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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녘에는 꽃내음이 깔려있다

스페인 유랑단 03

by 이해린

1일차 아비뇽 역에서

바르셀로나 산츠역에서 기차에 탑승해 세시간 반을 달려야 한다. 도착지는 프랑스 아비뇽. 국경을 넘는 기차여서 흥미로운 점은 긴 터널 하나를 지나니 스페인에서 프랑스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스페인 철도청인 renfe와 프랑스 SNCF가 공동 운영하니 가는 여정은 프랑스 철도청 직원들이 검표를 하고, 반대로 오는 여정은 스페인 철도청 직원들이 함께 탑승한다.


아비뇽 역에서 렌터카를 찾아 우린 바로 아를로 내려가야 한다. 유럽에서 렌트를 하는 건 처음이어서 먼저 아빠에게 운전대를 맡겼다. 출발 시각은 9시 반, 지금은 볕이 남아있지만 곧 어둠이 떨어질거다. 초행길이어서 헤맬 것도 감안하면 얼른 출발을 서둘러야 한다.


가는 길은 역시나 녹록치 않았다. 구글 지도로는 30분이면 도착한다는데 네비게이션 연동에 실패해 보조석에 앉은 내가 운전자에게 일일이 방향을 지시해야 했고, 끝도 없이 나오는 회전 교차로에서 빠져나가는 방향을 잡는 건 꽤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헤매고 돌다 보니 족히 한 시간여를 달려야 했다. 에어 비엔비에 도착하니 깜깜한 밤이었다. 짐을 풀고 씻자마자 잠에 들었다. 잠에 들었다기보다는 정신을 잃었다는 표현이 더 걸맞겠다.

2일차 고흐가 바라 본 아를

낮의 아를은 딴 판이었다. 포도 넝쿨이 주렁주렁 달린 정원, 파란 나무 덧문과 대문, 하얀 외벽과 붉은 슬레이트 지붕. 잔디밭과 담장 너머로는 좁은 골목길과 주택 집이 줄 지어 서있다. 남부 프랑스의 시골 전경은 바람결에 흔들리는 밀밭 보다도 잔잔하고 평온했다.


우린 아를에서 고흐의 자취를 쫓는다. 고흐가 1888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아를에 머물며 남겼던 그림은 200여 점,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머릿 속으로 절로 그려지는 작품들이 이 곳 아를에서 고작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그려진 셈이다.


포룸 광장의 ‘밤의 까페’를 그렸을 때 고흐는 어떤 카페 테라스에 앉아 있었을까. 까맣게 밤이 내려앉은 론 강을 내다보며 그렸을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에’. 화병에 탐스런 몇 송이의 꽃을 담아 그린 ‘해바라기’에는 샛노랗게 펼쳐진 해바라기 밭을 읽어낼 수 있다. 마음의 상처를 입고도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잃지 않고 완성한 ‘아를 병원의 정원‘. 아를 시내를 가로세로 지르며 오간 곳들에는 모두 고흐의 숨결이 스며 있었다. 고흐가 붓으로 담아 내고자 한 색채와 빛깔은 내가 지금 보는 풍경의 색과 같을까. 고흐가 한 폭의 화폭을 채우며 불어 넣고자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3일차 발랑솔의 보랏빛 라벤더 밭, 베르동 협곡의 새파란 여름

우린 아침 일찍 한 솥밥을 만들어 먹고, 렌터카를 타고 엑상프로방스로 이동한다. 엑상 프로방스로 가는 길은 잘 닦인 고속도로, 모두들 나보다 최소 두 배의 속도로 달리는 것만 같다. 아빠는 옆에서 “전에 프랑스 살 때는 다들 180은 밟았는데 이제 좀 양반이 됐네.” 라고 하시며 라떼를 시전하신다. 아빠, 이 사람들 아직도 양반까지는 안 되는 것 같아요, 많이 쳐줘야 중인입니다.


우린 발랑솔 마을에 진입해 가까이 라벤더 핀 곳이 보이는 족족 차를 대고 내려 라벤더 밭내음을 맡는다. 라벤더 밭은 멋이 없다. 가르마를 탄 것처럼 라벤더 밭은 정갈하게 일렬로 줄지어 서 있다. 오와 열을 맞추어 선 꼬마 병정 부대 같기도 하다. 꽃잎이 풍성한 것도 아니요, 잎줄기가 싱그럽지도 않다. 하지만 바람이 한 터럭이라도 불면 꽃내음이 바람결을 타고 닿는 곳마다 꿀내음을 뚝뚝 떨어트린다. 바람이 더 세차게 불면 라벤더 밭은 일렁이며 환성을 터트린다. 구불거리는 잎을 쉴 새 없이 흔들어 대고, 올망졸망한 꽃망울도 사정 없이 고갯짓을 한다. 보랏빛의 파도가 연달아 친다.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 대신 라벤더 향이 연신 터진다. 라벤더 밭 덤불이라면 온 몸으로 뛰어 들어도 좋다.


오래 된 나뮤의 옹이처럼 굽이 진 길을 지나 생 크루와 호수에 왔다. 인근 마을에 식수와 전기를 공급하기 위헤 댐을 설치 했는데 주변이 석회암 지대여서 이 호수는 특유의 에메랄드 물빛을 띠게 되었다. 호수에 박하 사탕 가루를 풀기라도 한 양, 눈이 시큰거릴 정도의 맑은 옥빛 호수다. 잔잔한 물결은 겹겹마다 진녹빛 반짝임을 베고 있다.


무더운 여름날, 바깥에는 매미가 울고, 하늘에는 볼록한 구름이 동동 떠 있다. 영롱한 옥빛 호수에는 사람들이 뛰어들어 헤엄 친다.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흘깃 비추는 빨갛고, 샛노란 수영복과 동동 떠 있는 사람들의 금빛, 갈색의 젖은 머리들. 물방울이 조롱조롱 맺힌 탄산음료 캔을 딴다. 치익, 탁! 새파란 여름의 맛이다.

4일차 마르세유, 해산물 만찬, 비누털이

우리가 묵고 있는 베이스 캠프는 엑상 프로방스였다. 처음에는 해변가 도시를 당일치기로 다녀오자, 해서 낙점된 곳이 니스였는데 구글 지도로만 보아도 넉넉잡아 네 시간. 탈락이었다. 그럼 근처 해변 어디가 있겠나, 둘러보니 지척에 큰 해안 도시가 있었다. 마르세유, 어쩐지 세일러복을 입은 뽀빠이가 곰방대를 물고 있는 이미지가 떠오르는 도시다. 비린내 나는 부둣가를 내 세상처럼 누벼가는 바다 사나이의 도시일 것만 같은 거다. 영 근거 없는 선입견도 아닌 것이 휴양지로 이름 난 니스에 비해 마르세유는 거친 날 것의 해안가 도시이자 소매치기와 강도의 명성도 자자한 곳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르세유, 액상 프로방스에서 고작 차로 삼사십분이면 닿을 곳이다. 이 정도면 와달라고 간청하는 수준이다.


조금은 진땀 흐르던 마르세유 시내 진입까지 무사히 마치고 주차장에 차를 주차 시켰다. 시내에 있는 공영 주차장은 굉장한 요금에 비해 터무니없는 리뷰(예를 들어 짐 털어가는 강도라든가, 또 유리창 깨부시는 강도라든가, 아니면 유리창도 깨먹고 짐까지 홀랑 다 털어가는 강도라든가)가 너무 많아 겁에 질리기는 했으나 렌터카가 유일한 이동 수단이었던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안 털릴 놈은 안 탈린다는 굳건한 믿음으로 정차시키고 처음 나선 곳은 당연히 마르세유 비누집. 향긋한 비누 냄새 안에 폭 빠져 마르세유 비누라는 각인이 찍혀진 비누를 바구니에 묵직하게 담았다. 미끄덩한 폼클렌징 대신에 뽀득한 비누로 얼굴을 박박 닦으면 기분이 조크든요.


점심은 작정했다. 마르세유까지 왔으면 해물을 먹어줘야 하는 법. 미리 차장둔 바닷가 앞 식당에 앉아 해산물 메뉴를 펼쳐들었다. 부야베스는 당연지사, 해산물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를 시전했다. 온갖 종류의 해산물 파티를 거나하게 벌일 예정이었다. 마르세유에 온 이유는 오로지 이 해산물 만찬 하나로 다 설명한다는 엄중한 마음가짐으로 숟가락과 포크를 들었다.

5일차 바르셀로나 복귀

복귀일은 빠르게 다가왔다. 게다가 엑상 프로방스에서 바르셀로나로 가는 기차편은 하루에 한 대, 8시 18분 기차였다. 새벽부터 일어나 채비를 해야했다. 비몽사몽 짐을 챙기기 전에 정신부터 챙겨야 했다. 기차역에 도착하고 커피 한 모금, 크로와상 한 입을 한 뒤 기차애 올라탔다. 세시간 반의 여정, 우린 남녘으로 향했다.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뒤, 기차역에서 곧장 렌터카를 빌리기로 했다. 돌아오고 나선 바르셀로나 시내보다는 근교 도시와 외곽 지역을 유랑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매끄러운 픽업이 될 줄 알았다. 8시 18분 승차, 12시 50분 하차, 13시 자동차 픽업. 아주 멀끔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계획이 계획대로만 흘러간다면 그건 여행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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