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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린 Aug 18. 2023

그 해 여름, 포르투갈 08 라고스의 여름 -하-

<여행 3일차>

아점은 만들어 먹기로 한다. 미리 장봐둔 재료를 손질하는 동안 벗어둔 수영복은 바깥 테이블 의자에 걸쳐져 마르고 있다. 수영복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다. 양파를 자르고 마늘을 다듬는다. 양파의 아삭함을 포기할 수 없어 한 개나 잘라 넣지만 결국 그걸 모조리 해치우는 건 나다. 친구는 양파의 매운 맛을 못 견뎌 한다. 그래도 난 꿋꿋이 눈물까지 훔쳐가며 양파를 마저 자른다. 파스타에 소스를 탈탈 털어넣어 범벅으로 만든다. 친구는 요리를 쉽게 하는 편이라 엉성하게 손질된 날 것의 재료를 눈 깜짝할 새 그럴듯한 요리로 만들어 내고는 한다. 그리하여 점심이 완성된다. 우리는 테이블에 포크와 접시를 두고 냄비 채로 가져나와 만찬을 즐긴다. 화이트 와인을 곁들인다. 가히 환상적이다.

바다에 들어간다. 똑같은 골목 길을 따라, 항구를 지나, 꽃덤불이 드리워진 담벼락의 그늘 아래를 밟으며 바다로 향한다. 라고스가 품은 바다는 영롱한 에메랄드 빛도 녹빛의 산호초를 발견할 수 없다. 짙은 푸른색이 조금 더 진해져가고 깊어져 가는 것을 눈쌀을 찌푸려 겨우 확인할 정도다. 찬 물에 발 끝부터 야금야금 적신다. 나처럼 천천히 고통스럽게 차가운 수온에 익숙해져가는 타입이 있는가 반면 정반대로 냅다 물 속으로 뛰어드는 용맹한 자들도 있다. 옆에서 비치볼을 주고 받던 소년 무리. 그들은 내가 이것 따위에 벌벌 떨 자제로 보이느냐면서 거침 없이 물 속으로 머리부터 넣고 수면 아래서 몇 번 발을 차고 구른 뒤 한 숨이 끝날 때쯤에야 물방울을 튀기며 물 위로 뜬다. 잔뜩 적셔져 있는 머리칼, 그을린 어깨, 뺨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 조금 멋없게 했든 또는 맹렬한 기세로 했든 간에 입수가 끝나면 모든 움직임과 호흡은 무정형이다. 헤엄치기, 떠다니기, 잠수하기. 원하는대로 해라, 바다는 아무런 관여도 않는다. 어차피 멀리서 보면 푸른 붓이 지나간 자락일 뿐이다.

오후 6시에 가까워질 무렵이다. 우린 상대적으로 아주 이른 저녁을 먹는다. 8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저녁다운 풍경이 완성되는 이 곳에서 난 고집스럽게 11시의 아점과 5시의 점저로 하나의 균형잡힌 식사 사이클을 만든다. 오늘은 특별하게 라고스에서의 마지막 저녁이라고 선착장 앞 레스토랑을 찾았다. 농어 요리와 문어 샐러드를 시켰다. 문어는 채소 위에 단호박 퓨레와 소스에 버무려져 플레이팅 되었고, 잘 구워진 농어 곁에는 샐러드와 알감자가 올리브 오일에 적셔져 접시 위에 가지런하게 올려져 있다. 화이트 와인을 곁들인다. 어디서 들어 먹은 건 있어 갖고 해산물 요리에는 화이트 와인이 어울린다는데, 하면서 글라스를 주문했다. 와인은 웨이터의 손에 기울여져 잔의 반을 채운다. 역시 포르투갈 인심은 후하기 그지 없다.


<여행 4일차>

에어비엔비 호스트에게 양해를 구했다. 버스 시간이 오후여서 그러니 추가 요금을 지불하고 몇 시간더 머물러도 되겠냐고. 호스트는 요금에 대해선 일절 언급도 없이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심지어 몇 시까지 나가야 하는지 말도 없이 대충 이 때쯤 내가 갈 거니 그리 알고는 있어라, 하는 해석의 여지가 광범위한 답장이 와서 조금 고민을 하기는 했다. 이쯤되니 일반화의 위험이 있지만 이 쪽 동네 사람들은 규칙이나 약속을 세세하게 하는 걸 선호하는 편은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어차피 어디에 있든 약속 시간 플러스 마이너스 30분 규칙을 고수하는 편이어서 이런 자유분방함과 방임 사이에 걸쳐진 이 쪽 동네의 시간 개념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물론 수리를 해준다고 첫 날부터 큰 소리를 쳤으면서 리스본 집에 화장실 수납장이 2주가 다 돼도록 아직까지 부러진 채로 남아 있다는 건 생각 할수록 조금 어이가 없지만 말이다. 이런 왜곡된 시간 개념이 라고스에선 오히려 다행이었다. 덕분에 정규 체크아웃 시간 이후로도 총 3시간을 더 벌 수 있었다.

친구에게 다이빙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난 수영을 사랑해 마지 않는 한국산 물개인데 다이빙과 접영은 도저히 할 수가 없다. 다이빙은 물리적 공포심으로, 접영은 부족한 체력으로 인해서다. 접영은 전문 강습을 받아야 겨우 할 수 있다 쳐도, 다이빙은 왠지 모르게 욕심이 났다. 친구가 옆에서 조금만 코칭을 해주면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얼추 모양새는 흉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게다가 날 자극시킨 건 첨벙첨벙 물 속으로 잘도 뛰어드는 빌라 이웃들이었다. 유연한 포물선을 그리며 수영장에 뛰어 드는 자태가 얼마나 멋져보였든지, 나는 잽싸게 친구가 누워 있는 선베드를 발로 밀며 얼른 내 보조를 해달라 간청한다.

수영을 다하고 나니 진이 빠진다. 무릎 위에 멍도 생겼으니 누가 보면 라고스에 전지 훈련을 다녀온 줄 알것이다. 짐을 챙겨 지난 4일간 묵었던 빌라를 빠져나온다. 내내 수영복 차림과 가벼운 원피스 차림으로 오갔던 길을 무거운 배낭과 운동화 차림으로 나서니 왠지 묘하다. 이 곳의 여름은 영영 멈추어 있는 것만 같은데 나만 혼자 살짝 비껴 나가 서 있는 기분이다. 서운하다. 피자로 마음을 달래 주어야지, 빌라 맞은 편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단돈 12유로, 화덕 피자, 풍성하게 올려진 루꼴라, 진득하니 녹아 있는 치즈, 바삭하고 촉촉한 도우. 일품 요리다. 수영복 가지들로 툭 튀어나온 배낭 모양대로 배가 불러 나온다. 앞 뒤로 어지간히 불룩해진채 우버를 불러 버스 정류장으로 간다. 기가 막히게 아담한 동네라 그런지 5분도 안된 것 같은데 버스 정류장이다. 괜히 하나 하나가 아쉬울 때는 왜 이렇게 모든 게 빨리 흘러가는건지 모른다.

돌아오는 버스 길에서는 내내 잠을 청했다. 리스본 도심으로 들어오는 긴 대교를 건널 때 웅성대는 사람들의 소란이 들렸다. 주변 사람들이 다들 카메라를 들고 창문 밖 전경을 사진으로 찍고 있었다. 강가 풍경을 한 두 번 본 사람들이 아닐텐데 뭐가 그렇게 특별해 보이는 건가 의아한 찰나에 다시 한 번 살펴보니 강가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멀리서 보았을 때 오히려 검은 장막으로 비쳐 졌던 게 사실은 군중이 빈틈없이 빼곡하게 모인 모습이었다. 교황이 연설하고 있는 자리였다. 버스가 다리를 달리고 있을 때가 대략 7시쯤이니 교황을 기다리고 있는 군중의 크기가 압도적으로 많아질 시간이었다. 집으로 오자마자 유튜브 생중계 영상으로 교황의 연설을 들었다. 순전한 호기심이었다. 교황은 다른 사람의 조아리는 머리를 볼 때는 오로지 당신이 넘어진 자를 일으키려고 손을 내밀 때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내 자신이 힘에 부쳐 쓰러질지언정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다시금 힘을 끌어 모아 일어서는 것, 걷는 것, 계속 나아가는 것임을 당부했다. 밤이 깊었다. 침대에 누워 얇은 이불을 덮고 눈을 붙였다. 침대 매트리스는 단단하지 않고 스프링이 약해 조금 뒤척이면 한 곳이 움푹 꺼진다. 작게 열어둔 창문 새로 들이 치는 바람 소리에 밀려드는 파도 소리가 겹친다. 매트리스가 작게 내려 앉을 때마다 파도에 실려 부유하며 잠겼다 드러나던 까무잡잡한 팔 다리는 하얀 시트에 반쯤 가려져 있다. 리스본 언덕배기 진 작은 방의 문 틈 새로 드넓은 라고스의 바다가 밀려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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