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는 중에도 엄마는 계속 마냥 신이 나서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얼른 목욕탕으로 들어가서 물 받고 양치질도 하고 있으라고. 그리고 오늘은 특별히 각자의 동물인형도 목욕을 시켜줘야 하니 평소보다 더 서둘러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엄마의 말이 들리는 것인지 아닌지 온통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엄마, 물고기가 이상해. 다이빙 선수 같이 솟구쳐 올라와 다시 바닥까지 수직을 떨어지고 계속 그래. 그리고 아가미를 엄청 크게 벌렸어. 그리고 우리가 보고 있는 줄 아는 가봐. 자꾸만 죽은 척을 해.”
엄마는 큰 아이의 말에 설마 물고기가 죽은 척을 할까 싶어서 손에서 거품을 씻어내고 어항이 있는 쪽으로 갔다.
“언제부터 그런 거야?”
“응 어제 저녁 때부터”
“죽은 척 하는 게 아니라 어디가 아픈 것 같은데?”
아이들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그럼 빨리 병원에 데리고 가자고 말했다. 물고기는 정말로 마지막 사경을 헤매는 것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수면까지 헤엄쳐 올라와 좁쌀 만 한 기포한 방울을 수면에 띄워놓고 힘을 다 써버린 듯 정말로 죽은 것처럼 가라앉았다. 그리고 계속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얘들아, 물고기가 많이 아픈 것 같아, 좀 안됐지만 저렇게는 오래 견디지 못할 거야. 그리고 병원에는 데려갈 수 없단다. 아무튼 지금은 병원에 데려갈 수는 없어. 곧 하늘나라로 갈 것 같으니 물고기가 살아있을 때 마지막으로 인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엄마는 엄지손가락 크기 만 한 물고기를 병원에 데리고 갈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담담하게 말했지만 마음속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그리고 혹시라도 물고기가 알아듣기라도 할까봐 큰 소리로 말하지도 못했다.
그러니까 물고기가 우리 집에 살기 시작한 것이 거의 1년 전 부터인 것 같다. 큰 아이가 어떤 날 학교 방과 후 수업시간에 지느러미가 화려하고 청록과 푸른빛이 나는 열대어를 갖고 왔는데 그것을 키우기 시작하면서 물고기를 네 마리까지 늘려왔다. 큰 아이가 처음에 데려온 아이는 ‘힘찬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주며 마치 우리 가족처럼 대우했다. 그러다 어항을 청소하고 물을 갈아주던 날 힘찬이가 몹시 심한 경기를 하더니 아가미를 쩍 벌리고 물위로 동동 떠오르는 것이 아니던가. 휴일 오전 엄마가 저지른 일을 큰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하는지 당황을 했고 곤란한 상황에선 언제나 가장 정직하게 말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엄마는 아이에게 엄마의 잘못으로 힘찬이가 죽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아이는 당연히 실망했다. 엄마는 대신에 다른 아이를 데려와 어항도 더 큰 것으로 예쁘게 꾸며주면서 잘 키워보자고 달래 주었고 아이의 표정은 곧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더 미안했던 것은 물고기는 좋은 나라로 떠났으니 괜찮으니까 잘 묻어주면 된다고 말을 했다는 것이다. 아이는 아이 나름대로 그렇게 슬프고 서운한 마음을 감추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큰 아이가 데려온 아이는 베타라는 열대어로 육식성의 성격이 사납고 이기적인 물고기였다. 그래서 다른 물고기들과 한 어항 속에서 살면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결투를 벌이는 물고기라서 꼭 한 어항에 한 마리씩만을 키워야 하는 조금은 관리하기 까다로운 종이었다. 아이와 수족관 가게에 가서 힘찬이와 가장 비슷한 녀석으로 데려오기를 약속하고 갔던 것이 마침 그날은 암컷 한 마리만이 남아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매우 단순하고 소박하게 생긴 녀석을 집으로 데리고 올 수밖에 없었다. 순진하게 생긴 그 녀석은 여자였다. 그래서 엄마의 사내 녀석들은 마치 그 물고기가 엄마인 듯 온갖 관심과 사랑을 쏟았다. 아이들과 상의한 끝에 ‘순순이’라는 이름도 지어 주었다. 그렇게 순순이는 힘찬이가 떠난 후 우리 집에 가장 먼저 왔고 그 뒤로 물고기가 너무 외로워 보인다고 하는 아이들의 의견을 따라 레드와 블루 베타, 각 각 수컷 두 마리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렇게 홍일점 순순이를 중심으로 양쪽에 블루와 레드의 집을 차려놓고 우리들은 스탠드 등까지 밝혀주면서 그렇게 애지중지 몹시도 추웠던 겨울을 지나왔다. 열대어였지만 그 추위를 잘 견뎠고 움직임도 매우 활발했고 먹이도 아주 잘 먹었다. 엄마는 어항 청소를 하는 날이면 힘찬이가 생각나서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 했었다.
짝을 맞춰야 한다는 아이들의 의견을 따라 레드 베타 수컷 한 녀석을 또 데려왔고 그래서 우리 집에는 총 네 녀석의 물고기들이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중 가장 막내였던 레드가 혼자 아프다가 그렇게 결국은 죽은 것이었다. 조금은 엄마답지 못한 행동일지 모르지만 왠지 그날 밤을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았던 녀석을 새벽에 확인하는 것이 두려워 큰 아이를 시켜 물고기가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보라고 했는데 나의 예상대로 그 녀석은 그렇게 힘들게 마지막 호흡을 하다가 자갈 돌 틈 사이로 머리를 처박고 죽어 있었다. 엄마는 녀석을 꺼내 거즈로 싼 다음 분홍색 리본으로 예쁜 장식처럼 묶었다. 그렇게 하는 데 문든 돌아가신 할머니 염하던 날이 눈앞에 스쳤다. 그냥 엄마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아이들에게 이제는 보고 싶어도 영영 볼 수가 없으니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하며 엄마도 같이 ‘좋은 곳으로 가서 잘 살아라.’ 그리고 ‘우리 집으로 와 살아줘서 고맙고 미안하다.‘ 고 인사했다. 녀석도 힘찬이와 같이 아가미를 크게 벌린 채로 화려한 피 자두 빛 몸도 바랜 커튼을 친 불 켜진 창문의 색깔처럼 그렇게 투명하게 변해버린 뒤였다. 레드는 사실 자식으로 치자면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다. 지난 달 바닷가에 놀라 갔다가 주워 온 소라껍데기도 세 개뿐이라는 이유로 가장 막내인 녀석한테만 넣어주지 못해서 괜한 플라스틱 구슬을 더 넣어줬는데 왠지 그것이 레드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아닐까하는 별의별 생각까지 들었다.
엄마는 힘찬이가 죽었을 때보다 왠지 마음이 더 아팠다. 먹이를 주려고 어항을 툭 칠 때 수면으로 올라와 귀여운 주둥이를 쑥 내밀던 모습이 생각나고 어항 청소를 해 준 그날은 저도 기분이 좋았던지 그 좁은 어항 속을 정신없이 헤엄치던 것이 자꾸만 떠올랐다. 아침에 침울해져 있는 아이들에게 레드와 비슷하게 생긴 아이를 다시 데려오자고 말은 했지만 엄마는 아마 오랜 시간이 지나야 또 다른 녀석을 데려 올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그 자리를 다른 녀석으로 채울 수 있을까 아니 영영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분홍색 리본으로 곱게 묶은 레드를 큰 아이 손바닥 위에다 올려주면서 아마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부터 나이를 많이 먹었던 모양이라며 살아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 한 번은 꼭 죽기 마련인데 아무래도 레드는 아프기도 했겠지만 나이를 많이 먹어서 그런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러면 아이가 조금은 덜 슬퍼할 것 같아 그런 것인데큰 아이의 예상하지 못한 말로 내가 더 슬퍼하게 될 줄은 몰랐었다.
“엄마, 왕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다 그럴 때가 되셔서 돌아 가신거야? 왕 할머니는 몸이 편찮으셨잖아. 아프지만 않았으면 지금도 살아계실 것 같은데. 엄마, 설마 이 물고기 다시 살아나지는 않겠지?”
엄마도 돌아가신 할머니도 살아계셨으면 좋겠고 죽은 레드도 다시 깨어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맞닥뜨린 결과를 앞에다 두고 그 원인에 대해 자기중심적으로, 또는 자기 이외의 다른 원인을 두고 한동안은 원망하거나 분해하고 억울해하면서 슬퍼한다. 수많은 가정을 두고 지난 시간 내가 이렇게 했더라면 지금 결과가 이렇게 되었을까도 생각하면서 후회도 한다. 하지만 벌어진 일의 거의 전부는 처음처럼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을 두고 너도 나도 우리들 모두 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살면서 많은 후회와 원망을 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엄마도 이제는 나이를 먹었다. 아니 먹었다고 생각한다. 10년 전에 지금의 엄마 또래를 보았을 때 여자로서는 완전히 매력을 잃어버린 아줌마라고 생각했던 것을 잘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외모에 대해 그다지 노력하지 못한 삶을 살아온 엄마는 그 보다 더 나이 든 아줌마로 비춰질 것이다. 그런데 엄마는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강한 신념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지금, 그리고 앞으로 더 늙어가게 될 미래가 두렵지 않다. 이제는 봉긋한 가슴보다는 넓고 따뜻한 가슴이 더 아름답게 보이며 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삶이 될 것을 그것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삶이 될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또한 삶을 산다는 것은 성공해서 꼭 행복하게 잘 살아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서도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쩌면 보증할 수도 없는 먼 미래의 성과를 위해서 현재 너무나 많은 희생을 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는 것이 더 필요할 지도 모른다. 상실의 고통도 치유의 과정도 전부다 인생이고 삶이기 때문이다.
끝났다. 그렇게 굿바이 하면은 된다. 원망과 미움과 슬픔이 가득 찬 상황에서 말로써 더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것은 진흙탕에 내리는 빗물과도 같은 것이라 우리는 이럴 때일수록 말은 아껴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슬프다면 마음껏 울어라. 원망스럽다면 마음껏 욕해라. 미안하다면 사과해라. 단, 거세게 표출하는 것만은 삼가라. 어설픈 인생의 목표 따위도 잊어버려라. 그리고 초라한 내 모습을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죽음도, 이별도 끝내는 나 자신은 이기지는 못 할 테니까.
그렇게 레드는 죽었다. 끝내 그렇게 아이들과 엄마한테서, 우리 집에서 떠났다.
그리고 어린왕자와 장미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엄마는 지금 그 누구보다 그 어느 때보다 이별이 슬프지만 엉엉 소리내어서 울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