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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atitudo Jul 02. 2021

언니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인도네시아 발리中 / 직장인의 드문드문 세계 여행


<Kristina Darby>


특별한 일정이 없던 발리에서의 어느 날, 숙소 주변을 탐색해 보고 싶어 간단히 짐을 챙긴 후 숙소 밖을 나섰다. 목적지를 정해놓지 않고 정처 없이 걷다 보니 날도 많이 덥고 갈증이 났지만 어디서 멈춰 서야 할지 몰라 계속 걷고 또 걸었다. 어느새 해변가까지 나와 있었고 주변에는 음료를 파는 노점상이 많았는데 해변가에서 파는 음료수 = 비싼 거라는 편견 때문에 쉽사리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많이 지쳐 보였는지 한 노점상 주인이 잠시 앉아서 쉬다 가라는 권유에 무의식적으로 건네주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몇 초 뒤 혹시 잠깐 앉아있는다고 돈 내라고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주인에게 물어봤다. 많이 힘들면 돈 좀 내고 쉬면 되는데 돈 몇 푼에 내 몸을 왜 이리 혹사시켰는지 지금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다행히 주인은 아니라고 쉬고 싶은 만큼 쉬다 가라고 해줘서 고마운 마음에 맥주 한 병을 주문해서 바닷가를 바라보며 맥주를 마셨다.

혼자 앉아 있으니 주인이 심심하지 않게 계속 말을 걸어줬다.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발리에서 어디 어디 구경했는지, 발리가 좋은지 등등. 소소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내가 앉은 곳과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외국인 여자애가 말을 또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 친구는 이미 몇 명의 현지 사람들과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나도 원하면 같이 껴서 놀자고 했다. 어차피 별다른 계획이 없던 나는 자리를 옮겨 그들과 합석했다.


나에게 말을 걸어준 여자의 이름은 크리스티나. 내 세례명도 크리스티나여서 괜히 반가웠다. 짧은 레게 머리를 하고 캐러멜색 피부에 콧등에는 주근깨가 있어 얼굴에 장난기가 넘친다. 실제로 장난기가 많기도 하고 이제 막 만난 사람들과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편안하게 대화를 하는 능력이 있다. 나한테도 친근하게 대해줘서 덕분에 처음 보는 사람들과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언니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크리스(티나)는 알면 알수록 전적이 특이한 양파 같은 사람이었다. 우선 크리스는 미군 출신이다. 나는 한국이던 미국이던 군인들이 너무 멋있다. 제복 입은 것도 멋있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훈련하는 것도 너무 멋지고 나는 배워본 적 없는 군사 용어들도 너무 멋있다. 본인이 나온 군대가 제일 힘들었다고 허세 부리는 것만 아니면, 실제로 군대에서 있었던 일들을 듣는 것도 좋아한다. 그런데 심지어 여자 군인이라니! 한국에서도 실제로 여군을 만나본 적이 없어서 더 인상적이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센 여자들을 좋아했다. 핑클은 이효리, 베이비 복스는 심은진 등 센 캐릭터 여자들을 유독 좋아라 했고, 언프리티 랩스타를 처음 봤을 때 제시에게 반해 꾸준히 챙겨보기도 했다. 이런 내 앞에 진짜로 센케가 나타난 것이다. 크리스의 나이는 모르지만 마음속으로 크리스를 언니 삼기로 스스로 다짐했다.


크리스는 작가이기도 하다. 나를 만났을 때는 총 2권의 책만 있었는데 지금은 총 5권의 책을 썼다. 나는 책을 좋아해서 책을 쓴 작가들은 모두 동경의 대상이다. 마침 본인이 쓴 책을 갖고 있던 크리스는 내가 너무 신기해하고 본인의 책에 관심을 가져하니 처음 보는 나에게 자신의 책을 선물해주었다. 작가에게 책 선물 받는 건 처음이어서 기분이 너무 좋았다. 내가 좋아하니 크리스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우리랑 같이 놀아요>


크리스는 노점상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 직원들 대신 호객 행위를 해주고 있던 것이다.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안녕~ 너 목말라 보이는데 음료수 마셔야 되지 않아? 여기 콜라 엄청 시원해~' 하며 사람마다 멘트를 바꿔가며 영업을 했다. 말도 청산유수 같이 잘하고, 마치 본인의 일인 양 최선을 다해 일하는 모습이 신기하고 재밌어서 나도 크리스를 도와 호객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부분 웃느라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크리스의 원래 목적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음료를 팔아 노점상 매출을 올려 주는 것이었는데 말을 워낙 재밌게 하다 보니 사람들이 음료수를 사서 우리 옆에 앉기 시작했다. 단체로 마약을 한 것 같은 호주인 무리들도 와서는 무기 파는 아저씨의 칼을 가지고 놀다가 스스로 팔에 상처를 내기도 하고, 약간 인종차별자 같던 10대 호주인 커플들도 왔다. 우리는 큰 원을 만들어서 파티처럼 맥주를 마시고 웃고 떠들며 놀았다. 크리스의 영업이 대성공한 것이다. 그냥 지나갈 뻔한 사람들도 자리에 데려와 술을 더 마시게 만드는 크리스가 너무 신기했다. 왔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우리는 스스로 뿌듯해하며 다음날도 이곳으로 모여서 또 호객행위를 하자고 약속했다. 어떻게 보면 여행 와서 관광은 안 하고 무보수로 남의 사업을 도와주는 것이었는데, 어쨌든 내가 재밌으면 그만이다. 어렴풋이 계획해 두었던 여행 일정은 모두 잊어버리고, 이 날부터 베트남으로 돌아오는 날까지 매일 크리스를 만났다.


 

사진: hyer02

下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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