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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디투스 Feb 07. 2016

불평의 절차

SNS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장사나 비즈니스를 하다 보면 SNS 때문에 못해먹겠다는 불평 자주, 아주 자주 듣는다.

Yelp 같은 방문 후기나 평가를 다루는 사이트에는 칭찬도 많지만 날이 선 비평이나 불평도 적지 않다.

그 평가에는 나름의 이유와 기준이 있겠지만 평가받는 입장에서는 억울한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미국 캔자스에 사는 엄마가 13살 딸의 드레스를 사기 위해 백화점을 방문한다. 드레스를 입고

사진을 찍으며 샤핑을 즐기고 있는데 직원이  다가와서는 딸의 몸매에 대해 지적(?)하면서 교정 속옷을

입어야겠다고 하더라는 거다. 기분이 상한 모녀는 바로 백화점을 나왔고 엄마는 SNS에 글을 올린다.

당신에게 완벽하지 않다는 지적을 받을 이유가 없다며 자신의 딸이 얼마나 예쁜지를 설명하는 그런 거였다

바로 500,000개의 좋아요가 따라왔고 비슷한 사연이 댓글로 줄줄이 달리고 있다.

엄마는 Everyone's beautiful just the way they are.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다고 한다.


SNS가 지금처럼 일상이 되기 전, 어느 사업장을 방문해서 기분이 상하는 일이 생겼다면 그것을 표현하는

그 당시의 단계라는 게 있었다. 1) 해당 직원에게 따지고 2)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매니저 나오라고 하고

3) 여기서도 만족 못하면 사장 나오라고 하던가, 본사로 연락해서 경위를 알리고 따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경험 있는 사람들은 대개 2) 단계에서 상황을 마무리한다. 잘잘못을 떠나서 최대한 신속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요령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설령 3) 단계까지 확대가 되더라도 당사자들 외에 세상까지 알게 되는

장치는 드물었다. 그런 폐쇄성으로 회사가 갑질 하다가 신문이나 방송에 실려 경을 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마지막으로 소비자가 할 수 있는 어필은 소비자 보호센터나 해당 기관에 투서 정도로 대개는 거기까지였다.

이걸 굳이 절차라고 부르는 것도 우습지만 아무튼 다른 방법은 없었다.


SNS가 일반화되면서

어른들이 수저를 먼저 드셔야 밥을 먹을 수 있었던 관습은 사진부터 일단 찍고 나서 식사를 시작하는

예법으로 바뀐다. 그렇게 찍힌 사진은 인증이 되고 그 밑에는 자랑이 붙던가 평가가 달리는데  

그런 단품 평가가 어느 유명 사이트로 모이게 되면 그때부터 권력이 된다.

이제 굳이 단계를 밞아 내 기분이나 감정을 설명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사라진다.

그저 SNS에 글을 올리면 간단하다. 얼굴 붉힐 것도 없고 소리 지를 것도 없고 교양 있게 나에게 감동스럽지

못한 업소나 비즈니스를 단죄할 수 있게 됐다.


위에 등장한 엄마도 단죄하듯이 글을 올렸고 그녀는 세력을 얻었다. 사람 수가 늘어나면 명분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있는 모습 그대로 아름답다"는 노래 제목 같은 메시지도 첨가한다.


여기까지 읽은 분들은 글을 쓰는 사람이 저 등장 엄마에게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사실이다. 솔직히 불편하다. 화제가 되자 방송까지 나서서 백화점 책임자와 인터뷰까지 했고 해당 직원을

찾아 나선다. 방송국이 정의감에 불타서 진실을 밝히겠다고 나섰을까?

그런 경우의 진실은 늘 상대적이다.


내가 아는 미국의 영업직 교육에는 Manual이라고 불리는 지침이 있다. 번거로운 교육과정을 반복하며

그 매뉴얼을 일상화시킨다. 그렇다고 실수가 없는 건 아니지만 고객의 감정을 상하게 할 만큼 무식한 짓은

하지 않는다. 로데오 거리에 깔린 명품 매장의 은근 불편스러운 분위기와 우아하지만 위압적인 태도도

다 나름의 영업방침이지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지 삶이 명품인 줄 착각하고 그러는 게 아니다.


이 엄마가 갑자기 정신이 나간 게 아니라면 그 영업직원의 무언가가 기분을 상하게 했을 것이다.

그랬으면 책임자를 호출해서 일단 어필을 하는 게 순서였지 않을까? 거기서 마무리됐다면 본인도 나머지

샤핑을 즐길 수 있었을 테고 해당 직원에게도 소명의 기회가 주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엄마는 바로 SNS에 풀어버린다. 이럴 때 거의 100% 자기 입장에서 풀었을 것이고

해당 직원은 자신의 입장을 소명할 여지도 없이 그냥 싸가지가 된다.


가장 최악의 경우를 들자면,

해당 매장에서 항의하고 어필하고 결국 사과 듣고 서비스까지 받고 돌아와서

다시 SNS에 상황을 올려주는 센스일 것이다

그러려면 이렇게까지 하는 명분이 필요할 텐데 그건 간단하다. 사과에 진정성이 없다고 하면 된다.

이런 글에 좋아요를 눌러주는 분들이 지금도 계실까?


세상은 결국  자기중심적으로 돌아간다

황희 정승이 제사를 지내야 하는지를 물어보는 하인 두 명에게 각기 다른 대답을 한다. 

곁에서 지켜보던 사람이 지도 헷갈리니까 왜 그리 하셨는지를 물어본다

"그들은 자기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듣고자 왔을 뿐이니 원하는 답을 줬을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듣고자 하는 말만 기억하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다시 기억한다.

그걸 경계하지 못하면 우리네 처지는 정승네 하인 수준밖에 안된다


단언컨대, 어른이 된다는 건 전후 사정을 헤아리는 포용이다.

아무리 기막힌 상황이라도 사정을 먼저 살피는 것이 어른이다

신문에 어떤 글이 헤드라인으로 뜨더라도 그 배경을 이해하는 능력,

SNS에 무슨 비방글이 올라와도 상대방 입장을 들어보기 전에는

판단을 유보해줄 수 있는 배려

세상이 뭐라고 해도 앞과 뒤를 알기 전에는 예단하지 않는 신중함.


SNS에 올라온, 평가하고 단죄하는 소위 후기라고 불리는 글은 읽으면서 뭔가 심란하다

그 주인이 그렇게 미친 사람이었을까?

이걸 올린 사람은 끝까지 정당했을까?


달린 댓글을 보면서는 더 산란하다

올린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대답을 얻었겠지만

주인은 당장이라도 이민 가야 할 판이다.


과연 난 제대로 판단하고 있는 건지

예전에는 신문이 그렇게 사람을 헷갈리게 하더니

이제는 SNS가 자꾸 시험에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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