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별에 대한 애도

혜이드가 씁니다

by 혜파리

그날은,


앞과 뒤는 흐릿하나 그 잠깐만큼은 강렬하게 각인된 기억들이 있다. 도무지 잠잠해질 줄을 모르는 코로나의 대유행으로 저녁 8시 이후에는 집이 아닌 실내에 머무를 수 없었다. 각자 부모님이랑 살던 우리는 해가 지고 나면 사적인 공간이 위태롭게 지탱해 준 미약한 온기조차 잃어버렸다. 카페에서 쫓겨나듯 나와 정처 없이 걸었다. 죽일 듯한 추위는 아니었지만 그 누구의 탓도 하지 못한 채 하염없이 예민하고 건조하기만 한 우리가 밖에서 시간을 보내긴 어려운 날이었다.


지나고 보니 사소한 이야기였다. D는 그가 일시적으로 속한 세계에 불만을 표하면서도 은근슬쩍 옹호했다. 발가락의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고 옷 안 피부는 별 다른 이유 없이 따끔거렸다. 짜증이 솟구쳤다. 그의 실없는 투덜거림을 받아주지 못해 곧 치열한 싸움으로 번졌고 나는 그의 모순을 논리로 누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사실 나도 별 다른 논리가 없었지만, 더 이상 맞지도 않을 그의 신발을 신어보는 노력을 하고 싶지 않아 진 탓이었다.


가느다란 실을 양쪽에서 팽팽하게 잡고 걷고 있는 모양으로 언쟁을 이어갔다. 그도 나도 계속 멈춰 있거나 계속 걷지 않았다. 누군가가 멈추면 따라 멈췄고, 누군가가 다시 걷기 시작하면 따라 걸었다. 아스팔트의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덮쳐 입김조차 냉랭하게 느껴졌다. 그는 내가 그 실을 끌고 가고 있다고 느끼는 듯했다. 그는 자신이 그 실에 애처롭게 매달려 끌려 오고 있음을 알리지 않았고, 나도 아는 척하지 않았다.


바람이 불지 않는 벽 앞에 서서야 서로 마주 볼 수 있었다. 잠깐의 정적. 시린 공기의 흐름이 좀 잠잠해진 탓인지, 아니면 힘 없이 처진 D의 눈을 들여다본 탓인지 마음이 좀 누그러졌다. 다시 생각해 보니 이 하잘 것 없는 찰나의 다툼은 함께 쌓아온 시간에게 무례한 짓이었다. 한숨에 가까운 심호흡을 하고 그에게 저녁 식사를 제안했다. 다른 방향으로 함께 걷기 시작했다.


나는 파충류가 아니라 포유류였다. 의미 없는 싸움이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나면 체온이 미지근해질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걷다 보니 단전에서부터 뜨겁게 열이 올라왔다. 독단적으로 그 싸움에 매듭을 짓기로 결심을 했으면 그만 다른 주제로 넘어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자꾸 곱씹었다. 몇 걸음 옮기지 못해 더 큰 소리로 D에게 싸움을 걸었다. 그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뭐라고 말했다.


우리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아무도 원하지 않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문제를 더 크게 만들었다. 그 상황이 아니었다면 문제조차 되지 않을 문제였다. 진짜 별 거 아닌 문제였다. 그는 그 문제를 끄집어내며 그 문제의 원인을 물었다. 우리에게 물은 것이 아니었다. 나에게 물었다. 이명이 들렸다.


단전에서 올라온 열기가 목구멍을 막았다. 곧이어 눈 언저리가 뜨거워졌다. 그 순간 세상이 하나 닫혔음을 깨달았다. 사망 선고나 다름없었다. 그가 화해의 촛불이라고 여긴 그 불씨는 안타까운 타이밍에 안타까운 위치에 붙었다. 그는 그가 붙잡고 있는 얇디얇은 실에 보이지 않는 불이 붙었음을 모르는 눈치였다. 그 실은 넋 놓고 있던 내 손가락을 타고 온몸을 휘감았다.


그를 길에 세워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럼 이건 대체 누굴 위한 거야? 대체 뭘 위해 이러고 있는 거야? 목적도 없고 목표도 없는 이 비합리적인 일을 왜 하고 있는 거야? 뇌가 딱딱하게 얼어붙는 것이 느껴졌다. 감정이 식는데 3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난 포유류가 아니라 파충류였나?


시간은 무 자르듯 자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순간에 붙었던 불은 D와 함께 했던, 그리고 어쩌면 함께 할 수도 있는 짧지 않은 앞뒤 시간들에 번져 활활 탔다. 꿈같았다. 다시는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과거의 나들과 미래의 나들이 그날의 나와 함께 영원히 혼자가 되었다.

플라스틱 함량이 높아 딱딱한 지우개는 힘줘서 그린 그림의 눌린 자국까지 깨끗하게 지우지 못한다. 지우지도 남기지도 못한 채로 덧칠에 덧칠을 거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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