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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atitudo Jul 01. 2021

인도 변태와 인도네시아 여가수

인도네시아 발리 上 / 직장인의 드문드문 세계 여행


<첫날부터 변태라니>


여행을 다니면서 항상 착하고 좋은 사람들만 만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상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을 더 많이 만나왔고 아직 세상은 아름답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웬만하면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려 노력하는데, 이런 나의 믿음이 발리에 도착한 첫날 깨질뻔했다.  

내가 발리에 갈 당시에는 호찌민에서 발리로 가는 직항이 없었다. 싱가포르에서 환승을 하니 발리에 이른 아침에 도착했다. 피곤해서 아침부터 돌아다니기도 그렇고, 호스텔 수영장 옆에서 쉬기로 했다.


수영장 옆에서 쉬고 있는데 인도 남자와 독일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인도 남자 R은 호주에서 워킹 홀리데이를 마친 후 인도로 돌아가기 전 발리에 들려 여행 중이고, 발리 다음에 베트남도 여행할 예정이라고 했다.  독일 남자 D는 베스트 프렌드가 발리에서 결혼식을 해서 이곳에 왔다고 했다.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진 우리들은 몇 마디를 나눈 후 어느새 낮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았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호텔이 아닌 호스텔에서 묵는 이유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싶기 때문이었다. 체크인도 하기 전에 벌써 동년배의 친구들을 만나게 돼서 역시 호스텔로 오기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서로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고, 나보다 먼저 발리에 도착한 그들에게 여행지 추천을 받기도 했다. 체크인 시간이 아직 안되었는데 어느새 옆에 쌓인 빈 맥주병은 10병이 넘어가고 있었다. Bin Tang 맥주 도수가 높지 않기도 하고, 내가 술을 못 마시는 편도 아니어서 난 호스텔 도착했을 때와 비슷한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R과 D는 점점 취하는 게 보였다. 외국인 남자 2명을 술로 이겼다는 생각에 뿌듯하기도 하고, 얘네는 소주 마시면 어떻게 될까 궁금하기도 했다. 


계속 앉아있다가는 해가질 때까지 술만 마실 것 같아서 수영을 하기로 했다. 수영장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R이 이상해졌다. 처음에는 그냥 움직이다가 손을 스치는 줄 알았는데, 가만히 앉아있는데도 물속에서 내 손을 잡으려고 했다. 뭐 이런 찌질이가 다 있나 하는 생각에 내 손을 확 치워버리고 쳐다보니 변태같이 웃고 있는 게 아닌가. 술에 취한 건지 원래 변태인 건지 모르겠지만 이제 이놈이랑은 상종하면 안 되겠다 싶었다. R을 투명인간처럼 대하고 방으로 들어왔는데 페이스북 메시지가 와 있었다. 아.. 호찌민 온다고 해서 페이스북 교환했었지. 

내가 귀여운 것까진 이해하겠는데 왜 이 자식이랑 껴안고 같이 자야 하지? 그냥 읽고 답을 안 하면 혼자 또 착각할 수 있을 것 같아서 No라고 답장했다. 그리고 무안을 주기 위해, 이런 질문은 왜 하며 하나도 재미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은 "Then, only cuddle?" 내가 이 변태 자식보다 술을 잘 마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다시는 나한테 말 걸지 말라고 답장했다. 


쎈 척은 했지만 무서워서 저녁 시간에 계속 호스텔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붙어 있었다. 생각보다 더 많이 찌질했던 이 자식은 내가 사람들이랑 있으니 더는 다가오지 못했다. 그래도 불안했던 나는 리셉션 직원에게 이 상황을 설명했고, 직원은 같이 욕을 해주며 다행히 다음날 R이 체크아웃하는 날이니 그때까지 예의주시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어린 시절 배운 태권도와 특공 무술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한 번만 더 손대면 급소를 공격해야겠다며 계속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여자들이 혼자 여행하면 위험한 게 아니라, 이런 더러운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밖에 돌아다니니까 위험한 거다. 이런 놈들이 없으면 위험할 일도 없고, 또 일방이 아닌 쌍방으로 서로 마음이 잘 맞으면 저런 찌질한 문자 따위는 보낼 필요가 없다. 첫날에 이런 액땜도 하고, 남은 여행 일정 정말 재밌으려나 보다고 생각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눈 정화, 마음 정화

<제가 인도네시아 여가수를 닮았다구요?>


나는 범아시아적인 얼굴을 지녔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동남아 국가 어디를 가든 그 나라 현지인 같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태국에 갔을 때는 태국 사람이 나에게 길을 물어보기도 하고, 바다에서 친구랑 수영하고 있는데 태국 남자와 한국 남자가 와서 갑자기 우리의 국적을 물어본 적도 있다. 한국 사람이라고 하니, 한 명은 우리가 태국 사람이라고 하고 나머지 한 명은 우리가 한국 사람이라며 서로 내기를 했단다. 할 일도 참 없지. 베트남에서는 어디를 가든 한국인, 외국인, 베트남인 모두 나를 베트남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한국 사람이라고 말해도 내가 베트남 사람처럼 생겼다는 말을 꼭 덧붙여준다. 인도네시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느 저녁 호스텔 근처 해변을 걷다 모래사장 위에서 식사할 수 있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해 질 녘부터 바다를 바라보며 술을 마시다가 저녁까지 시켜 먹었다. 서빙하는 웨이터가 더 필요한 건 없는지 틈틈이 신경 써주고 서비스가 좋아 이 집 참 친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갑자기 식당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이 와서 식사는 괜찮은지 물어왔다. 이 식당은 정말 서비스가 좋은 곳이구나. 괜찮다고 말을 하니 내 국적을 묻는다. 한국 사람이라고 대답하니, 인도네시아 유명 여가수와 내가 너무 닮았다며 같이 사진을 찍어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 그 나라 사람같이 생겼다는 말은 수도 없이 들어봤지만, 유명인을 닮았다고 하니 나는 베트남이 아닌 인도네시아에서 취업을 했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식당 매니저는 내가 그 가수와 너무 닮아서 사진을 찍은 뒤 인화해서 식당 벽에 붙여 놓을 거라고 했다. 내 식당도 아닌데 내 사진이 그것도 한국이 아닌 인도네시아 식당 벽에 걸리다니. 황당하지만 재밌어서 흔쾌히 사진을 찍어줬다. 사진도 찍어줬는데 음식 할인이나 서비스를 안 줘서 서운해하면 너무 진상일까? 다음에 다시 와서 내 사진이 붙어있나 확인해 봐야겠다. 이렇게 발리에 다시 와야 할 이유가 생겨버렸다.  


사진: hyer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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