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go Quyen st│베트남 독립의 서막을 연 바닷길의 영웅
주말에 뭐 하고 싶냐는 나의 물음에 40개월 둘째가 대답한다.
"호텔 갈래! 호텔 가자!"
당황스러운 대답이었다. 여기가 한국이었다면 지나가던 사람이 쪼매난 것이 벌써부터 호텔 타령이네 하며 옆에 있는 나를 쓱 훑어봤을 거다. 하지만 아이들의 대답에는 늘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법. 밥을 먹으러 가든, 수영을 하러 가든, 한 달에 한두 번은 빠짐없이 놀러 가던 호텔이니, 나도 딱히 할 말은 없다.
한국에서의 5성급 호텔은 기념일에 차려입고 가야 하는 특별한 장소이지만 하노이에서는 동네 카페 가듯이 들를 수 있는 일상적인 공간이다. 그럴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음료 가격 덕분이다. 하노이에 있는 호텔의 아메리카노 한 잔 가격은 6-7천 원 정도로 한국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파는 과일 스무디와 비슷한 가격 수준이다. 같은 가격으로 5성급 호텔의 쾌적함, 분위기, 서비스까지 누릴 수 있으니 우리에게 호텔은 자주 가지는 않더라도 큰 맘먹고 가야 하는 곳은 전혀 아니다.
게다가 매우 키즈 프렌들리 한 베트남 답게 하노이의 호텔들은 키즈풀부터 야외 놀이터, 산책로, 키즈클럽, 체험 프로그램까지 아이들을 위한 서비스가 알차게 갖춰져 있다. 한국이었다면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베이비 마사지니 음악놀이니 쉴 새 없이 다녔겠지만, 베트남 쇼핑몰엔 그런 서비스가 전혀 없다. 그래서 하노이에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에게 호텔은 적당한 비용으로 아이와 함께 숨 돌릴 수 있는 문화센터 같은 곳이기도 하다.
덧붙여 하노이의 많은 주재원 가족들이 레지던스 호텔에서 살고 있다. 실제로 첫째 아이의 몇몇 친구들도 호텔에 살고 있어 그들의 집에 자주 놀러 가다 보니 우리에게 호텔은 일상생활공간의 연장선 그 어딘가에 자연스레 포지셔닝되어버렸다. 그러니 어디 놀러 가고 싶냐는 물음에 호텔이라는 둘째의 대답이 당황스러우면서도 이해는 간다.
하노이의 5성급 호텔 얘기를 하면서 소피텔 레전드 메트로폴(Sofitel Legend Metropole)을 빼놓을 수 없다. 소피텔 레전드 메트로폴은 1901년 프랑스 식민시절에 지어진 역사 깊은 호텔 중 하나이다. 처음에는 프랑스 고위 관리들과 귀빈들의 숙소로 사용되다가 독립 후에는 통일호텔이라는 이름으로 베트남 정부의 공식 외빈 접대 장소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아코르 그룹 아래 소피텔 레전드 메트로폴 하노이로 브랜딩 되어 세계적인 역사적 호텔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찰리 채플린이 신혼여행을 보낸 곳으로도 유명한 이 호텔은 호안끼엠 구시가지 중심의 응오 꾸옌(Ngô Quyền) 길 위에 있다.
응오 꾸옌(Ngô Quyền)’이라는 길 이름은 약 1,000년간 이어진 중국의 지배를 끝내고 베트남의 독립을 이끈 위대한 장군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역사적으로 매우 뜻깊은 의미를 지닌다. 그의 수많은 전투 가운데 특히 잘 알려진 것은 박당(Bạch Đằng) 강 전투다. 당시 그는 조수 간만의 차가 큰 박당강에 쇠 끝이 박힌 말뚝을 설치해, 썰물 때 적의 배가 걸리도록 유도하는 전술을 펼쳤고, 이 전략은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왔다. 이 전투의 승리는 단순한 전쟁의 결과를 넘어, 베트남 독립의 서막을 알리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하노이의 저렴한 물가를 열심히 누리면서도 가끔씩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한국보다 저렴한 호텔 커피도 따지고 보면 가계 지출이고 안 받으면 손해라는 마사지도 결국 소비인 것이다. 집안일을 도와주는 내니가 있어도 내 방 정리만큼은 내가 해야 하고 바닥에 쓰레기가 널려있어도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는 것. 이 당연한 것들을 아이들에 열심히 일러주는 요즘, 엄마인 나부터 관성적으로 누려온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를 느낀다. 누리는 것에 익숙해져 제때 움직여야 할 감각들이 무뎌지면 안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