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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린 Aug 26. 2023

그 해 여름, 포르투갈 10 리스본에 여자 셋이 모이면

그 해 여름, 포르투갈 07 리스본에 여자 셋이 모이면

다음 날은 구 시가지를 탐방하는 날이었다. 계획형 인간은 아니지만 엄마랑 언니가 모처럼의 여름 휴가를 내고 유럽까지 왔는데 여기저기 헤매기만 하고 시간을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아예 각잡고 하루를 가족여행을 계획하는데 집중했다. 아예 수기로 작성해 단톡방에 공유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오늘은 리스본 구시가지를 돌기로 계획한 날이었다. 이전 불볕 더위에 나가 떨어지는 바람에 일정을 단독 조기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반드시 성공적으로 마치리라고 굳게 다짐했다. 심지어 엄마와 언니는 체력적으로도 나보다 팔팔했다. 이미 2주간 리스본에 미리 터를 닦아놓으면서 체력을 비축해두었건만 가족들이 방문한지 하루만에 모두 무너져 버렸다. 그래도 할 수 없다. 최대한 이 악물고 끝까지 달려보는 걸로 마음을 굳게 다잡는다.

구시가지는 역사적 명소나 유적지가 많아 타미가 현지인으로서 직접 가이드를 하고 싶다고 자청해 우린 이번 만큼은 가이드를 끼고 리스본 투어를 해보기로 이미 계획한 바가 있었다. 집에서 10분 정도 걸어 내려가면 나오는 코메르시우 광장부터 시작해서 대성당, 수녀원이나 산 조르쥬 성을 굵직한 장소를 거점으로 찍고그 사이 이어주는 좁다란 골목을 끼고 돌며 리스본과 포르투갈의 역사에 대해 알아 보겠다는 게 오늘 관광의 골자였다. 그런데 아침부터 뭔가가 잘못 되어도 단단히 잘못되기 시작했다.

***

사건의 발단은 아침 잠이 없는 언니가 산책을 나가기로 시작한 것으로 비롯되었다. 언니는 본래 체력이 좋고 부지런하게 몸을 움직이는 사람이다. 내가 간과한 것이 바로 그녀의 체력과 특유의 급한 성질이었다.

“내가 오늘 아침에 산책을 나갔는데 무슨 엘리베이터가 보이더라고. 그건 산타 후스타 그건가?“

“어? 오늘 아침에 나갔다 왔어?“

10시가 넘은 시각에 겨우 일어나 아침을 먹는 중이었다. 우린 소고기를 실컷 먹자며 아침부터 장 봐 온 스테이크 팩을 뜯어 굽고 샐러드와 과일을 함께 차려 테이블이 가득차게 아침 상을 차려 놓은 상태였다.

“나 할 거 없어서 7시에 나갔다 왔어.”

“어디로”

“그냥 틱틱틱틱 걸으니까 강이 나오더라고? 그래서 오, 이게 강이야, 바다야 하다가 보니까 저 멀리서 그 어제 벨렝에서 봤던 빨간 다리가 보이대? 설마 그 다리가 그 다리겠어 해서 구글 지도 보니까 맞더라고. 리스본이 작은 도시이긴 한가봐.”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너무나도 가볍고 경쾌하게 틱틱틱틱 걸어간 곳이 바로 코메르시우 광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구도심지를 향해 걸어갔다는 것인데 시작점이 그 곳일뿐 어디에서 그녀의 아침 모험이 끝날 지 몰라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우리의 오늘 하루는 이미 언니가 사전 답사를 다녀온 셈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거야?“

“아니, 뭐 가다보니까 언덕길이 나오길래 쭉 올라가니까 무슨 성당도 나오고 높은 데 가니까 정원 같은 데도 있더라고. 전망이 좋아서 나중에 엄마랑 오면 되겠다고 생각했어. 거기가 엄마가 어제 말한 데 맞나? 무슨 두솔?“

높은 데에서 본 정원은 빠라두솔 전망대. 언니가 ‘무슨 성당‘이라고표현한 곳은 리스본 대성당이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진정으로 언니는 짱짱한 체력으로 아침 7시부터 산행을 시작해 리스본의 골목배기와 경사진 오르막내리막을 헤집고 다니며 온갖 관광 명소란 명소는 다 휩쓸고 다닌 셈이다. 세상에, 그걸 단 2시간 만에.

“설마 그럼 스타벅스도 봤니.“

혹시나 시아두 지역까지 그녀의 허리케인급 아침 산책 반경에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는 길에 엘리베이터랑 스타벅스도 봤는데 그 엘리베이터가 유명한 엘리베이터 맞아? 작던데?“

무릎을 꿇고 내적 비명을 질렀다. 오늘 하루 다 끝났다.

“악! 그럼 어디부터 어디까지 다녀온거야! 오늘 구시가지 같이 도는 길이라고 했잖아. 벌써 다 다녀오셨구만! 내가 진짜 미친다. 누가 쫓아왔냐? 전력질주해서 리스본을 혼자 다 뛰어 다녔네.”

어이가 없다 못해 웃음밖에 안 나온다. 엄마가 옆에서 거든다.

“옆에서 말리는 사람도 없겠다. 자기 혼자 신나서 뛰어 다녔겠지. 내비둬.”

그랬더니 언니가 옆에서 속터지는 소리를 한다.

“아, 나는 그냥 성당이고, 그냥 정원인줄? 심지어 엘리베이터도 미니어처 버전인줄 알았어. 아, 웃긴다.“

님, 이런 식으로 개인 행동하시면 앞으로 제 리스본 투어에서 명단 제외 시키겠습니다.

***

그럼에도 하루는 시작되어야 했다. 우린 아침 식사를 마저 마치고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이제 막 11시 반을 넘어 해가 쨍쨍하게 뜰 때가 되었다. 12시까지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타미와 만나기로 했다. 거기서부터 오늘의 일정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언니는 다 알겠네, 가이드 해주시려나요, 옆에서 깐죽거렸지만 언니는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아까 전에는 슥 훑어봐서 뭐가 뭔지 모른다나 뭐라나. 엄마가 옆에서 ”그래, 제 성격에 뭘 꼼꼼히 알아보기는 했겠어. 그냥 스쳐지나갔겠지.“라며 딸의 천성을 궤뚫는 발언을 서슴치 않고. 내뱉는다. 우린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타미를 만났다. 난 이미 더위에 한 풀이 꺾인 상태였다. 더운 여름 날 한국은 사람을 찐만두로 만들어 버리지만 유럽은 군만두가 된다. 찌나, 구우나 제정신을 못 차리는 건 다를 바가 없다.

“잠깐, 얘 벌써 잼버리 돼가고 있는데?“

“오늘도 들어가서 좀 쉬는게 좋겠다. 너 어제 너무 무리했어. 더운 걸 그렇게 못 견디는 애가.“

언니가 녹아가는 날 발견하자 엄마는 걱정이 되었는지 날 자꾸 집으로 보내려고 한다.

“커피 한 잔만 마시고 정신 차릴게. 아니면 대성당까지만 같이 가. 나 좀 끼워줘!“

여행을 총체적으로 계획한 사람으로서 자존심이 굽혀지질 않는다. 물론 더운 것도 사실이고 반쯤 흐물흐물해진 것도 맞지만 결코 여기서 물러서고 싶지는 않았다. 전날 하루를 이미 버렸는데 그 이튿날마저 더위에 굴복할 수는 없었다. 난 이를 악물고 아이스 라떼를 들이키고선 얼음 하나하나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었다. 리스본 대성당으로 출발하자, 비장한 각오로 코메르시우 광장의 카페를 떠났다.

대성당으로 가는 길은 좁고 가파른 언덕 길이었다. 관광객들 중 일부는 트램을 타거나 개방형 카트를 이용하기도 했다. 우린 걸었다. 어차피 10분 여 정도만 걸으면 도착할 곳이었다. 물론 리스본에서 구글 지도는 그닥 믿을 것은 못된다. 똑같은 10분의 소요 시간이더라도 평지를 걷는 것과 기상천외한 오르막을 걷는 것은 큰 차이, 아주 크나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걷다 보니 대성당이 유려한 자태를 뽐내며 서있었다. 우린 예의 상 사진 몇 장을 찍어주고 얼른 안으로 들어섰다. 조막만한 그늘이라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시점이었다. 대성당 안은 어둑하면서도 밝았다. 그 모순적인 대비는 리스본 성당의 조경이 주는 묘미였다. 육중한 돌덩이로 만들어 졌기에 과거의 대지진에도 꿈쩍도 않았떤 건물이 풍기는 무게감과 높은 천장과 스테인드 글라스에서 비추어 내리는 빛이 맞닿아 어둑함과 화사함이 균형 잡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대성당을 나오는 길에서 더 올라가면 가로수길 사이로 도시 전경이 전부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펼쳐진다. 이제부터는 언덕길이 더 비탈져진다. 좁아지고 가파른 길목은 여행객들이 걷기도 하고 트램을 타기도 한다. 그 유명한 28번 트램이 이 길을 따라 지나가기 때문이다. 난 포르투갈에서 지낸 1년 가까운 시간동안 트램을 타본 적이 손에 꼽는다. 특히 주요 관광지를 따라 주행한다는 걸로 유명해 여행객들이 주로 이용한다는 28번 트램을 이번에는 꼭 타보고 싶었는데 인파를 보니 역시나 이번에도 포기해야 할 듯 싶었다. 냉방 장치도 없는 곳에 가득 메워진 사람들을 보니 타보고 싶다는 생각이 한 김의 아쉬움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우린 다시 한 번 걸었다. 아무리 언덕이 높아도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딛다 보면 보이는 도시의 풍경은 더 넓어지고 나는 더 높은 곳에 서있게 된다.


***

파라두솔 전망대는 붉고 푸른 꽃이 벽에 주렁주렁 매달린 아름다운 장소다. 나무로 차양을 만들어 해가 기울면 드리워진 그림자의 길이도 따라 길어지고 중앙에는 허브가 심어진 작은 텃밭이 있어 은은한 향기도 맴돈다. 강변을 훤히 내다보이기 때문에 햇볕이 수면 위에 머무는 낮 시간이면 눈부신 반짝임을 멀리서 관망할 수 있다. 노을이 떨어지는 시간에는 또 그 시간대만의 붉은 낭만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운치 있는 전망으로 이른 아침 시간이 아니라면 늘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지만 강변을 품고 굽이진 골목길 위를 따라 올라가면 카페 또는 바가 하나둘씩 위치해 있어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전망대 뿐만 아니라 커피 한 잔이나 와인 한 잔을 곁들여 풍경을 즐기면 더 좋다.

언니와 엄마는 전망대를 더 오래 둘러본다고 했고, 난 타미와 근처 루프탑 바에 가 있겠다고 했다. 전망이 좋으니 구경 다 마치면 이 곳에 들리라고 하며 말이다. 바깥 날씨는 점점 기온이 오르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또 잼버리 대원이 돼서 이른 철수를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서 적정 온도로 냉방이 된 실내에서 더위를 식혀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전망대 바로 위에 위치한 레스토랑에서 시원한 그린 와인을 시키고, 연어 세비체를 곁들였다. 더위를 먹었을지는 몰라도 음식을 계속 소화시킬 수 있는 위장과 끝까지 일정을 소화하려는 의지가 있어 다행이었다.

늦은 오후가 되어 엄마와 언니를 다시 만났다. 이들도 목을 축일 겸 중간에 강변을 내다 볼 수 있는 카페에서 시원한 음료수를 마셨다고 했다. 우린 바에서 한 시간을 더 머물렀다.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일상을 바쁘게 보내다 보면 놓칠 수 있는 이야기들, 너무 시시콜콜하다 생각해서 무심코 넘기게 되는 이야기를 꺼내 한참을 늘어 놓았다. 그리고 저녁 식사를 하러 자리를 옮겼다. 레스토랑은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대성당과 전망대 사이의 바깥 길의 바로 뒷골목이었다. 딱 한 블록을 뒤로 갔을 뿐인데도 인적이 드물고 조용한 거리가 펼쳐졌다. 우린 바깥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우린 오늘 봤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다가도 내읿과 그 후에 이어질 일정을 묻고 대답하기도 했다. 그러다 불현듯 옛날 생각이 떠오르면 10년 전의 어렸을 적 이야기도 살짝 들추어 보기도 했다.

평소라면 후딱 집어 삼켰을 저녁도 레스토랑에서 먹으니 식사에 대한 찬사와 음식 재료와 맛이 어떤지 서로 꼬치꼬치 캐물어가며 묻게 된다. 그러다가 리스본에선 해산물 요리를 자주 먹을 수 있다 보니 돌아다니는 곳마다 왕창 먹다 보니까 해산물을 좋아하는 가족이 생각나기도 했다.

“새우 머리를 보니까 아빠가 생각이 나네.“

“야! 넌 무슨 새우도 아니고 새우 머리를 보니까 아빠가 생각이 난대, 얘 완전 패륜이네.“

“아니- 내 말은 여기선 새우 머리 말고 통새우를 몇 마리고 배 터지게 먹을 수 있을 건데 이 말이지!“

*** 저녁 식사는 아주 천천히, 여유롭게, 오랜 시간 동안 이루어 졌다. 식사를 마치고 우린 리스본의 끝까지 올라가기로 했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리스본 산 조르쥬 성으로. 리스본에 지냈을 때 그렇게 가까이 있었으면서 한 번을 가지를 못했다. 산 조르쥬 성은 말 그대로 언덕 위의 언덕에 지어진 성이었다. 안 그래도 이미 높은 곳까지 올라왔는데 거기서 더 올라왔으니 내 눈이 망원경이 된 느낌이었다. 성곽 둘레길을 따라 걸었다. 어느 한 편으로는 도시의 붉은 벽돌과 색색의 지붕이 보이고, 다른 편으로 돌아가면 그런 도시를 품은 강이 보였다. 성곽의 돔에 작게 난 창으로 리스본 너머를 바라보았다. 성곽에 이끼가 끼지 않고, 관광객들 대신 병사들이 오갔을 시절에 가장 높은 꼭대기 탑을 지키고 있던 병사가 내가 지금 내려다 보는 풍경을 보았을까 싶었다. 전기도, 전등도 없었던 시절에 어둠이 내려 안은 적막한 도시와 일렁이는 검은 수면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돌 하나 하나에 몇 백년이 새겨져 있겠지, 이 높은 곳에 성을 어떻게 하나씩 돌을 쌓아 지을 생각을 했을까, 여기서 살던 병사들은 얼마나 척박하게 살았을까. 한 걸음에 하나씩 궁금증이 떠올랐다. 한 바퀴를 도는동안 해가 지기 시작했다. 푸른 강의 수면위로 붉은 자락이 깔리고 아직 남아 있는 선홍빛 햇볕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렸다. 돌아볼 때마다 해는 손가락 한 마디만큼 내려 가고 있었다. 밝았던 낮이 붉고 푸른 전경으로 바뀌고 캄캄한 어둠이 내려 앉기까지 우린 산 조르쥬 성곽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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