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피 Aug 19. 2023

진호와 당근

아날로그 인디아

우리는 ‘오쇼 아쉬람’에서 만났다. 진호는 멀리서 봐도 한국인처럼 생겼다. 오랜만에 한국말을 할 수 있다니 반가웠고 먼저 말을 걸어줘서 고마웠다. 나와 달리 명상에 꽤 진심이었다.


고독을 즐기는 여행자이지만 사람을 피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김치가 그리워질 무렵 진호를 만났고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나는 여러 사람과 있을 때 더 편안함을 느끼는 편이다. 아주 친한 사람이 아니면 단 둘 이선 아무래도 불편하다. 개그우먼도 아닌데 상대를 재미있게 해줘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있어도 하루종일 말을 해대는 진호와는 그런 불편함을 느낄 찰나가 없었다. 내가 연결고리가 되어 난다와 함께 셋이 자주 밥을 먹고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고, 결국 게스트하우스 까지 내 옆으로 옮기게 되었다. 어떨 때는 하루종일 많은 시간을 함께 했지만 둘 다 사랑의 감정은 아니었고 위험천만한 곳에서 느끼는 동지애, 전우애 비슷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여자와 남자는 절대로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고정관념이 우리 둘의 관계로 조금은 깨어졌다.





그의 이사를 돕기로 하고 짐을 옮기는데 녹즙기가 있다. 한국에서 가지고 왔단다. 밥솥도 아니고 녹즙기를 가져온 사람은 처음 봤다.


“송, 너도 딱 2주만 녹즙 먹어봐. 내가 장담하는데 시력부터 좋아진다. 우리 이것만 정리하고 당근 사러 가자!”

조촐한 이사가 끝나고 사례로 생 당근 주스를 만들어 주겠다며 시장으로 끌려갔다.



“또 사?”

“그럼, 이게 즙으로 내면 얼마 안 돼.”    

당근이 족히 30개는 되는 것 같다. 낑낑대고 집에 돌아와 당근을 녹즙기에 돌리는데 생 막일이 따로 없다.

'이 자식, 이러려고 시장에 오자고 했어.'

깨끗이 씻은 당근을 껍질칼로 벗기고 녹즙기에 잘 들어가도록 조각을 냈다. 단순 작업이었는데 나름 재미있고 도마에 칼이 부딪히는 소리가 듣기 좋다.



당근 하나에 즙은 한 모금이다. 열댓 개 정도 돌리니 한 컵이 나왔다. 진한 주황색의 과즙이 먹음직해 보인다. 생소한 음식에 경계심을 가지고 조심스레 입을 대 보는데 당근을 다시 보게 되는 맛이다. 단숨에 한 대접을 비웠다. 그 뒤로 우린 본격적으로 하루에 당근을 매일 한 포대씩은 짜냈고 여러 가지 잔병들을 무찔렀으며 무엇보다도 활발한 장운동을 경험했다.

 

몇 년 후 한국에 돌아와 제일 먼저 한 일이 녹즙기부터 구매였다면 말 다했지.


당근주스 드세요 여러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