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여름, 포르투갈 10 쪼로록, 호로록, 포트 와이너리 체험
다음 날 아침, 기상은 늦었다. 일찍 자도 늦게 일어나고, 늦게 자니까 늦게 일어날거면 이왕지사 오늘은 늦게까지 돌아다녀볼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언니는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바나나 브레드를 먹는다는 지론을 갖고 있는 그녀가 아침마다 홀연히 사라지는 건 당연한 일상이 되어 버렸다. 오늘도 이른 아침 그녀는 포르투의 ‘바나나 브레드’를 찾으러 떠났을 것이다. 언니는 알아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려니 싶어 난 엄마랑 천천히 카페를 찾아 길을 나서보기로 했다. *
우선 포르투의 여행 행선지, 맛집 및 체험 장소는 오로지 구글 지도의 평점과 네이버 블로그 포스트픽으로 이루어 졌다는 걸 적어야 겠다. 거기에 에어비엔비 호스트가 적극적으로 추천한 몇몇 군데를 조미료처럼 첨가해 그럴듯한 3박4일 여행 일정표를 짰고, 첫째날은 매끄럽게 일정을 소화했기에 대중픽으로 더 기울어진 추세였다. 오늘도 그럼 대세를 따라 카페를 점지해보자는 쪽으로 마음을 먹었다. 그 중 하나가 마제스틱 카페였다. 포르투 여행에 공통적으로 언급된 곳들 중 하나이자 구글 지도에서 결코 지나칠 수 없는 리뷰수를 자랑하는 곳이다. 카페라고는 하지만 브런치 메뉴를 포함한 주류나 식사 메뉴도 있는 곳이다. 게다가 마제스틱 카페에서부터 쭉 이어지는 골목 거리도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상업 지구기 때문에 겸사겸사 갈 만 하리라는 생각에 미쳤다. 지도를 찾아보니 우리가 묵는 숙소에서 걸어서 5분 거리였다. 일타삼피. 엄마와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이미 샐러드로 요기를 한 상태여서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어떤 메뉴를 시킬지 모르는 상태에서 갔는데 퍼뜩 지난 밤 핸드폰에서 본 블로그 글이 생각났다. 뭘 모를 때는 남들 하는 거 따라만 해도 반은 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그리하여 엄마와 나는 각자 마실 커피 한 잔씩, 그리고 카페의 시그니처 메뉴라는 프렌치 토스트 하나를 시켰다. 프렌치 토스트를 보니 왜 인기 메뉴가 됐는지 알 것 같았다. 보통 생각하는 프렌치 토스트와는 다른 모양새였다. 토스트 위에 시럽이 뿌려져 있었는데 달걀 노른자 색깔에다가 달짝지근한 맛이었다. 토스트 자체도 달걀이 많이 들어갔는지 부들부들한 질감이 인상적이었다. 우리 집 앞에 있었으면 단골로 매일 아침 출근 도장을 찍었을텐데 이 곳이 산 건너 바다 건너 있다는 것이 대단한 유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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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를 나와서 바로 상벤투 역으로 향했다. 상벤투 역은 포르투에 있는 기차역이다. 마찬가지로 네이버 블로그로 열심히 사전 계획을 수립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벤투 역을 꼭 일정에 넣길래 왜 그런지 궁금했다. 굳이 기차역을 가는 이유가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아줄레주 타일이 유명한 기차역이라고 해도 타일이야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막상 기차역에 들리고 보니 그런 의문이 말끔히 가셨다. 2만여개의 아줄레주 타일이 나란히 붙어 연출해 낸 장면은 단순히 예쁘다는 미학적인 감상을 넘어 신기함마저 자아냈다. 아줄레주 타일이 붙은 벽화는 각 장면마다 포르투갈의 역사를 담았다고 하는데 예습을 안 해온 관계로 우린 외관을 보고 감탄을 연발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하는 게 없었다. 물론 옆에서 톰이 끊임없이 벽화 얘기를 하기는 했지만 미안하게도 지나다니는 사람들 발길이 뜸해진 틈을 놓치지 않고 사진을 찍는 게 우선이었다. 머리에 지식을 채우는 건 직장에서 분에 넘치게 하고 있는 행위이기에 휴가는 휴가답게 앨범을 사진으로 채우는 게 더 정도에 맞아 보였다.
후에 사람들이 상벤투역 문이 닳도록 지나다니는 이유를 몸소 깨닫게 되었다. 하나는 물론 아줄레주 타일이 빚은 장관 덕이지만 다른 하나는 모든 곳은 결국에 상벤투역을 통하게 된다는 것이다. 괜히 기차역 이름 값을 하기 위해 선점한 위치가 아닌건지, 아니면 포르투가 듣던대로 작은 도시라서 그런지 어딜 나서려고 하면 상벤투역을 지나칠 수 밖에 없었다. 우린 인파를 타고 상벤투역을 나왔다. 새로운 지하철 노선을 만든다고 역 근처는 공사밭이 되어 있었는데 철조망 위에 나부끼는 포스터 문구가 뇌리에 박혔다. <새로운 지하철, 새로운 문제 더미> 우린 관광객으로 포르투를 즐길 뿐이지만 이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다르게 다가올 문제였다. 도시 곳곳에 이스터 에그처럼 숨은 포스터나 그래피티 속에서 포르투에 터를 잡고 사는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며칠 있다 갈 여행객은 모를 사회적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걸 훔쳐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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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벤투역에서 향한 곳은 칼렝 와이너리였다. 동 루이스 다리를 건너 제일 가까운 곳에 있어 가장 많은 관광객이 와이너리 체험을 하러 가는 곳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이 곳보다 훨씬 더 먼 거리에 있는 와이너리를 가려다가 에어비엔비 호스트가 가까운 곳을 가는 게 좋다는 조언을 해주었다. 포르투에 있는 와이너리에서 제공하는 투어는 대부분 비슷한 포맷인데다 어딜 선택해도 질적인 면에서는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이왕지사 가까운 곳에 가는게 편하다는게 요지였다. 우리는 전날 프란세지냐 맛집을 호스트의 추천으로 경험한 이후 호스트의 추천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 곳으로 예약을 변경해 신청했다. 그리고 이 선택 또한 결과적으로 굉장히 현명한 판단으로 드러났다.
와이너리 투어는 능숙한 가이드에 의해 영어로 진행되었다. 와인 저장고에서 포트 와인의 역사부터 종류, 음식 페어링 등 이론적인 지식 뿐만 아니라 강의식 가이드로 지나치게 지루해지지 않도록 다양한 시청각 자료를 제공해준다. 단순히 표지판으로만 설명하는 게 아니라 동굴처럼 어둑한 저장고 벽면에 빔을 쏴서 시청각 자료를 보여주는데 스티브 잡스 저리가라 였다. 또, 투명한 통에 종류가 다른 포트 와인을 담아 빛깔이나 농도를 확인할 수 있도록 담아두고 직접 흔들어 점도까지 볼 수 있게 만들어준 장치도 재미있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와인 저장 창고에는 말그대로 어마무시하게 거대한 코르크 통이 있었는데 통의 압도적인 크기를 몇 리터의 와인이 들어가고, 몇 병의 와인을 생산할 수 있는지 가이드의 재치 있는 입담과 현란한 빔 프로젝트 기술로 전달해 준다. 잠시도 흥미가 떨어질 틈이 없었다. 입이 떡 벌어지게 신기했던 프레젠테이션으로 눈과 귀가 즐거웠는데다가 투어의 마지막에 이어지는 테이스팅으로 입까지 달래주는 것을 잊지 않았기에 결과적으로 오감이 만족스러운 투어였다. *
우리 해설을 맡아준 직원 뿐만이 아니라 와이너리에서 일하는 직원 모두가 전문성을 갖추고 있었다. 다른 말로 이 곳이 와이너리 투어를 제공한지 하루이틀이 아니라는 게 투어의 질적인 퀄리티에서 뿐만이 아니라 직원이 투어에 참여한 개개인을 응대하는 방식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왜냐하면 시의적절하게 도움을 주길 망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의 순서는 다음과 같이 벌어졌다. 저장고에 들어가는 길에가이드가 경고했다.
“알다시피 포르투 와인은 도수가 높아서 여기에 오래 있으면 혈중 알콜 도수가 높아질 수도 있어요. 공기 중에 알콜 성분이 날아다니거든요.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모두가 웃었다. 직무에 충실한 직장인 모드로 허무맹랑한 농담을 던지길래 이 대사도 농담인 줄 알았다. 아직도 그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과학적 사실 여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그 경고는 현실이 되었다. 엄마가 저장고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오면서 두통을 호소했다.
“왜 갑자기 머리가 아프지? 잠깐 앉아 있으면 안되나.“
“앉아 있을데도 없잖아.“
엄마가 냅다 장식용 돌덩이에 앉으려고 했다. 터무니 없는 시도였다. 하지만 엄마는 그만큼 동굴 탈출에 절박했는지도 모른다.
“그럼 아예 밖으로 나가자.”
이성을 잃어가는 엄마를 제지하기 위해 용감하게 제안했다. 우린 출구를 찾아서 나가기로 했다. 저장고의 끝 지점에 다다랐을 때 직원이 엄마의 허옇게 뜬 얼굴을 보고 걱정스럽게 바라 보았다.
“괜찮으세요?”
엄마에게는 오로지 직진 본능만이 남은 것 같았고 나는 약간 머쓱해 어머니가 몸이 좋지 않아 잠깐 밖에 앉아 있을 곳을 찾고 있다고 했다.
“그럼 여기로 오셔서 잠깐 쉬시는 게 좋겠어요. 의자랑 물을 가져다 드릴게요.”
직원은 직원용 통로로 우리를 안내하고 바깥 테라스로 이어지는 곳으로 안내했다. 덕분에 엄마는 한 줄기 빛과도 같은 휴식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엄마를 바깥에 긴급 대피시키고 다시 돌아왔는데 언니가 갑자기 테이스팅을 하려면 티켓이 있어야 한다고 핸드폰을 내놓으라는 말에 왔던 길을 되돌아 가야 했다. 핸드폰이 엄마 가방에 있었던 탓이다. 천사의 마음씨를 가진 직원을 마주하고 머쓱한 마음에 직원용 통로로 달려 내려가 의자에 앉은 엄마를 발견했다. 엄마는 의자 에 앉아 선글라스를 야무지게 끼고 다리를 달랑거리고 있었다.
“어, 웬일?”
“핸드폰 티켓을 보여줘야 시음할 수 있대.”
“어, 여기! 야, 여기 딱이다, 딱이야. 경치 죽여준다.“
주접을 떠는 엄마를 두고 다시 직원용 통로를 올라 왔을 때는 잠시 이 곳에 인턴으로 취직한 느낌마저 받을 정도였다. 언니한테 헐떡이며 와서 핸드폰을 건내 주었을 때 언니와 톰은 이미 와인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뭔데, 왜 나 빼고 마시는데.”
“우리 얼굴 알아서 그냥 들여보내 주더라.”
언니가 모든 장소에서의 해설을 1열에서 직관한 덕분인 것 같았다. 언니 얼굴 자체가 티켓의 역할을 한 것이리라. *
우린 두 잔의 포트 와인을 마셨다. 하나는 화이트, 다른 하나는 토니였다. 물론 그 와인에 대해 또 신박하게 설명은 했겠지만 잠시 엄마 탈출을 함께하느라 놓쳐 토니 포트는 어떤 품종인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딱히 와인의 역사가 궁금하다기보다는 맛있으면 장땡이라는 와인관을 가졌기에 자리에 앉자마자 시음에 돌입했다. 그리고 역시나 달달한 첫 입에 무겁게 내려앉는 알콜 도수까지, 포트 와인은 포트 와인이었다. 입에 넣는 건 모두 달아야 한다는 음식 지론을 가진 나로서는 알콜 도수만 아니었으면 포트 와인을 물처럼 마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수가 너무 높아 어쩔 수 없이 동반되는 진한 알콜 맛은 애석하게도 내가 포트 와인을 포함해 주정강화 주류를 멀리할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였다. 두 잔만 마셨을 뿐인데도 위장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맛있다, 맛있어.”
“달다, 달아.”
찬사가 절로 나오는 것을.
***
3시 가까이 되어서야 나왔다. 가이드와 함께하는 해설, 시음회가 끝나고 언니와 나는 선물을 사가겠다고 기념품 샵에 있는 미니어처 포트 와인 세트를 몇 세트 구매했기 때문이다. 빈 손으로 들어가 두 손 두둑하게 챙겨서 나왔다. 게다가 여기서 기념품 쇼핑의 끝이 아니었다. 와이너리 투어를 내려 오는 길에 잼을 파는 가게에서 포르투산 잼을 사가자고 이미 합의를 마쳤기 때문이다. 밖에서 한량처럼 돌아 다니는 엄마를 낚아채 우린 왔던 경로를 밟아 중심가로 향했다. 잼 가게로 직행해 2차로 사재끼고 나니 더 이상의 도보 관광은 불가했다. 여기서 15분만 더 걸어가면 숙소라고 하니 우린 잠깐 숙소에 들러 짐을 다 내려놓고 다시 나오기로 했다. 그 15분이 경사 45도의 등산길이었음을 알았으면 다른 결정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15분은 기만이다.”
올라가는 내내 구글 맵의 사용자 농락에 대해 논했다. 마침내 숙소에 짐을 두고 내려왔을 때 시간은 이미 4시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이 말인즉슨, 우리를 위해 열어둔 레스토랑이 거의 없다는 뜻이었다. 이 곳의 브레이크 타임은 굉장히 극악무도해 3시부터 영업을 중단하면 7시가 되어서야 다시 여는게 대다수의 경우였다. 당혹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맥도날드에 가는 것만은 피해야 되지 않느냐, 패스트푸드는 관광객으로서 용납할 수 없다는 의견과 배고파 눈이 돌아가겠으니까 아무데나 들어가자는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우린 짧은 긴급 회의와 두 차례의 문전박대 끝에 이제 막 영업을 시작하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
한 잔의 그린 와인, 맛깔나는 해산물 요리. 실패할 수 없는 포르투갈 공식 식단이었다. 행복은 멀리 있었다. 지구를 반바퀴 돌아 유럽 대륙의 끝자락에 붙어있는 포르투갈에 있었으니 말이다. 멀리 있는만큼 누리련다, 나는 너무나 명쾌한 결론을 속으로 내리며 그린 와인을 탈탈 털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