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피 Aug 24. 2023

Green light

셀레고 난리야

출처 pixabay


나는 성악을 전공했다.

하지만 대학 진학당시 내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노래를 좀 더 잘할까’가 아닌,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돌아다닐까.’였다. 심하긴 심했던 것이 하도 레슨을 받으러 오질 않으니, 담당 교수님이 찾으실 정도였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는데 여행을 위한 돈이 필요했다. 부모님이 여행의 ‘ㅇ’ 자만 꺼내도 악을 쓰시는 통에 두 분께 기대하긴 어렵고, 스스로 충당해 보기로 했다. 지금은 수능영어의 비중이 많이 줄었지만 그때는 영어 과외 시장이 좋았다. 다행히, 내 영어성적은 봐 줄만 했다. 어렸을 때부터 영어와 나는 운명이었다고 할까. 다른 과목성적은 바닥이었을지 몰라도 영어 성적만큼은 원탑이었다. 영어 듣기 평가가 끝나면 전교 일등이 나에게 답을 맞추러 왔으니 내가 과외를 안 하면 누가 하겠나.

감사하게도 이곳저곳 소개로 제자가 어느새 10명이 되었다. 학교수업에 빠듯한 과외일정을 소화해 내기가 결코 쉽지 않았지만 여행을 향한 의지로 끼니는 물론 주말도 없이 열정을 다했다.   

   



그런데 인도에서 영어로 먹고살게 될 줄이야.    

 

“송, 너 거기서 일 좀 해볼래? 철강회사이긴 한데, 네가 할 일은 통역.”

‘수능영어에 특화된 내가 통역 일을 할 수 있을까?’


일자리 주선자인 친한 언니의 말을 요약하면 이러하다. 인도의 철강 산업이 세계최고라는데 그 철강을 만드는 기계를 우리나라에서 수입한단다. 매우 자랑스럽다. 기계 현지 교육을 위해 한국 회사에서 몇 사람이 올 텐데, 내가 할 일은 그들과 인도인 사이에서 통역을 하는 일이다. 자신이 없기도 했지만 비키와 난다의 응원에 해 보기로 했다.      


다음날 회사에서 나를 데리러 왔다. 차를 탄지 40분 정도 되었을까. 간단한 소개를 마친 후 바로 업무에 투입되었다. 기계에 대한 설명을 해주시는데 큰일이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고, 분명 잘 들었는데 남은 게 없다. 기계에 쓰여 있는 단어들이라도 찾아 익힐 겸 영영사전을 펴고 애써 이해를 해 본다.

      

“Mr. Hoon!"

    

여기, 저기서 미스터 훈을 찾는 소리가 끊임이 없다. 잠깐 앉을 시간도 없이 바삐 움직이는데 신기하게 늘 웃는 상에, 못하는 영어임에도 주눅 듦이 없이 소통에 자유롭다. 동료들과 여유 있게 농담도 하며 일을 즐기는 모습이 프로다워 보였다.


그런 그가 궁금하다.
 

소통이 막히는 시점을 엿보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다가가 보았다. 그의 앞에서 멋지게 통역을 하고 싶었으나 전문 기계 용어가 나오니, 오히려 미스터 훈이 더 잘 알아듣는다.

‘통역이 필요가 없겠는데, 오늘만 하고 내일부터 그만둬야 하나.’


우리는 일정이 끝나고 중국음식점으로 향했다. 중국음식점이 인도에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고 오랜만의 포식에 신이 났다. 그 자리는 회사 뿌네지점 대표님과의 첫 미팅 자리였는데, 우리를 크게 환대해 주셨다. 나는 미스터 훈 옆에서 통역 일을 크게 무리 없이 잘 마쳤다. 오늘 하루 중 가장 기다리던 시간, 도움이 되어 참으로 다행이다.


우리는 약간의 업무적인 이야기를 끝으로 본격 식사를 시작했다.

내가 사랑하는 짜장면과 짬뽕은 없었지만 전반적으로 모든 음식이 맛있었다. 남은 누들을 입에 다 털어놓고 깐풍기를 먹으려 손을 뻗는데 미스터 훈이 큼지막한 조각을 집어서 내 접시에 놓아준다.


(두근두근) “감사합니다.”

“바빠서 제대로 인사도 못했네, 이름이 뭐야?”

태연한 척했지만 얼마나 떨렸는지 모른다. 그는 나에게 궁금한 게 많았다. ‘왜 인도에 온 것이냐’부터 시작해서 사는 지역, 전공 등 질문세례를 퍼부어 대는데 면접 보는 줄 알았다.

“Super woman이네, 대단하다. 너는 나한테 궁금한 거 없어?”

정말 많았지만 순간 머리가 하얘져서는,

“천천히 물어볼게요.”라고 답해 버리고 말았다.


식사가 끝나니 감사하게도 아침에 픽업해 주신 기사님이 기다리고 계신다. 동료들과 굿바이 인사를 하고 차에 올라타는데 미스터 훈도 같이 탑승을 한다. 사는 곳도 알 겸 위험하니 본인이 같이 갔다가 귀가하겠다고 했다. 사람 설레게 왜 이러시는지. 너무 배가 불러서 차에서는 바지 버클 느슨하게 풀고 편하게 가려고 했는데 망했다.

그런데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

그는 출발한 지 10분 만에 코를 드릉드릉 골고 자고 있다. 기사님과 나는 눈을 마주치고 크게, 그렇지만 조용하게 웃는다. 


나는 얼른 편하게 바지 버클을 고쳐 꿰었다.

'하, 이제야 숨이 좀 쉬어지네.'


괜히 설렜다.


작가의 이전글 진호와 당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