만 몇 분의 얼굴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 칠 뿐 오래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뭘 하고 살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불현 듯 화가 치밀었다. 그냥 누군가 나에 대해 한 번씩 하는 말은,


‘착하다, 성실하다, 똘똘하다, 영리한데 아깝다, 그리고 참 아이들한테 잘한다......‘


이런 누구에게나 내릴 수 있을 만한 그저 그런 평가였고 정작 정말로 친한 사이에서 주고받을 만한 그런 편안한 평가를 내리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거다. 그저 착하기만 하고 성실한 나는 타인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사는 사람이니 건강한 사회인의 표본은 될 수 있을지라도 내 자신의 내적인 만족감을 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화가 났다가 급기야는 서글픈 생각마저 들었던 것이다.


나를 살게 하는 원천, 힘은 무엇일까. 그동안 수도 없이 본연의 자아를 위해 행복을 위해 살라고 써 왔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한 나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 현실과 내 의지와의 괴리가 나를 스트레스 받게 하고 머물게 만드는 것이다. 내 아이를 칭찬하는 말보다 내 자신을 칭찬하는 말에 더 기쁨을 느껴야 정상이지만 솔직히 나는 내 자신에게 그다지 믿음이 없는 사람임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이 소극적인 나로 점점 후회하는 나로 만든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무엇으로 전자와 후자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지 알고는 있는 것 같은데 실천을 못하는 나 자신을 알고 있다. 이도저도 못하기 때문이다.


한 번씩 나도 몰래 눈물이 나오는 날에는 아이들에게 감추려는 심사로 그냥 바람을 맞는다. 모르게 하는 것이 그것이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힘이 들면 새벽에 일어날 때 한 두 번은 게으름을 부리는 방법도 써볼 생각이다. 부지런을 떨자면 안 그래도 부족한 적혈구들을 많이 써야 하는데 게으름을 피워서라도 체력을 비축해 두면 자연스럽게 마음도 맑아질 것 같기 때문이다. 골치 아픈 상황에서 물론 게으름을 피우는 것을 상책이라고 말하는 것을 두고 억지라고 듣기에 거북하다고 한다면 이미 그런 쪽으로 정해진 것에 차라리 달관하기로 마음먹었다고 고쳐 말하면 되지 않겠는가. 어차피 시간은 저절로 지나가고 나도 점점 나이 들면서 체력이 약해지는 만큼 정신 또한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니까.


어느 날 오후, 퇴근 시간을 앞두고 심한 배고픔을 느끼고는 일부러 몸을 움직여 장운동을 시켜주려고 주차장 뒤편으로 걸어 나갔다. 주차 선을 따라 일자로 몇 바퀴를 돌고 있자니 정말로 감쪽같이 배고픔을 느끼지 못했었다. 공복감에서 오는 특유의 역겨움과 속 쓰림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대신 갑자기 현기증이 밀려와 그저 내 엉덩이를 붙이고 앉을만한 자리라도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 사무실로 들어와 그날 업무를 마무리 했다. 무조건 쓴 글 말미에 그날 저녁 아이를 데리러 갔을 때 막내네 선생님께서 해 주신 말로서 대신하고자 한다. 거의 언제나 가장 늦게까지 유치원에 남아 있는 아이, 그 아이를 돌봐주려고 항상 거의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아이의 선생님, 아이는 그런 선생님께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던 것인지는 모르나 선생님께 그날 오후 그렇게 말을 했다고 했다.


“선생님을 단우가 많이 좋아하니까 이렇게 매일 매일 가장 늦게 남아 있는 거예요. 우리 엄마가 빨리 오면 좋겠지만 그래도 엄마가 단우를 데리러 오게 되면 선생님도 빨리 엄마한테 가세요. 알았죠?”


어차피 무거운 인생도 가벼운 인생도 딱 한번 뿐, 지난 시간이란 되돌아오지 않는 법이니 어떻게 보면 어차피 소꿉장난- 각자 역할 분담에 따라 성실히 연극하는, 그래야 또 놀고 싶어지는-이나 별반 다름없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이런 이유로 삶에 열의를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그런 생각을 명심할 뿐이다.


2018. 5. 29. 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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