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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린 Sep 20. 2023

그 해 여름, 포르투갈 15 리스본과 해변의 상관 관계

그 해 여름, 포르투갈 15 리스본과 해변의 상관 관계

리스본은 축복 받은 땅이다. 아, 정정하겠다. 적어도 여름의 리스본은 그렇다. 축축하고 안개가 서려 늘 눈 앞에 미스트가 뿌려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겨울이 아닌 작열하는 태양 아래 한 점의 그늘막을 찾아 헤매는 여름은 가장 본질적인 의미로 여름답다. 리스본 여름의 공기는 반나절이면 건조대에 널어 놓은 옷이 마르고, 여름의 하늘은 9시가 넘어서도 빛이 남아 있어 주황빛과 적색의 층으로 가른다. 여름의 사람들은 바깥 테라스에 앉아 늦은 시간까지 저녁의 여백을 와인과 이야기로 채운다. 여름의 옷장에는 짧은 바지와 끈나시, 형형색색의 수영복이 한데 뭉쳐 있다. 그 중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리스본의 여름은 해변에서 펼쳐진다.


포르투갈로 오기 전, 수영복을 5벌을 샀다. 연간 옷을 구매하는 비중이 가계부에서 10프로도 차지하는 내게는 아주 큰 파이를 잡아 먹는 셈이다. 베이지색, 녹색, 짙은 푸른색, 물결 무늬, 꼬임이나 끈이 있는 것들, 비키니, 원피스. 모양도 색도 가지각색으로 샀다. 원래 있는 수영복까지 수영복 전용 가방에 담으니 도합 10벌은 된 것 같다. 라고스에서 몇 벌은 물에 적셨지만 아직 다 입으려면 한참 남을 정도였다. 나머지는 리스본 근교 해변을 갈 때 입으려고 마음을 먹고 있던 참이었다.

카르카벨로스의 해무를 본 바로 다음 날, 리스본 외곽 지역에는 변덕스럽게도 곧 바로 해가 떴다. 더 정확히는 해가 뜨다 못해 34도에 육박해 땅을 데우기 시작했다는 날씨 예보를 확인했다. 딱 바다에 몸을 내던지기 좋은 날이리라 결론을 내렸고, 이번에는 언니까지 함께 해변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목적지는 카를카벨로스 해변에 가는 길을 따라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자리한 카스카이스 해변이었다.

***


카스카이스 해변은 카르카벨로스 해변에서 10여분 정도를 더 들어가면 도착하는 곳이다. 마찬가지로 우린 택시를 잡아 공영 주차장에서 내렸다. 리스본 시외 지역을 다닐 때는 렌트카를 빌려서 다니는 게 우리의 초기 계획이었고, 그러려고 미리 리스본 숙소 주변에 주차장도 한 칸 빌려놨었다. 다만 렌트카 업체와 예약 수정을 하려다 취소가 됐고, 다시 예약 하려니 이미 기존 차량 모델이 나갔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뚜벅이 생활을 연장하기로 했었다. 우리 중 유일하게 유효한 운전 경험을 갖고 있는 엄마는 우리가 근교 도시로 나갈 때마다 차를 안 빌리길 잘했다고 하셨다. 그 이유는 아마 난이도가 극악인 도심 뿐만 아니라 외곽도로에서도 굉음을 내며 달리는 유러피언의 드라이버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약은 약사에게, 운전은 우버 기사에게,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이 곳은 겉으로는 순해 보여도 까보면 사실 어느 것하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포르투갈이니까 말이다.

우린 도착하자마자 마시고 하루를 시작하자고 해안가 노천 카페에서 와인과 커피를 시켰다. 후루룩 다 털고 나와서야 기력이 생겨 짐을 들고 모래사장으로 움직였다. 해변의 모래는 뜨끈뜨끈했다. 12시 조금 안돼서 도착했는데 중천에 달려있는 해가 벌써 모래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맨발에 닿는 모래의 입자는 너무나 작고 고와서 발가락 사이로 흔적도 없이 빠져나갔다. 처음에는 썬베드가 있는 곳에서 베드를 몇 개 빌리려고 했는데 이미 모든 베드가 다 예약이 된 상태였다. 하는 수 없이 모래사장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야 할 판이었다. 그 때 소리도 없이 다가온 사막 여우 같은 잡상인이 있었으니,

“투웬티 유로, 투웬티 유로.”

땡볕에 돗자리만 덜렁 깔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긴 했다. 그렇다고 파라솔 하나 꽂는다고 뭐가 달라지려나. 무엇보다도 잡상인의 집요하게 따라붙는 집념이 오히려 구매 욕구를 깎아 내렸다. 정말 사기 싫어지잖아요, 이러시면.

“저희 15유로 밖에 없어요. 현금이 별로 없어요.”

“노 프라블럼. 에이티엠 머신, 오버 데얼.“

“근데 15유로는 안 돼요?”

“노오- 투웬티.”

“이거 밖에 없는데 진짜로.”

꼬깃꼬깃하게 접혀진 지폐와 크기가 다 다른 동전들이 모아져 겨우 만들어진 15유로. 아저씨는 각고의 고민 끝에 모래를 파서 쇠막대기를 비장하게 내리 꽂는다.

본격적으로 뙤약볕이 내리쬐는 오후가 되어서야 오늘은 도저히 땡볕에 한가하게 앉아 있기나 할 날씨는 아니었다는 걸 점점 깨닫게 된다. 냅다 깎아서 땅바닥에 메다 꽂은 조금은 낡은 파라솔이 아니었다면 피부는 진작 벌겋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우리 세 모녀는 각개전투를 벌였다. 엄마는 애초에 수영복을 가져오지도 않아 모래사장에서 돗자리를 펼쳐 한량처럼 누워있었고, 반면에 나는 모래사장과 해변을 오가며 뛰어다니기 바빴다. 담금질 하듯 모래사장에 누워 있다가 덥고 땀이 나기 시작하면 다시 바다로 들어가 몸을 식혔다. 행위 예술마냥 해당 시퀀스를 너댓번 반복했지만 바닷물이 심각하게 차가워 오래 있으려고 하면 무조건 필사적으로 수영해서 심박수를 올려야 할 지경이었다. 저조한 체력을 끌어 모아 바다 수영에 전념했다. 와중에 언니는 패들보드를 빌려 먼 바다로 나갔는데 보드의 끄트머리도 안 보이는 걸 보니 오늘도 표류 엔딩을 맞이할 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엄마와 했다. 이미 그에게는 부산 앞바다에서 표류해 보드샵 직원이 출동해 연행했던 전적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후에 들어보니 이번에도 샵 직원이 보트와 가까워지려는 언니의 패들보드를 망원경으로 보고는 구조에 나섰다고 했다. 왜 만리타국에서까지 이 인간은 주책인지, 원.

***


저녁은 집으로 다시 돌아와 씻은 다음에 미리 예약해둔 레스토랑으로 갔다. 질 좋은 육류가 워낙저렴한 곳이기에 떠나기 전 꼭 스테이크 전문점을 들려야 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차에 숙소와도 거리가 멀지 않은 곳에 레스토랑이 있어 바로 예약을 해두었었다. 구글 지도에는 도보 15분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올라가보도 한참을 올라가야 하는 곳이었어서 어떻게 한 달을 가까이 지냈는데도 내리 속을 수가 있냐며 분개를 터트렸다. 그렇게 15분의 오르막길을 가열차게 걷고 도착한 곳은 수풀이 우거진 곳에 자리한 레스토랑이었다. 이 정도 전망이면 그만큼 다리 빠지게 걸은 게 아깝지는 않겠네, 속으로 되뇌었다.

역시나 와인을 한 잔씩 시키고, 대충 어느 부위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메뉴판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신중히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메뉴를 주문했다. 스테이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미디움 레어로. 우린 식사를 즐기며 여태까지의 여행을 반추했다. 남은 시간은 3일. 활동을 온전하게 즐길 수 있는 건 사실상 내일이 유일한 마지막 날일 것이다. 그 다음에는 짐 싼다, 아침 비행기라 일찍 잔다, 여타의 이유로 눈 깜빡할 새면 갈 시간이었다. 엄마와 언니는 2주 가까이를, 나는 이미 3주 넘게 리스본에서 지낸 참이어서 돌아볼 거리는 많았다. 인천 공항에서 출국길에 오른 것부터 여행지 하나하나에서 보고 들은 것과 숙소에서 겪은 터무니 없이 웃긴 일, 시덥잖은 수다 거리들. 모두 거창할 거 하나 없이 소소하게 흘러간 일상이었건만 되돌아보니 어느새 추억이 되어 층층이 쌓여 있었다. 아직 저녁 식사를 한창 먹는 중인데도 남아 있는 햇살은 잎새 사이를 지나 테이블 위와 자갈 길바닥에 길게 깔렸다. 9시에 가까워질 때까지 해가 남아있는 포르투갈의 여름은 역시나 환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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