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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3편. 패배, 다시 한판승부

떠나지 않는 것의 의미 - 신뢰라는 또 다른 사랑의 표현일지 몰라.

by 김현이

첫 번째 패배


“서진이 엄마 예뻐!”


“그래? 단우야! 엄마는?”


“엄마도 괜찮아. 서진이 엄마는 예뻐.”


엄마는 이 다섯 살 꼬마가 내리는 외모판정 순위에서 펀치 한번 날려보지도 못하고 패하고 말았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판정패라고 해도 좋았다. 단우의 입에서 ‘엄마도 괜찮아.’라고 애매모호한, 성격 따라 생각하기 나름 식의 대답이 나왔으므로.


며칠 뒤, 엄마는 속 좁은 어린아이마냥 단우의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꼬집는다.


“단우야, 그런데 서진이 엄마와 엄마 둘 중 누가 더 예뻐?”


이번에 단우는 딱 3초 동안 생각을 한다.


“서진이 엄마. 그리고 엄마도 예뻐.”


2전 2패다. 엄마는 아이 통통한 볼에 간지럼을 태우면서 그렇게 판정내린 이유를 알아보려고 한다.


“단우야, 정말로 엄마보다 서진이 엄마가 더 예쁜 거야?”


이번에 단우는 5초 동안 생각을 한다.


“아니, 엄마도 예뻐, 단우 엄마니까 예쁘지.”


엄마는 이번에는 완전히 명확한 이유로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대답을 듣고서야 그 패배를 인정한다.


“서진이 엄마는 핀을 꽂았잖아. 엄마도 그러니까 핀을 꽂아야지.”


아! 머리핀. 엄마는 꼬마 심판의 분명한 증거로 완전히 패배를 인정하고 그 대가로 아이의 볼에 입을 맞춘다.


아침마다 비슷한 시간에 아이를 데려다 주는 두 엄마, 서진이 엄마는 큰 아이가 여섯 살이니 아마 단우 엄마 보다는 나이가 더 어릴 것이다. 엄마가 단우를 서른여섯에 낳은 걸 감안하면 거의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엄마는 더군다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입에 올리기도 꺼리는 숫자가 나이에 들어가 있다. 40이라고. 아무튼 서진이 엄마는 허리까지 기른 긴 웨이브 머리카락에 언제나 눈에 띌 만한 핀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엄마의 립스틱보다 호수가 높은 립스틱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그냥 레드도 아닌 딥레드 1호. 반면, 단우 엄마는 턱 높이를 간신히 통과하는 똑 단발이다. 염색이라고는 해본적도 없는 전형적인 갈색머리카락이며 언제나 경직된 근무복을 입어야 하므로 머리에 장식이라고는 어쩌다 잔머리를 죽여보고자 하는 검은 실 핀, 혹은 검은 색 고무줄뿐이다. 이번에는 외모의 패배에 대한 굴욕감 대신 단우의 보는 눈이 정확하다는 것에 대한 우쭐함, 자랑스러움이 움튼다. 이래서 단우의 엄마는 아줌마이고 엄마인걸까.


두 번째 패배


어른 숟가락 크기도 성에 안 차는 듯 아예 밥그릇까지 먹어버릴 기세로 저녁을 먹고 있는 큰 아이, 정우에게 또 잔소리를 하는 엄마.


“정우야, 좀 천천히 꼭 꼭 씹어 먹으라니까. 체한다고.”


대답도 없이 대신 딴소리다.


“엄마, 그런데 학교 교감선생님이 새로 오셨어. 여자분 이셔!”


“그래? 전에 계신 교감 선생님이 인자하시고 좋으셨는데. 지금 분은 어떠셔?”


“몰라, 근데 젊어, 많이 젊어.”


엄마는 더 큰 반응으로 대답을 한다. 미리 마음속에 패배를 각오하고 덤벼드는 것과 비슷하다.


“엄마보다 더 젊으셔?”


“그런 것 같은데?”


“주름살도 없고?”


“응, 하나도 없어.”


이런! 엄마는 늙었다. 이번에는 어퍼컷 한 번을 날려보지도 못했다, 엄마는 KO패 당할 것을 작정하고 마지막 한 번의 주먹질을 한다. 의미도 없이 공기만 갈라놓은 주먹질. 심판이 링 위에 대자로 뻗어있는 엄마를 굽어보면서 원 투 쓰리를 세기 시작한다.


“엄마보다 예쁘셔?”


엄마가 돌았는가 보다. 정우는 들었는지 말았는지 한 마디 말도 없이 밥만 퍼 먹는다.


“천천히 먹으라니깐!”


결투


참관수업이 있었기 때문에 엄마는 모처럼 사복차림으로 학교를 방문했다. 언제나 외투에 근무복을 감추고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순수한 엄마로서 학부모로서 학교에 가서 내 아이들과 선생님들을 만났다. 둘째 선우의 참관 수업부터 순서였다. 고 녀석. 고집도 있고 뚝심도 있고 성깔도 있는데 몸에 살이 없다. 정말로 반 아이들 중에서 가장 빼빼 말랐구나. 갑자기 ‘나는 이렇게 잘 먹는데도 왜 살이 안 찌는지 몰라.’하고 잘난 체를 하는 선우의 얼굴이 떠올라 피식 웃는다. 수업 도중 그룹별 과제를 받고 지들끼리 머리씨름을 하던 중 선우가 갑자기 문제지를 들고 선생님께 걸어간다. 선생님이 틀렸다. 문제 제작 중 약간의 실수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왜 하필 그 문제가 선우가 속한 그룹으로 들어갔는지 선생님은 오늘 약간 운이 없는 것 같이 보였다. 선생님 말대로 오늘은 예쁘게 보이려고 치마까지 입고 왔는데. 선우는 엄마들 앞에서 선생님을 한 방 먹였다.


정해진 40분이 지나고 엄마는 이제 엄마를 KO패 시킨 상대 선수를 대면할 차례가 왔다. 새로 오신 교감선생님 인사말씀 순서. 엄마들은 학생들처럼 우측통행을 하면서 4층 강당으로 이동했고 이제 엄마는 링 위로 오르는 대신 접이식 의자에 살짝 궁둥이를 내려놓고 있는데 심판이 된 교장선생님이 엄마를 바라보며 원 투 쓰리를 세고 있었다. 엄마는 갑자기 귀가 먹었는지 심판의 어떤 소리도 들리지는 않고 오로지 붕어같은 교장선생님의 입만 보인다. 나머지 엄마들이 내 맞수 등장에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고 있어서 그런 것 일 테지. 맞수는 검은색과 흰색이 교모하게 섞인 원피스를 입고 엄마의 시선을 교란시키며 링 위에 올라가고 있다. 머리는 둥근 바가지 머리, 흰 피부 – 이것은 조명 탓이리라 - , 그리고 허리를 굽히며 엄마를 굽어보는 동그란 얼굴. 새로 오신 젊은 여자 교감선생님이시다.


그날 밤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정우, 목욕탕 앞 매트 위에 물을 뚝뚝 흘리면서 수돗물을 뚝뚝 흘리며 설거지를 하고 있는 엄마를 부른다.


“엄마!, 엄마?”


“얼른 몸 닦아. 요새는 감기 걸려.”


“엄마!, 엄마?”


엄마는 개수대 수돗물을 잠그고 그릇을 엎고 남은 물기를 닦아내며 뒷정리를 하고만 있다. 1분이 더 지나갔을까?


“엄마 예뻐!”


“뭔 소리야! 수건 꺼내서 몸이나 닦으라니까.”


“엄마가 더 예쁘다고. 우리 반에 온 엄마 들 중에 엄마가 가장 예쁘더라니깐.”


학부모들의 박수소리에 힘입은 교감선생님은 다소 길게 참으로 선생님다운 말씀으로 싫은 말은 한 마디 없이 인사말을 마쳤다. 역시! 정우도 볼 줄 아는 눈이 있구나. 엄마는 이번에는 링 위에 올라가 보지도 못하고 패하고 말았다. 교감선생님은 얼핏 보기에도 엄마보다 10살은 많아 보이셨고 아마도 흰 피부는 타고난 것에 학교의 지붕이 해를 가려준 세월이 길어서 그렇게 흰 피부를 유지한 것이 보태져 한 몫을 했을 거란 짐작이 들었다. 엄마는 깨끗하게 결과에 승복하고 대강당을 버리고 학생처럼 또 다시 우축통행을 하면서 학교를 빠져 나왔다.


그 날 저녁, 정우의 예쁘다는 말에 엄마는 학생처럼 속으로 공손하게 대답했다.


“좋아하는 척을 하는 것은 제게는 참 어려운 거예요. 솔직히 저는 제가 그다지 예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도 있고요,”


적을 맞닥뜨리고 나니 이렇게 마음이 편안해 질 줄 몰랐다. 아예 처음부터 이기고 싶은 마음조차 없었다. 싸움의 상대가 안 되는걸 뭐.


여름과의 한판 승부


6월 장마가 끝나기 무섭게 폭염이 시작되었다. 엄마는 혼자라면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이들이 문제였다. 그 더위를 참아낼 수 있을지. 에어컨을 미리 가동시켜 보았다. 선풍기보다 못한 바람이 나온다. 실외기가 멈춘 것이다. 실외기 메인보드 판을 가는데 20만원이 들었다. 전기세를 미리 톡톡히 지불한 셈이다. 그 뒤로 두 달 동안 쉴 틈도 주지 않고 부려먹었기 때문에 실외기 자신 또한 목돈을 들여 병을 고쳐준 것에 미안함과 고마움보다는 ‘마땅히 그랬어야 맞다.’는 생각이 들었고 투덜투덜 윙 윙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일을 했다. 하기야 이런 날씨에 일을 시켰는데 그 정도로 말하는 것도 약과였다.


아껴서 쓴다는 것이 아이들이 깊은 잠에 빠지면 엄마는 전원버튼을 누르고 냉기가 식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현관문을 뺀 집안의 온 문을 열어 채쳤다. 그러면 문 밖에서는 언제나 무겁고 축축하고 뜨거운 공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엄마는 괜찮았다. 여전히 아이들이 문제였다.


9월이 오기 일 주일 전, 솔릭이 찾아온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덕분에 학교는 하루 더 쉰다고 쉬기 몇 시간 전에 휴교 통보를 해 왔고 엄마는 회사에 그 보다 더 짧은 몇 시간 전에 휴가 통보를 했다. 이게 전부다 솔릭 탓이니까 누구도 이런 성급한 행동에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냥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수긍하는 것 같았다. 엄마도 그랬으니까.


솔릭은 정말로 요란했다. 적어도 엄마와 아이들이 살고 있는 집에는 요란하게 찾아왔다. 평소보다 더 고요한 침묵과 불안에서 각자의 마음속에 엄청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솔릭이 우리나라를 완전히 벗어나자 아이들은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태풍은 언제 와요?


솔릭이 자취를 감춘 뒤 우리 집에는 하루 동안 어마어마한 물이 새어 들었다. 큰 아이는 태풍이 ‘큰 바람’이 아니냐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대신 큰 비를 몰고 왔는가 보지.’ 하며 휴교까지 한 어린 마음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요 녀석아! 실망할 것이 아니라 다행으로 알아야지. 두고 봐라! 솔릭이 이 끔찍한 더위를 싹 가져가고 말 테니까.’


9월이 왔다. 온 것이 아니라 지나가고 있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여름은 양심은 있어 보였다. 제때에 떠나가고 있었으니까. 사람들마다 날씨가 참 좋다면서 칭찬을 했지만 엄마는 왠지 내가 이 계절을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망설였다. 엄마는 가을을 맞이할 준비를 아직 하지 못했는데. 가을이 되면 아이들과 그 좋아하는 책도 읽고 그 좋아하는 자전거도 함께 타고 그 좋아하는 나들이도 많이 다니려고 했었는데.


선우가 유일하게 먹을 줄 안 매운 음식, 라면을 좋아하는 선우에게 ‘리을’은 아주 골치였다. 언제나 라면을 상기시켜 주면서 생각을 도와주면 라면을 기억해도 리을이라고 읽지 못했었다. 차라리 엄마가 보통의 엄마와 같이 책을 가까이 하지 않고 – 엄마 옆에는 언제는 글씨가 써진 종잇조각이라도 굴러 다녔다. - 읽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또한 생활이 주는 규칙과 엄격함으로 부지런함이 몸에 배어 있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훨씬 선우에게는 덜 부담이 됐을지도 모른다, 리을이. 한편, 선우는 엄마가 언제나 그렇게 밀어붙이기 식의 생활을 하면서도 그런 식의 삶이 엄마 자신에게 지금 당장에 그 어떤 가치라도 가져올 만한 의미가 있는 행동일까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선우는 또 생각을 했을 것이다. 엄마는 왜 저렇게 거짓말을 하실까. 리을을 기억해 내지 못했던 날 엄마는 또 다시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다. 나는 회초리를 맞지 않았었다.


그리고 엄마는 늘 숫자를 센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들에게 회초리를 덜 들겠다는 엄마만의 노력인 듯 보였다. 언제나 셋까지만 센다고 단언했음에도 늘 열까지를 셌고 또 셋까지를 세는 것을 수차례 반복하셨기 때문이다. 사실 형과 나와 동생은 이제 엄마가 원 투 쓰리를 시작해도 전혀 무서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은 언제나 엄마가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아라.’고 판결을 내림으로써 해결되었고 그보다 덜한 최악의 상황은 엎드려뻗치기로 끝나거나 그날 몇 시까지 책을 한권 읽는 벌로 마무리되었기 때문이었다.


형은 언제나 엄마의 훈계 끝에 ‘사랑해요.’라고 말했다. ‘사랑해요.’는 형이 말할 수 있는 최대의 표현이었다. 그 말속에는 미안해요, 고마워요, 잘못했어요,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요. 혹은 억울해요 등등의 온갖 생각이 집약된 함축적인 표현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알고 계실 것이다. 언제나 엄마는 엄마의 말대로 우리들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는 분이시니까.


선우 자신은 받아쓰기에서 대부분 웃긴 성적을 받았지만 그래도 읽고 쓰기가 점차 분명해지고 머지않아 품위를 갖춘 수준에 올라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나는 ‘수학은 자신 있어.’ 이 자신감이 글에 대한 자신감을 덩달아 끌어올려 줄 것이라 생각했다. 어쨌든 밝고 쾌활하고 명랑하고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수준급의 얼굴을 갖고 있었다.


“엄마. 힘들게 일하지마. 그러면 얼굴에 검은 게 피어난다고 했어. 피곤하면 쉬면서 하고 언제나 엄마를 사랑해요. 점심밥을 먹으면 또 전화할게,”


엄마에게 그런 선우가 마음의 보석이었다. 드러내서 자랑하고 싶은데 남이 만져본다고 할까봐 언제나 장롱 깊숙이 감춰 두고 한 번씩 꺼내보는 존재. 사용한 적도 없어서 언제나 처음 새것 그대로인 보석 반지 같은 그런 아이였다. 왠지 엄하게 혼이 나서 울음을 터트려도 소리는 먹어버리고 눈물만 훔쳐내는 아이였으므로. 어쩌면 저 아이가 나와 닮았는지도 몰라. 엄마는 아이가 말한 그 검은 게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아이는 손가락으로 자기 눈 밑을 가리켰다.


아! 다크 써클


아이는 엄마의 눈 밑에서 그것을 보았는가 보다. 검은 것, 분명히 눈으로 먼저 보았지만 이름은 들어보지 못한 것, 엄마의 다크 써클을 보았던 것이다. 엄마는 다시 흡족한 마음이 되었다.


‘참! 잘 생긴 녀석이 눈썰미도 좋네.’


엄마는 여름 내내 밤을 타고 가는 날보다 끌고 가는 날이 더 많았다. 그래서 거의 매일 밤과 낮이 어떤 식으로 맞바꾸는 지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새벽은 마치 종잇장처럼 찾아왔다. 산꼭대기 먼저 흰 종이 한 장이 앉으면 뒷짐을 지는 골짜기는 검은 색이었다. 그러다 키 큰 해가 땅을 굽어 내려 보면 색종이는 8절지로 그 다음 4절지로 그렇게 점점 큰 종잇장으로 변하면서 마침내 까만 곳을 찾아 전부다 덮어버리게 되면 비로소 낮이 되는 것이었다.


엄마는 항상 해보다 먼저 낮을 시작했다. 마음속으로는 언제나 ‘게을러지는 건 안 좋아.’를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잠을 자면서도 뭔가를 했다. 거의 꿈을 꾸지 않았던 날이 없었던 것이다.


비가 계속 내려 꿉꿉한 습기 냄새를 향초가 연기를 내면서 삼켜버렸다. 키 작은 향초를 엄마와 아이들은 거실 한 가운데 밝혀 놓고 전등을 모두 내렸다. 언제나 촛불 앞에서는 별것도 아닌 것도 신비롭고 위대해 보였다. 엄마는 이렇게 속임수도 잘 부릴 줄 알았다, 그 촛불 앞에서 소원을 빌라고 했다. 딱 한가지씩만 빌어야 한다고 했다. 많은 소원은 누구라도 듣기 싫어하고 쉽게 잊어버린다고 미리 겁도 주었다. 아이들은 정직하니까 마음속으로 딱 한가지씩만 소원을 빌었을 것이다. 엄마는 ‘자, 이제 촛불을 다 같이 끄자.’ 고 말씀하셨고 또 다시 숫자를 센다. 또 야? 원 투 쓰리.......


축축한 입김에 힘없는 촛불은 촛농 속으로 가라앉으며 이내 가벼운 한숨처럼 흰 연기를 희미하게 토해냈다. 그마저도 금방 사라져 버렸다. 가을도 그럴 것이다. 겨울에 금방 파묻혀 버리고 말 것이다.


며칠이 몇 주가 되었고 그 몇 주가 이제 몇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게을러지는 건 안 좋아. 어서 가서 아무 책이나 가져오너라. 읽었던 것도 좋아.’


선우는 이번에도 설마 상어의 이빨을 세라고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책장에 꽂힌 상어를 지나 파충류? - 뱀도 이빨이 많잖아. - , 포유류, 바다생물 그리고 ....... 아! 찾았다. 선우는 책장에서 잽싸게 [새]를 꺼냈다. 새는 이빨이 없잖아.


새를 가져온 선우는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두꺼운 양장본 껍데기를 열었는데 날개가 화려한 공작새가 깃털을 자랑하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설마 깃털을 세라고 하지는 않겠지?

엄마와 아이들은 잠들기 전까지 입이 마르도록 두루미를 읽었다. 키가 140Cm까지 커도 몸무게는 10Kg 정도라니.


“정우야, 두루미는 키가 정우만한데도 몸무게는 단우 보다 적게 나가네? 엄청 날씬하구나!”


뜻하지 않게도 가을은 불쑥 왔다. 여름이 완벽하게 피로한 순간, 가을의 앞길을 막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그 직전에서 솔릭에게 여름은 코를 베이고 말았다. 이제 엄마의 마음속에서 여름이 떠나가면 될 터였다. 그래야 가을도 들어올 것이다. 어쨌든 두 가지 계절이 한 공간에서 같이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여름 너! 조금 더 엄마의 마음속에 머물러도 되지만 한 가지만 약속해 줄 수 있어? 만일 엄마가 너의 예상보다 빨리 쓰러지면 그 때는 미련 없이 떠나 줄 수 있어? 뒤 돌아 보지 않는 거야. 알았어?’


아직 엄마의 마음속에 매달려있는 여름은 아주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여름의 눈 속에 고여 있던 눈물이 중심을 잃고 흘러내리면서 뚝 뚝 뚝 둔탁한 소리를 냈다. 소금물. 어쩐지 속이 쓰라리더라니.


떠난다는 것,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 떠나지 않는 것, 어디론가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신뢰라는 또 다른 사랑의 표현일지도 몰라.



2018. 9. 6. 목.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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