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성 사랑하기

혜이드가 씁니다

by 혜파리

사랑이 뭘까?


인생 최초의 애착 관계인 엄마와의 관계에서 나는 항상 설명을 하는 입장이었다. 어릴 때부터 엄마는 나를 완벽히 안전하게 키우고 싶어 했고 이는 곧 내 모든 상황에 대한 통제를 의미했다. 엄한 규칙들이 세워졌고 나는 단지 엄마가 무서웠기 때문에 굳이 따지지 않고 따랐다. 규칙은 칭찬 보단 처벌을 위해 존재한다. '잘했어'는 대부분 무음이었고, '안돼'는 불필요하게 크게 들렸다. 엄마는 '안돼'에 딱히 이유를 붙여주지 않았다.


0. 바짝 엎드려 눈치를 살폈다.


곧 호르몬이 소용돌이치는 사춘기 청소년이 되었고 더 많은 친구들을 사귀면서 머리엔 자꾸 이전엔 없던 물음표가 떠올랐다. 왜? 왜 그래야 하는데? 왜 그 규칙들을 따라야 하는데? 진짜 망해? 진짜 큰일 나? 진짜 죽어? 다른 애들은 다 하는데 나는 왜 안돼? 왜? 왜? 왜? 나도 모르고 엄마도 답을 줄 수 없는 질문들이었다. 그때부턴 바짝 엎드려 눈치를 살피며 스스로를 의심하면서도 규칙의 울타리를 몰래 빠져나갈 궁리를 했다.


1. 처음엔 엄마가 정해둔 길에서 벗어난 걸 들키면 타고난 임기응변 능력으로 온갖 근거와 변명을 엮어 나름 타당한 주장을 하며 엄마를 이해시키려 했다.


엄마는 '그냥 안돼'였지만 나의 '그냥'은 순순히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알았다. 똑똑하게 말해야 할 것이다. 엄마가 학생이던 때랑 지금이랑은 달라, 다른 애들도 다 이렇게 해, 내가 심하게 하는 거 아니잖아, 누구네 엄마는 안 그래, 선생님이 괜찮다고 했어, 이래서 이랬어.


그러나 그 당시 엄마는 마치 거짓말을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에 따라 손을 자르거나 자르지 않거나 둘 중 하나만 하는 단단한 진실의 입처럼 규칙을 어겼는가 어기지 않았는가에 따라 혼을 내거나 내지 않거나 하는 일에만 집중했다. 내가 대는 이유가 아무리 정교하게 그럴듯해도 엄마에게는 그냥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2. 설득이 통하지 않는다면 맞불 작전으로 간다. 짜잔 혜이드 등장!


엄마를 닮아 빠꾸 없는 불 같은 성격으로 떼를 쓰고 악을 쓰고 싸우며 집안 공기에 불을 지르는 날들이 많았다. 왜? 결국 우리는 남이잖아, 엄마가 무슨 상관인데, 나는 엄마랑 다른 인간이야, 다른 생각을 품고 사는 다른 개체야. 나를 내버려 둬야 하는 이유는 꼭 덧붙였다. 여전히 귀가 없는 벽처럼 느껴지는 엄마한테 지치지도 않고 대들었다.


사춘기가 지나 혜킬 페르소나를 정립한 나는 서로 물고 뜯고 할퀴면서 상처만 남기는 맞불 작전이 현명하지 않은 방법임을 깨달은 뒤로는


3. 체념과 회피로 대응했다.


어차피 내 생각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텐데 어쩔 수 없지 뭐, 그럴 수 있지, 그냥 무시하고 나 하고 싶은 대로 해야겠다, 세상은 어차피 혼자야, 아무도 나를 이해하거나 수용해 줄 수 없을 거야. 이쯤 되니 속으로도 내 행동에 이유를 붙였다. 그냥이란 없다.


4. 더 이상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상담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에게 타인과의 마찰 상황에서 비롯된 감정들을 능력치 이상으로 논리적이고 성숙한 방식으로 처리하려 하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논리적인 지성인 혜킬이 그렇게 하도록 정했다. 이해하려고 부단히 노력해 기어이 해내고 말거나, 어쩔 수 없다는 이유를 대며 억지로 내면화하거나. 방어 기제로 자리 잡은 버릇이다.


갈등에 대처하는 혜킬의 행동 강령은 아래와 같다.


0. 먼저 바짝 엎드려 스스로 의심한다.

1. 이해가 될 때까지 '왜?'를 묻고 내 입장도 끝까지 이해시키려 한다.

2. 맞불 작전(역지사지 공격으로 응용되었다)으로 떼를 쓰고 충격을 준다.

3. 이해되지 않지만 '아 X발 어쩔 수 없지 뭐, 그럴 수 있지'하며 넘어간다.

4. 더 이상 요구하거나 문제 삼지 않는다.


자동으로 발동되는 0번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1번 단계에서 성공한다면 서로에게 윈윈이다. 하지만 인간은 각자 세월 속에서 자신의 세계를 넓혀가므로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영역뿐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영역도 넓어진다. 1번이 꽤 많은 경우 실패한다는 뜻이다. 보통 혜이드가 담당했던 2번은 사용하는 순간 그 사람이 가족이 아닌 이상 다신 볼 수 없어질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3번까지 가면 상황이 꽤 슬프게 느껴진다. 진정한 이해가 아니라 어차피 안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두터운 체념이므로. 거짓 긍정의 탈을 쓴 채 거울 앞에서 끝없는 자기 세뇌를 이어간다. 어쩔 수 없지 뭐. 그럴 수 있지. 어쩔 수 없지 뭐.


어차피 해결될 수 없는 일이라면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적절한 타개법일 수도 있다. 지성인의 사랑은 그런 법이다. 하지만 억지스러운 수용과 자기 세뇌의 단계에서 파생되는 감정들을 돌봐 끝내 후회하고 뒤돌아보게 하는 앙금이 남지 않게 것이 그 사람과의 관계를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도, 정신건강에도 도움이 될 터인데 1번은 때때로 무용하고 2번은 자주 힘겨웠다. 나는 0번과 3번의 '아 X발' 사이를 혜이드와 함께 과감히 지워 버린다. 혜이드는 칼을 갈며 무의식으로 숨어든다. 그토록 좇던 사고 논리 흐름은 증명식을 잃은 무조건적인 공식으로 남았다.


0. 나를 의심하고

3. 상대방을 그대로 둔다.

4. 나를 이해해 달라고 말하지 않고 요구하지 않는다.


끝내 뭔지도 모르는 사랑이 넘치다 못다 지배하는 지경까지 이른 혜킬 자아는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거듭하며 결국 우리는 그 누구도 서로 이해할 수 없고 온전히 혼자라는 우주론적 관점까지 시야를 끌어올려 터무니없는 상황까지 이해해 버리고 만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나와 상대를 보호하는 합리적인 방법이라 믿는다. 지성인의 사랑이란 '무지성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다.


관계가 깊어지면서 일어나는 타인과의 갈등은 분노나 짜증, 슬픔 등 찐득하고 강렬한 감정들에서 말미암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전에 피어나는 미묘하고 미약한 감정들인 실망, 서운함, 수치심 등이 도화선인 경우가 많다. 혜이드는 다른 사람들보다 이런 후자의 감정들에 예민한 편인 것 같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관념에 심취한 혜킬은 논리를 좇다 논리를 잃어버린 '무지성 이해 전략'에 전력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후자의 섬세한 감정들을 인지하지 못하고 살았다.


덕분에 정체가 뭔지 모르겠는 기분 나쁨을 감지하곤 공격적으로 튀어나오는 혜이드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칼을 휘둘렀고, 그 후엔 책임을 회피하며 해탈한 척하는 지킬이 마치 게임 '철권 태그' 마냥 번갈아 나와 그 칼 끝을 다시 나에게로 돌렸다. 남을 나를 겨누기를 수 없이 반복하며 거의 모두와 마음에서 이별했다. 이 세상엔 나 혼자야. 나조차도 나를 이해할 수 없는데 아무도 나를 이해할 수 없어. 지독한 회피형으로의 변모.


그럼에도 여전히 사랑을 잘하고 싶었기 때문에 상대방을 억지로라도 수용하고 싶어 했지만 혜킬과 혜이드가 하는 꼴을 보니 그는 그렇게 해주기 어려울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이 들곤 했다. 겁이 나 요구하지 않았고 침범하지 않았다. 기회조차 주지 않고 혼자 멀어지는 과정을 지속했다.


나를 보호하고 남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빈껍질의 합리성을 방패 삼아 각자가 각자의 안전지대에 머무르며 서로 침범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방향으로 지성인의 사랑을 지키려 했다. 상대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그의 영역을 침범한다는 것은 곧 그의 일부를 책임지겠다는 결심일지도 모른다고 입이 닳도록 얘기해 왔으면서 막상 나는 책임지고 싶지 않아서 침범하지 않았다. 사랑은 그런 게 아니었다. 지성인의 사랑법인과 '무지성 이해'는 실패로 끝난다.


때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지 않은 채로 두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상대방도 그렇게 해줄 것이다. 기회를 주어야 한다. 침범하는 연습을 해야겠다. 침범을 허락해야 한다. 말을 해야겠다. 들어야 한다. 요구를 해야겠다. 사랑에 지성을 끼워 넣는 일은 곧 무한한 모순의 굴레에 나를 밀어 넣는 일이다. 무지성 사랑을 해야겠다.


제가 개 같이 굴어도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예뻐해 주세요. 안아주세요. 잘하고 있다고 안심시켜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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