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여름, 포르투갈 14 카르카벨로스 해변의 해무
리스본은 차로 30-40분 내로 갈 수 있는 해변만 해도 두 손 두 발을 다 써야 할 정도로 많다. 리스본의 한 쪽 면이 바로 바다에 인접해 있다는 걸 떠올리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인데 바다로 나갈 때마다 광활한 대서양이 바로 코 앞에 있었다는 사실이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다. 그만큼 바다에 가깝기 때문에 여름 기온이 높아도 그늘막에서는 서늘한 바람이 불게 된다. 대신, 겨울에는 해풍으로 축축하고 안개가 서린 도시 풍경을 보게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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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계획은 이랬다. 첫째날, 차를 렌트해 카스카이스를 가고 다음 날, 에리세이라와 마지막으로 신트라를 방문하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계획이 무너지지 않으면 그것은 계획이 아니다. 포르토에서 도착하자마자 피로에 지쳐 나가 떨어진 날 두고 엄마와 언니는 당일치기로 신트라를 다녀오는 기염을 토했다. 다음 날은 날씨가 흐리다고 떠 해변을 가야하나 고민하던 차였다. 하지만 엄마가 ”여기 있을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해변이나 갈까?“라는 말에 리스본 근교 해변 여정을 시작했다.
일자는 8월 19일, 토요일. 섭씨 28도. 날씨 흐림. 언니는 공원에 간다고 하고, 엄마와 나는 돗자리와 가방을 챙겨 우버를 잡았다. 목적지는 카르카벨로스. 리스본 도심지에서 차량으로 약 30분-40분 가량 떨어진 곳이다. 카르카벨로스는 모래사장이 길고, 기차로도 갈 수 있기 때문에 편한 접근성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해변이기도 하다. 우버는 뚫린 길을 달려 30분도 채 안 되어 우릴 해변가 앞 주차장에 내려 주었다. 그나마 점점 구름이 걷혀 맑아지던 리스본과 다르게 이 곳은 안개가 잔뜩 끼어 앞이 뿌옇다. 뜨거운 국그릇에서 폴폴 날법한 연기가 사방을 감싸고 있다. 아무리 바닷가 근처여도 그렇지, 평범하게 흐린 리스본에서 조금 벗어났다고 안개로 모든게 휩싸인 풍경을 볼 수 있다니 반대편 세상에 떨어진 느낌이다. 엄마와 나는 모래사장 옆 레스토랑에서 토스트와 마실 거리를주문한다. 엄마는 따뜻한 라떼, 나는 화이트 와인 한 잔.
주문한 치즈 토스트가 나왔다. 제법 큰 사이즈에 하나만 시켜 먹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반쪽을 갈라 사이좋게 나누어 먹는다. 화이트 와인은 쌉싸름한 맛을 혀 끝에 남기고 목구멍을 잘도 타고 넘어간다. 이쯤에서 고개만 살짝 돌려 바다를 봐줘야-
“지구종말의 날이다.”
“근데 저기 둥둥 떠있는 건 사람 아냐?”
“그럴리가. 배 같은데.”
도대체가 저 걷히지도 않을 것만 같은 하얀 장막 뒤에 뭐가 있는지 점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영화 미스트에서 도시를 뒤덮은 잿빛 안개처럼 카르카벨로스 해변은 자욱한 연기 자락이 휘감아 저 앞에 있는 것이 사람인지, 배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정말이지 한 치 앞도 안 보인다는 말은 이 날만을 위해 만들어진 표현 같았다. 더 재밌는 건 이 광경 자체가 익숙치 않아 바다에 와서 바다를 보지 못하는 경험 자체가 신났다는 점이다.
우린 식사를 마치자마자 모래 사장을 걸었다. 햇볕을 쬐지 않아 모래는 서늘했다. 고운 모래 입자는 발바닥 밑에서 밟는 모양 대로 푹푹 꺼졌다. 얼마를 지나야 바다가 나올까 싶을 쯤에 난데없는 곳에서 철썩이는 소리와 함께 바다의 끝자락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걸은 거리는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앞이 잘 보이지 않다보니 어디까지 걸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 뿐, 바다는 의외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렇게 홀연히 나타난 바다는 불투명 빛을 띠고 투박한 소리를 내며 언제나 그랬다는듯이 모래사장을 적셨다.
궃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해변가를 따라 사람들이 점점이 앉아 있거나 자리를 깔고 누워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심지어 설마 이 날씨에 바다에 수영하러 사람들이 들어갔을까 싶어 고기잡이 배로 확신하고 있었던 까만 점들마저 용감하게 입수한 사람들이라는 깨달음은 일종의 감탄마저 자아냈다. 과연 저 분들은 어떤 불굴의 정신력으로 이 날씨와 추운 파도를 뚫고 입수를 결심하신 걸까, 하는 순수한 호기심도 연이어 일었다. 해변가 근처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돗자리를 피고 누워 책을 읽거나 멍하니 바다를 보고 있었다. 파도가 적신 자리를 따라 해변을 걷는 사람들도 제법 됐다. 퉁명스러운 안개 속에서도 사람들은 제각기 느린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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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난 자리를 피고 잠시 앉아 있다 엄마는 잠깐 주변을 걷겠다며 일어섰고, 난 그자리에서 등을 대고 누워 잠에 곯아 떨어졌다. 미적지근한 온도와 희끄무레한 시야 속에 얼마간 있으니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 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엄마가 돌아왔을 때도 난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눈을 떴다.
“안개 때문에 앞이 안 보여서 길 잃을 뻔 했어.”
“국제 미아 될 뻔 했네?”
“여기쯤 왔으면 돗자리가 보여야 되는데 가도 가도 안 나오길래 또 지나 쳤나 싶어서 순간 당황했다니까? 세상에, 진풍경이다.”
그럴만도 한게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안개는 더 짙게 깔리고 있었다. 우린 이만 집으로 향하자고 했다. 저녁은 리스본으로 돌아가 먹고 싶었다. 또 다른 이유는 하늘이 뿌옇게 드리워져 썬크림을 안 발라도 된다고 큰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긴 시간을 누워 있었던 것도 아닌데 나시를 입어 맨살이었던 어깨죽지와 가슴팍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리스본 도심에 가까워질수록 베일을 한 꺼풀씩 벗기듯 모든 게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흑연으로 거뭇하게 칠한 자국을 지우개로 지울 때 그려지는 잿빛의 길로 잠깐 빠졌다가 다시 하얀 도화지 위로 밀려나온 듯 했다. 엄마 말대로 우린 짧은 반나절동안 진풍경을 보았다. 해무가 잔뜩 서린 카르카벨로스 해변은 언제까지나 한꺼풀의 연기가 서려 있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