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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엄마도 왕년에 밀라노 거리 좀 누볐어

Bà Triệu St.│베트남의 잔다르크, 바 찌에우를 기념하며

by 예스혜라

갑자기 더워졌다. 이제 진짜 여름이 시작되려나 싶어 엊그제는 옷장을 싹 정리했다. 니트 가디건 대신에 여름 가디건들을 꺼내놓으며 가디건을 유달리 좋아하는 나의 기호 하나를 새삼 상기했고, 잊고 지냈던 파란색 패턴 바지도 옷장 저 구석에서 하나 득템했다. 미루고 미루며 일로 시작한 옷장 정리는 하고 나면 늘 즐겁고 개운하다. 그러고 보니 내 옷의 대부분이 전부 ZARA 브랜드의 옷이네. 30대가 되면 당연히 백화점에서 옷을 사 입는 건 줄 알았는데. 서른여덟 인 지금의 나는 스물여덟 살 때보다 더 오랫동안 가격표를 만지작거린다.


내 스타일 주축을 담당하는 ZARA 매장은 5년 전만 해도 하노이에 딱 한 군데뿐이었다. 바찌에우 거리에 있는 빈컴몰 1층에 있었는데, 당시 내가 살았던 한인타운에서는 차로 3,40분 정도 걸리는 곳이다. 가깝지 않았지만 나름 왕년에 옷 좀 만져본 내가 유일하게 실컷 옷 구경을 할 수 있는 곳이라 종종 들렀었다. 바찌에우 거리는 ZARA 말고도 보세 옷가게들이 줄지어 있다. ZARA 구경만으로 아쉬운 날이면, 돌도 안된 유주를 유모차에 태우고 울퉁불퉁한 길을 자장가 삼아 바찌에우 거리를 부지런히 누비곤 했다. '라떼는 말이야~ 이 엄마가 밀라노 밤거리를 누볐다고~' 소싯적 자존감을 열심히 채우면서.


바 찌우에 빈컴몰의 하노이 ZARA 1호점


바 찌에우 거리의 보세 옷가게들



바 찌에우(Bà Triệu) 거리는 3세기 초 중국의 지배에 맞서 싸운 여성 영웅, 바 찌에우를 기념해 이름이 붙여진 거리다. 바 찌에우는 스무 살 무렵 약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직접 갑옷을 입고 봉기했다. 그녀는 "폭풍을 타고 하늘을 나는 새가 될지언정, 남의 밑에서 살지는 않겠다"라고 외치며 짧은 생애 동안 수많은 전투를 이끌며 항쟁의 상징이 되었다. 비록 패배로 생을 마감했지만, 현재까지도 '베트남의 잔다르크'라고 불리며 오랫동안 독립과 자유의 정신을 대표해오고 있다.

이 정신을 담아 만들어진 바 찌에우 거리는 하노이 구시가지를 남북으로 잇는 중요한 길이며 번화한 분위기가 가득한 거리이다. 거리 초입에는 대형 쇼핑몰인 빈컴센터가 자리하고, 그 주변으로 다양한 브랜드 매장, 보세 옷가게, 화장품점, 카페가 빼곡히 늘어서 있다. 대로가 넓어서 걷기에 좋고 길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호안끼엠 호수까지 닿을 수 있다.



민간화 속 바 찌에우 모습
호안끼엠 호수와 닿아있는 바 찌에우 거리의 끝



어제는 쇼핑도 할 겸 오랜만에 바 찌에우 거리에 갔다. 그런데 이제는 빈컴몰의 ZARA 1호 점도, 열심히 들여다보았던 옷가게들도 다 전만큼의 감흥이 없다. 거리 중간쯤 걸어왔을까, 못 보던 도서관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슬쩍 들어가 보니 제법 규모가 있는 하노이 도서관(Thư viện Hà Nội)이었다. 각 열람실마다 책도 많고 읽을만한 한국 책들도 제법 있었다. 조용히 공부하는 학생들 틈에서 이런저런 구경을 하고 화장실 볼 일까지 야무지게 끝내고 나왔다. 화장실마저 깨끗하다니, 이런 곳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 도서관을 나오며 핸드폰으로 구글맵 앱을 열었다. 지도 위 바찌에우 거리에 있는 많은 별들을 지우고 이 도서관 자리 위에 별 하나를 띄웠다.



바 찌에우 거리의 하노이 도서관


옷 구경보다 책 구경이 더 재밌는 지금의 나. 정말 취향이 변한 걸까? 아니면 아이 둘 키우며 쇼핑 욕구를 애써 누르고 있는 것일까? 왠지 후자 같지만 일단 책을 좋아하는 여자가 된 걸로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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