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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atitudo Jun 29. 2021

은하수 보며 밤수영 한 그 날밤

이집트_다합下 / 직장인의 드문드문 세계 여행


<3일인데 3년 같은>


셋째 날 오전에는 S의 연락이 없었다. 그래, 난 여행하러 온 사람이니까 다시 밖으로 나가볼까. 창문을 열어놓고 바깥에서 나는 차 소리, 사람 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느긋하게 나갈 채비를 했다. 따뜻한 바람이 살랑 들어오는 게 기분이 좋았다. 준비가 다 되어갈 때쯤, 1층에서 자동차 클랙션 소리와 함께 S가 나의 이름을 부른다. 내가 아침 일찍부터 나갔으면 어쩌려고 연락도 없이 호텔 앞으로 나를 찾아왔다. 나는 2층 베란다에서 S는 1층에 서서 우리는 대화를 나누다, 같이 프리 다이빙을 하러 가기로 했다. 몇 분이 채 되지 않은 이 순간 때문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져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나는 여행객이 아닌 어릴 때부터 이 동네에 살던 사람인 것처럼 모든 게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S와 나는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고, 늘 내가 2층에서 창문을 열어놓고 무언가를 하고 있으면 S가 차를 가지고 와서 창 밖에서 나를 부른다. 연락은 따로 하지 않아도 된다. 대부분 S가 올 때마다 나는 집에 있고, 내가 없어도 다음에 다시 오면 된다. 이게 우리가 만나는 방식이다. 이렇게 만나면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일상을 함께 보낸다. 늘 가던 바비큐 집에 가거나, 바닷가에 앉아 코샤리를 먹거나, 오리발을 챙겨 프리 다이빙을 하러 간다. 바쁘고 정신없는 호찌민 생활을 떠나, 이곳에서 먹고 마시고 웃고 수영하며 자유로운 삶을 사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한국을 사랑하는 소녀, 조마나>


S와 다합 해변가에서 수영을 하고 있는데, 우리 주위에 10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 아이가 어색하게 서 있고 멀리서 한 이집트 아저씨가 S에게 말을 건다. 아, 이 여자 아이가 딸이고 사진 찍어 달라는 부탁을 했나 보다 하고 짐작했다. 그런데 S는 갑자기 나에게 저 여자 아이에게 한국어로 인사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니 바로 "안녕~"하고 인사를 했더니, 여자 아이가 갑자기 입을 틀어막고 소리를 지르며 어쩔 줄 몰라한다. 슈퍼스타가 된 기분이었다.


그 여자 아이의 이름은 조마나. K-pop을 사랑하는 이집트 소녀다. 유튜브로 영어를 독학한 영특한 소녀로, 최근에는 한국말도 배우고 있다고 했다. 나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한국어로 자기소개를 해 아낌없이 칭찬을 해주었다. 그렇게 조마나는 내 옆에 착 붙어서 10분 넘게 자신의 학교 생활을 말하기도 하고, 한국에 대한 궁금증을 쏟아냈다. 아마도 내가 조마나 인생에서 실제로 처음 만나는 한국인이었던 것 같아서,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최대한 친절하게 대답해줬다. 불쌍한 S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 보다 못한 조마나의 아버지가 우리 시간 방해하지 말자며 조마나를 데리고 가셨다. 그날 내 연락처를 가져간 조마나는 아직도 가끔 나의 안부를 물어온다.


<그건 데오드란트가 아니란다>


다합 해변가 카페에 앉아 있다 보면 구걸하러 오는 아이들이 많다. S는 그런 아이들이 올 때마다 아랍어로 아이들이랑 대화를 한다. 무슨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나긋하고 다정한 S의 목소리로 보아 밥은 먹었는지 부모님은 어디 계시는지 물어보는 것 같다고 추측했다.


한 번은 S와 이야기를 나누던 한 아이가 갑자기 내 선스틱을 가져갔다. 신기한 듯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갑자기 겨드랑이에 내 선스틱을 바르는 것이 아닌가! 너무 당황한 나머지 꺅하고 소리를 지른 후 웃겨서 빵 터져 버렸다. 다른 사람들이 겨드랑이에 데오드란트를 바르는 것을 보고 똑같이 따라 했나 보다. 나보다 더 당황한 S는 바로 선스틱을 뺏어, 본인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나한테 사과를 했다. 그리고 웃으며 그 아이에게 뭐라고 말을 했다. 데오드란트가 아니라고 설명하는 것 같아서 나도 선스틱을 팔에 바르는 시늉을 하며 설명에 보탬을 했다. S가 같이 있어 안심이 돼서 그런지 화도 나지 않고 계속 웃음이 나왔다.



<은하수 보며 밤 수영 한 그 날밤>


우리가 자주 가던 한적한 해변을 저번보다 더 늦은 시간에 다시 갔다. 가로등도 없어 주위가 어두웠다. S는 수영을 하자고 했다. 너무 어둡고 무서워서 안 될 것 같다고 말하려는 찰나 하늘을 보니 수많은 별들 사이에 은하수가 있었다. 은하수를 직접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이번이 처음이었을까? 겁이 났지만 S도 있고 언제 또 은하수 밑에서 수영할 기회가 올 지 몰라 물속으로 들어갔다.


물속에서 계속 갈등이 일었다. 이대로 누워서 은하수를 계속 감상할 것인가, 밖으로 나가서 사진을 찍을 것인가. 어차피 사진 찍어도 제대로 안 나올 것 같으니 내 눈으로 실컷 즐기기로 결정했다. 배영 자세로 누워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윈도우 화면 보호기에서나 볼 법한 광경을 내 생눈으로 보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것도 물 위에 떠서. 친구들한테 자랑하고 싶은데 보여줄 증거 사진이 없어 아쉽다.


<꿈에서 깰 시간>


프리 다이빙 자격증 시험 날이자 다음 날이면 다합을 떠나는 날. 아침 일찍 S와 함께 팔라펠 샌드위치를 먹으러 갔다. 팔라펠 가게에 갔더니 갓 구운 가지 구이가 접시 위에 쌓여 있었다. 평소 가지를 너무 좋아해 가지 구이가 담긴 접시를 열정적으로 쳐다봤더니 인심 좋은 주인아저씨가 하나 먹으라고 하셔서 거절하지 않고 날름 받아먹었다. S는 마지막 날이라 아쉬웠는지 내가 무슨 행동을 하든 사진 찍고 동영상으로 남겼다. 아침이라 화장도 못 하고 못생겼지만, 내 모습을 기억하려는 노력이 기분 좋아 S를 말리지 않았다.

 

밥 먹고 소화시킬 겸 산책을 하는데 S가 공항 근처에 물도 깨끗하고 캠핑할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했다. 차가 있으니 본인 차를 타고 가면 되고, 목적지가 공항이랑 가까워 다음날 공항까지 나를 데려다 줄 수도 있다고 했다. 물이 깨끗해서 다합 시내에 있는 바다보다 물고기나 산호초들도 많고, 밤에는 라구나 해변보다 별들도 더 많다고 했다. 하지만 입장 제한 시간이 있어서, 그곳에 가려면 시험을 치지 않고 바로 출발해야 했다.


고민이 되었다. 다합에 온 목적은 프리다이빙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인데. 이렇게 시도도 안 해보고 다합을 떠나야 하나. 난 고민을 하다 시험을 보기로 선택했다. S와의 마지막 추억이 아닌 나의 성취감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보기 좋게 시험 탈락. 내 선택이 잘못됐다고 누군가 놀리는 것 같았다.


다합으로 오기 전엔 이집트가 베트남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좋았다. 내 일상에서 물리적으로 멀어지는 만큼, 정신적으로도 멀어져 해방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인연을 만나고 나면 말이 달라진다. 왜 이집트는 태국이나 말레이시아가 아닐까. 아직도 가끔 시험을 포기하고 S와 캠핑하러 갔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소용없겠지. 아쉬움만큼 좋았던 기억 잊지 않고 살아가야지. 인연이 닿는다면 다음에도 기회가 있을 거다. 그때까지 الى اللقاء.


사진: hyer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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