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해린 Aug 15. 2023

그 해 여름, 포르투갈 07 라고스의 여름 -상-

그 해 여름, 포르투갈 07 라고스의 여름 -상-


<여행 준비>

대개 여행은 어느 정도의 계획과 일정 수준의 계산을 한 뒤 추진된다. 하지만 때로는 갑작스럽 시작되고 서서히 마치는 여행도 있다. 리스본에 온 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 해변을 가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들었다. 점점 더워지는 볕과 오랜 시간 보아온 도심의 풍경으로부터의 전환이 필요했다. 정반대 모습으로의 전환. 시원하다 못해 골이 울리는 포르투갈의 해변과 좁지만 길게 이어져 한 눈에 시작과 끝을 담을 수조차 없는 모래사장을 떠올려 보았다. 부서지는 포말 속에서 헤엄치고 싶고, 맨 발에 느끼는 모래사장의 까끌거림과 파도의 간질거림을 느끼고 싶고, 짙은 푸른빛 바다 밑으로 잠수하고 싶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욕구를 리스본의 높은 전망대에서부터 바라보는 풍경과 시원한 화이트 와인을 곁들인 해산물 요리로 대체할 수 없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서자 결심했다. 남부로 향하자는 결심이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라는 격려와 칭찬을 가장 먼저 해준 건 집주인이었다. 카톨릭 청년 대회로 리스본이 들썩이는 동안 집을 비우는 게 더 평화로울 수 있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그동안 차를 렌트하겠다고 이메일과 왓츠앱으로 날린 주차 문의에도 집주인 그녀, 헬레나의 주장은 일관되었다. 이 주간에 차를 빌리는 건 아주 나쁜 아이디어라고. 리스본 사람들도 외곽으로 빠지거나 일부러 이 주간을 여름 바캉스 기간으로 잡아 다른 도시나 나라로 가는 인구도 많은데 차를 빌린다니, 얘는 무슨 소리를 하는거니. 정확히 이런 표현을 쓰지는 않았지만 대화하거나 메시지할 때 던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나무람 한 스푼과 걱정 열 스푼이 섞여 있었다. 바다 건너 포르투갈 아주머니 헬레나에게서 우리 어머니의 잔소리 소울을 느끼니 차를 렌트하겠다는 굳었던 의지는 잠시 꺾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랬던 내가 갑자기 저 떠납니다, 남부로 가요, 그러니까 집 비우는 동안 절 찾지 마세요, 하고 태세 전환을 하니 오히려 좋다는 반응을 보이는 건 자연스러웠다. 실제로 신문과 잡지에서는 리스본 엑소더스라는 표현을 쓰고 있었다. 리스본 밖에서 몰려드는 인파를 피해 리스본 도심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도리어 방문할 필그림에게 집을 세주거나 렌트로 돌리고 본인들은 여름 휴양이나 친척집 방문을 하며 바깥으로의 도피를 택하는 것이다. 우리도 그 길을 따르기로 했다. 나름의 호기심을 채우고자 행사의 첫 날, 교황이 직접 연설을 하는 행사를 슬쩍 보고선 말이다. 리스본 밖으로, 남부로. 더 뜨거운 태양과 바닷길이 있는 곳으로.


<여행 1일차>

포르투갈은 세로로 길게 뻗은 나라고, 그 중 한 면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여름철이면 몇 달음에 바로 바다의 짠 맛을 볼 수 있다. 포르투갈 최남단에서부터 해안가를 따라 북부로 올라가는 길에 자리잡은 해변 이곳저곳을 점 찍어 가며 며칠씩 묵으며 여정을 떠나는 현지인이나 배낭 여행객도 많다고 들었다. 서핑이나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을 위한 일종의 맞춤형 여름맛 올레길인 셈이다. 내가 향하는 목적지는 라고스. 그 중 라고스는 포르티마오, 알가르브와 함께 포르투갈 최남단에 자리잡은 대표적인 여름 휴양지 중 하나다. 라고스를 선택한 이유는 정말이지 아주 사소하고 시시하다. 도시의 규모는 작고 마을은 아담하며 해변을 가는 것말고는 별 다른 볼거리가 없는 심심한 해안가 도시여서. 하지만 해변의 심심함은 도심 속 지루함과 상이하며, 모래 사장에 누워 햇볕을 쏘이며 겪는 권태는 도시에서의 그것과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인다.

도심 속 도처에 도사리는 불편함은 자연이 제공하는 드넓은 바다 속 고독함이 해소해준다. 직장 생활이 던지는 예측불허성은 자연이 던지는 낮과 밤 그 사이 덩그러니 떠있는 시간 속에 소멸한다. 꽉 찬 도시인의 시간대별 스케줄은 휴양지 속 백색 소음과 일출과 일몰 사이에 놓인 기나긴 공백으로 대체된다. 그 공백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여백으로, 빈 칸으로 남겨두면 그만이다. 어차피 직장인으로써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멀티태스킹 능력은 휴양지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바다에선 오로지 한 번에 하나씩만 하면 된다. 조용히 호흡하는 것. 부력을 온 몸으로 느끼며 떠있는 것. 바다에 떠밀리지 않게 모래 바닥에 맨발을 파묻는 것. 너무나 자질구레하며 비생산적인 것들이다. 무언가를 생산해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는 순간 자유를 맛볼 수 있다. 그 자유는 누군가에게는 바닷물의 짭쪼름한 맛일수도, 다른 사람에게는 선착장 앞 바에서 내놓는 시그니쳐 칵테일의 달콤함일수도 있다. 도심지에서 괄시할만한 비생산성과 아무런 소득 없는 권태로움은 휴양지에서만 누릴 수 있는 진귀한 호사로움이다.

우버를 타고 5분만에 숙소로 도착했다. 동네가 좁아서 그런지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지 10분 안에 우버를 잡고 도착해 빌라 게이트까지 다다랐다. 에어비엔비 주인은 빌라 내 수영장을 어떻게 이용하고, 근처 해변이 어디가 있으며, 어떤 레저 활동을 할 수 있는지 열심히 설명해주셨다. 물론 나는 포어를 못하기 때문에 그저 열심히 경청하는 제스쳐만 취해 주었다. 대충 친구가 알아듣고 알짜배기만 걸러 통역해주겠지 싶어 시선을 수영장으로 돌렸다. 아싸, 단지내 수영장. 해는 머리 위에서 내리쬐고 있었고 당장이라도 수영장에 뛰어들고 싶었다. 풀밭으로 둘러싸인 수영장 안에서 물이 첨벙거리는 소리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호스트가 키를 쥐어주며 좋은 휴양을 보내라고 했고, 친구와 나는 각자 짐을 풀었다. 둘러 보니 냉장고 안에는 웰컴 선물이라고 에어비엔비 호스트가 준비한 화이트 와인이 놓여져 있었다. 고객의 니즈를 아시는 호스트, 최고의 호스트 그 자체십니다, 코르크 따개로 열어 한 잔을 홀짝였다. 아, 목구멍에서 퐁퐁 일어나는 탄산감이 느껴지는 달콤쌉싸름한 이 맛, 라고스의 여름 맛이다.

이전 06화 그 해 여름, 포르투갈 06 교황의 인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