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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린 Aug 22. 2023

그 해 여름, 포르투갈 09 리스본에 온 여름 손님

그 해 여름, 포르투갈 07 리스본에 온 여름 손님


<도착>

먼 곳에서 귀한 손님이 왔다. 그들은 라면 4봉지, 비행기에서 기내식과 함께 나온 미니 고추장 팩 2개와 작은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기내식사용 김치 2팩과 함께 등장했다. 나는 그들도 반가웠고, 그들이 가져온 고향의 맛에도 애틋함을 느꼈다. 포르투갈에 온 지 보름이 조금 넘어 가족과 조우했다. 마중나가기 위해 이 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던 친구(이하 타미)와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다. 착륙 시간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게이트가 열리고 등장했다.

“혜린아!”

“어, 헬로.”

전자는 사랑하는 어머니로부터, 후자는 2살 많은 언니로부터 전해진 첫 안부 인사였다. 엄마가 내 이름을 멀리서 부르는 소리에 두 팔을 벌리고 가서 얼싸 안았다. 누가 보면 안 본 지 몇 해가 훌쩍 넘은 가족의 상봉인 줄 알 것이다. 딱히 그런 애틋한 상황은 아니지만 이들이 먼 타지의 땅에 발을 딛기까지는 나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언니의 특기 사항은 여행을 앞두고 발가락이 골절되어 한 달 동안 깁스를 한 바가 있었으나 여행 계획에 큰 차질을 주지는 않을 정도여서 다행인 직장인 정도로 설명할 수 있겠다.


하지만 엄마는 달랐다. 폐쇄적인 공간이라는 이유로 비행을 극도로 꺼려하는 엄마는 아주 큰 마음을 먹고 떠난 여정이었다. 기호에 비해 해외 여행을 자주 다니는 편이지만 그럴 때마다 난색을 표하면서도 여행이 선사하는 즐거움에 더 값을 쳐 비행을 인고하던 그녀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쟁으로 비행 시간이 한 두 시간이 더 늘어나자 손사래를 치며 반기를 들었다. 이런 엄마를 자극한 건 언니의 적극적인 움직임이었다. 엄마가 머리를 쥐어 싸매며 여행에 합류할지 안할지 고민하는 사이 덜컥 표를 예매해 버린 것이다. 당시 언니는 엄마의 갖은 비난과 질타를 받았으나 결과적으로는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 언니의 성급한 선택이 아니었다면 엄마는 이 곳에서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했을테니 말이다. 공항에 도착한 엄마는 오히려 나보다도 생기차 보였다. 일단 비행기에 내리니 안심이 되는 모양이다. 타미와 내가 짐을 나눠들고 택시를 불러 집으로 향했다. 앞선 2주 동안 이들을 위해 반질반질하게 갈고 닦은 집이었다.


<1일차>

다음 날, 제일 늦게 일어난 건 역시 나였다. 아시아 대륙에서 유럽으로 와 시차 적응을 한다는 건 강제 미라클 모닝 챌린지를 하는 것이므로 그럴 것 같았다. 반면에 나는 이제 게을러진 생활 패턴에 몸이 익어버려 9시 이전에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조차 힘들어 진 상태였다. 내가 일어나자 엄마와 언니는 이미 활발하게 주방과 거실을 오가는 중이었다. 장을 봐왔다고 한다. 착즙한 오렌지 주스, 소고기, 복숭아, 올리브, 하몽, 기타 등등 한국에서 샀으면 물 건너 온 값으로 두 배의 가격을 주고 샀을법한 산지의 음식이었다. 아침은 든든하게 먹을 수 있겠구나, 잠에서 금방 일어나 멍한 상태에서 그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리스본에 먼저 도착해 지냈던 지난 2주 동안 계획한 일정표를 드디어 야심차게 펼칠 때가 되었다. 긴 비행을 마치고 왔을지라 첫 날은 쉬엄쉬엄 휴식을 취하며 여유를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리베르다드 대로변 주변 숙소에서 묵었기에 20여분을 걸어 도착할 수 있는 에두아르도 7세 공원을 먼저 가기로 했다. 가는 김에 리베르다드 대로변 주변의 풍경과 운치도 함께 즐기면 좋을 것 같았다. 내리쬐는 햇볕이 뜨끈했고, 얼굴이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에두아르도 7세 공원은 가파르다 못해 절벽을 형상시키는 오르막 지형이다. 우린 땀을 뻘뻘 흘리며 꼭대기까지 올랐다. 이 때부터 내가 머릿 속에 생각한 온전한 휴식과는 조금 거리가 먼 하루가 되겠다는 걸 깨달았어야 했다.

에두아르도 7세 공원을 둘러보니 아아메가 그렇게 땡길 수가 없었다. 시원한 카페인 수혈이면 다시 원기충전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린 잠시 땀을 식히자며 공원의 내리막길에 접어드는 길목에 위치한 엘 코르테 잉글레스 백화점에 들어갔다. 마음 놓고 아이스 커피를 시킬 수 있는 곳은 스타벅스다. 일단 믿고 마시는 보장된 세계 공통의 맛이 있기에 아아메 두 잔을 들고 위풍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그 다음 향한 곳은 굴벤키안 정원이었다.

에두아르도 7세 공원은 웅장한 멋이 있고, 꼭대기에서는 리스본 전경이 다 보일만큼 탁트인 공간인 반면 굴벤키안 정원은 아담한 규모지만 나무와 풀이 우거져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호수 주변에 옹기종기 돗자리를 깔고 누워 여유적적함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굴벤키안 정원에서 드러눕기 위해 돗자리까지 가져오는 정성을 보였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언니는 정원 안에 있는 자코메티 특별전을 본다고 쌩하니 가버리고 엄마와 나는 적당한 곳을 물색해 돗자리를 주섬주섬 펼쳤다. 풀숲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잠이 밀려 들었다. 눈이 절로 감기는데 눈꺼풀을 들어올리기가 힘들어 그만 포기해버리고 말았다.

일어난 건 순전한 허기 때문이었다. 저녁 6시가 다 되었다. 엄마는 옆에서 낮에 찍었던 사진을 구경하고 있었다. 저녁을 일찍 먹는 버릇 때문에 이미 내 위장은 음식을 소화시킬 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배고픈데.”

“어쩌냐, 저녁을 7시에 예약했다며.”

“와, 근데 배가, 너무, 진짜, 이렇게 고플 수가 없다.”

미봉책으로 굴벤키안 정원 안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와플을 하나 시켜 먹었다. 그나마 속을 달래려는 방편이었다. 곧 있으면 타미를 만나 이 곳에서의 본격적인 식사를 할 참이었다. 전시회를 다 둘러보고 나온 언니와 만나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은 전통 포르투갈 음식점이었다. 메뉴는 해산물 요리가 주를 이루었다. 리스본의 대표적인 해산물 음식이라는 대구 요리만 하더라도 조리 방식이 다양해서 같은 재료여도 메뉴가 여러 개가 나올 수 있다. 마치 돼지 고기로 제육 볶음을 해먹을 수도, 삼겹살을 해 먹을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린 두 가지의 대구 요리, 농어 요리, 문어 요리를 시켰다. 요리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하며 테이블을 채우자 첫째는 그 어마어마한 양에 놀라고, 둘째는 간의 세기에 놀랐다. 모든 요리가 우리 입맛에 지독히도 짰기 때문이다. 여태 리스본에서 해산물 요리를 여러 군데에서 먹어 보았건만 이 곳만큼 짜게 요리한 곳은 없었어서 나도 적잖이 당황했다.

“원래 이렇게 짜니?”

조심스러운 감상평에 할 말이 없었다. 나도 혀를 강타하는 짠 맛과 소금기에 마찬가지로 일시적 쇼크 상태에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짜다, 짜다 말을 하면서도 희한하게 다들 그릇은 싹싹 긁어 다 비웠다. 배가 고팠다는 증거일런지, 그만큼 맛있었다는 증거일런지는 모른다. 확실한 건 3일치 나트륨을 다 섭취한 것처럼 짜긴 짰다는 것이다.

배가 너무 불렀다. 안 되겠어, 집까지 걸어가야겠어. 그렇지 않다가는 나트륨 과다 섭취로 다음 날 붓기로 눈이 안 떠질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그래서 우린 굴벤키안 정원 뒤쪽의 식당에서부터 우리가 묵는 숙소까지 30여분이 훌쩍 넘는 시간을 내리 걸었다. 낮고 높은 언덕과 경사로를 지나 돌길을 열심히도 걸었다. 집에 도착하니 거의 10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걸음 수는 2만 걸음을 넘겼다. 여유롭게 보내자던 리스본 1일차는 진작 날아간 셈이다.


<2일차>

온 몸이 뻐근하니 쑤셨다. 아무래도 여태까지 너무 안빈낙도의 생활을 이어나가다 어제 너무 많이 걸은 모양이다. 그래도 탐방은 계속되어야 한다. 오늘은 벨렝 지구를 가는 날이다. 가는 길의 수고를 덜기 위해 우버를 불렀다. 벨렝 지구는 리스본 끝자락인 강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대중 교통으로 가기에는 다소 시간이 소요된다. 우리는 제로니모 수도원을 목적지로 설정하고 강변을 따라 쭉 내려갈 계획을 세웠다. 제로니모 수도원까지는 20분도 채 안되어 도착했다. 택시를 내리고 둘러보니 저 멀리 수도원 광장 앞에서 길게 늘어선 줄이 보였다. 저 기다란 줄은 무엇인고 하니 수도원 입장 티켓을 사려는 인파였다. 예상치도 못한 대기 인원에 우리는 빠르게 만장일치 포기를 외쳤다.

수도원에서 내려오는 길에 가장 오래 되었다는 에그 타르트 맛집, 모두가 다 아는 그 곳, 다른 곳의 에그 타르트도 비슷하게 맛있으면서 벨렝까지 왔는데 안 들릴 수 없는 그 가게로 들어갔다. 하루도 아니고 한 시간에 몇 천개의 나타가 팔린다는 곳이어서 그런지 명성에 걸맞게 회전율이 대단히도 빨랐다. 음, 딱 우리가 좋아하는 스피드야. 우린 줄을 서자마자 가게 안으로 들어서 창구에서 빠른 주문을 할 수 있었다. 6개 들이를 사고 슈가파우더, 시나몬 파우더를 한 팩씩 받았다. 육각형 모양의 상자에 반듯하게 들어간 에그 타르트를 바로 앞 공원에서 한 입씩 먹었다. 이때 쯤에는 택집을 나선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내리쬐는 햇볕과 높은 기온으로 다소 체력이 많이 깎인 상태였다. 에그 타르트의 달큰한 맛으로 훅 꺾여버린 사기를 달래줄 뿐이었다.

공원을 가로질러 반대편에 있는 MAAT으로 향했다. 이 곳은 Museum of Art, Architecture, and Technology의 준말로 리스본의 미술, 건축과 기술을 한 곳에 집약해 볼 수 있는 곳이다. 미술 작품에 큰 관심이 없어도 이 곳을 들리는 게 좋은 이유는 강변을 바라보는 훌륭한 조망권과 파도를 연상시키는 웅장한 박물관 외관에 있다. 높고 낮음이 뚜렷한 지형을 이용하여 박물관은 강변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를 박물관의 옥상에 설치했는데 유려한 곡선으로 이루어져 마치 바다에서 박차 오른 고래의 등을 닮았다. 게다가 박물관 본관 자체가 곡선을 많이 활용하여 건축물을 구성하는 공간들이 서로 매끄럽게 연결되어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리스본을 여행한다는 친구들에게는 내부에서 관람 할 수 있는 설치 미술이나 다양한 주제로 이루어지는 전시를 꼭 둘러 보지는 않더라도 벨렝 지구까지 나왔으면 꼭 이 박물관의 전망대에 올라가 드넓은 바다가 집어삼키는 지는 석양을 보는 것을 추천하고는 했다. 그래서 우리의 계획 또한 마찬가지였다. 박물관을 둘러본 뒤, 걸어서 강변 아래로 내려가 탐험 기념비 탑과 벨렝 탑까지 보는 것, 그리고 그 곳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즐기며 바다와 강 사이로 떨어지는 해를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MAAT에서 내 계획은 무너지고야 말았다. 내가 결국 리스본 불볕 더위에 쓰러지고야 만 것이다.

“일단 나가서 뭐라도 마시자.“

티켓 값을 다 지불하고 들어왔는데 도저히 걸을 힘이 안 났다. 몸에서 수분이란 수분은 다 증발하고, 힘이란 힘은 모조리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이런 걸 탈진했다고 표현할 수 있는 걸까. 아침부터 한국 뉴스를 읽다가 더위와 사투를 벌이는 잼버리 대원, 미흡한 정부의 대처, 질타 받는 주최자, 하나씩 철수하는 각 국 정부에 대한 기사에 대해 얘기하던 참이었다. 그렇지만 리스본 벨렝 지구에 표류해버린 나는 잼버리 대원과 다름 없는 상태였다. 전시회 입구에 놓인 의자에 30분 동안 엄마랑 같이 앉아 있었다. 손가락 하나 들 힘이 없었다. 그러다 전시회를 끝내 포기하고 박물관과 연결된 카페테리아에 앉아 물 한 병과 샐러드를 시켰다. 어떻게든 잃어버린 수분을 다시 채워 넣어야 했다. 입맛도 없고, 힘도 없는데 치킨 샐러드가 나오니 한 입씩 또 들어가는 건 신기했다. 얼마간 더 앉아 있으니 전시를 다 둘러본 언니가 나와서 샴페인 한 잔과 세비체 한 접시를 시킨다. 언니는 전시회가 아주 만족스러웠다며 활기 가득 찬 얼굴이었다.

“뭐야, 너 언제 이렇게 잼버리가 다 됐어?“

“재밌냐.“

처참한 몰골에 언니가 놀라 물었다.

“얘 이래 가지고는 더 있으면 안 될 것 같은데. 너 오늘은 일단 먼저 집에 가서 쉬어. 몸도 안 좋은데 괜히 버티다가 탈 난다.“

“뭐임, 잼버리 대원 철수?“

또 세비체가 나오니까 싱싱한 맛에 꿀떡꿀떡 넘어가기는 했다. 하긴, 나한테 진정으로 필요한 건 더 이상의 관광이 아닌 휴식, 그보다도 진한 요양이었다. 다음 날에도 이어질 여행을 위해 급속 충전이 절실했다. 그래서 난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를 택하기로 한다.

“그럼 발견기념비 탑이랑 벨렝 탑 잘 보고 와. 운치 있게 석양도 즐기고.“

“안전 철수해라.“

“집 가면 연락하고.“

그렇게 난 터덜터덜 걸어 박물관 뒤 거리에서 우버를 잡아 집으로 그대로 실려 왔다. 샤워를 하고 물 한 병을 들이키니까 좀 살 것 같았다. 그대로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켰다. 여행 2일차를 이렇게 마무리한 것에 대해서 아쉬움은 전혀 없었다.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걸 몸소 겪으니 벨렝 탑 너머로 이어지는 테주강의 황홀한 전경보다 내 침대 밖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더 감사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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