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유랑단 04
7/10 바르셀로나 한낮의 렌터카 소동
오전 8시 18분에 엑상 프로방스를 떠난 기차는 네 시간을 달려 오후 1시경 바르셀로나 산츠역에 들어섰다. 장거리 이동은 뭘 타든 녹록지 않군, 생각하며 짐을 챙겨 일어섰다. 하지만 이제 차 타고 편하게 간다, 렌터카를 해두어서 참 다행이다, 이 짐을 다 끌고 어느 세월에 기숙사로 돌아가. 렌터카를 예약해 둔 이전의 계획에 스스로 박수를 치며 산츠역 지하 1층에 위치한 렌터카 업체를 찾았다.
위풍당당하게 업체에 들어섰다.
“저희 예약했어요.”
“아, 지금 차가 늦게 반납이 되는 바람에 원래 예약해 준 차가 바뀌었거든요. 괜찮을까요?”
음, 일단 무슨 차인 지는 봐야겠다, 설마 저 차는 아니겠지.
“이겁니다.”
8인승 미니밴? 허허, 이게 현실일리가 없어. 지금 바르셀로나 골목길을 밴을 몰고 휘젓고 다니라는 건가요. 차 타는 사람이 넷인데요? 골목이 사람 허벅지만 한데요? 여기 고속도로 타면 다들 130 밟던데요? 저 운전 경력이 꼴랑 2년인데요?
“저 이건 운전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렌터카 계약을 물러야 하나 싶어서 선결제한 계약을 무효화시켜 달라고 했다. 그렜더니 돌아오는 답이, 업체와 직접 계약한 게 아니라 중간 플랫폼을 사용해서 그 회사와 환불을 진행해야 하고 여기선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얘기. 그럼 제 손에는 차도 없고 돈도 없는 셈이네요! 이마를 탁 짚었다. 순조롭고 평화롭게 흘러가던 여행에 적신호가 켜졌다.
지하 주차장을 누비며 두 군데의 렌터카 업체를 더 찾았다. 한 업체는 대여 가능한 차가 아예 없었다. 바르셀로나 관광객 유입이 많아지는 시점이라 어쩔 수가 없다고. 다른 업체에선 당일 기차역에서 빌리려니 프리미엄이 붙어 터무니없는 값의 차가 있었다. 이미 실체 없는 차량에 값을 지불했는데 또 한 건의 계약을 더 해야 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엄마와 이모는 기다림에 잔뜩 지쳐 있었다. 아빠와 나는 더 이상의 묘수가 보이지 않았다. 일단 택시 타고 학교로 돌아가자, 그것만이 최선이었다.
고속도로를 타고 학교로 가는 길에 중개 업체에 전화해서 묻고 따지고 토로했다. 우리 차 어딨느냐, 지금 일정이 다 꼬였다, 그렇다면 애초에 차량을 지정한 계약 내용은 무엇이 되냐, 이런 식으로 계약을 일방적으로 무효화하는 건 소비자 우롱이다, 환불하려면 증빙 자료가 필요하다니 렌터카 업체에서 줄 수 있는 문서가 없다는데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 그럼 렌터카 업체와 소통도 하지 않고 차량을 지정해 무턱대고 소비자에게 계약이랍시고 선결제를 시킨 거냐. 30분을 달렸는데 30분을 꼬박 통화했다. 아무것도 해결이 된 건 없었다.
씩씩거리며 기숙사로 들어섰다. 이 일을 어쩔 것이냐. 현재 시각은 오후 3시. 렌터카를 빌려 해외여행을 한 친구에게 조언을 구했다. 어떡하냐, 망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말, 차량 반납 밀려드는 때가 있을 텐데 그때까지 그 자리에 버티고 기다리지 그랬어. 우 씨, 난 그런 거 모른다고!
“그럼 지금 다시 나가서 원하는 차 받아 와.”
“시내까지 나가면 다시 한 시간 걸리는데 어떻게 나가냐고오오오.”
“환불 처리하는 건 불확실하고 증빙 자료 만드는 것도 불리해. 렌터카 업체든 중개 업체든 오리발 내밀면 그만이야. 나가서 오늘 안에 처리해야 돼. 차를 사수해야 돼.”
엄마와 이모는 역에서부터 렌터카 업체와 중개 업체랑 씨름하는 내가 안쓰러운 모양인지 차를 포기하자고 하신다. 다들 내일 아울렛 가자면서요, 차 없으면 못 가요, 그 다음날 우리 몬세라트 가잖아요, 차 없으면 못 갑니다! 이모가 앞치마를 탁탁 터신다.
“그럼 밥 많이 먹고 가. 맛있게 해 줄게! “
우걱우걱 밥을 쑤셔 넣었다. 배가 뽈록 나올 정도로 먹었다. 전투력이 상승한다. 아빠는 어김없이 나의 동행자, 우린 위기에 빛을 발하는 똥개 콤비였다. 이렇게 이번 여행 중 예상치 않게 해결해야 할 일이 생기면 냅다 부딪히고 보는 아빠와 나는 영락없이 똥개 훈련을 한다며 탄생한 게 똥개 콤비였다.
조금은 꼬질 해진 몰골로 렌터카 업체에 다시 등장했더니 직원(나중에 통성명을 하니 그녀의 이름은 쥴리아였다)이 우리를 맞이한다.
“저희 좀 복잡한 사정이 있는 예약자들인데요. 계약을 했는데 차가 없어서요. 이미 1시부터 계약 시간이 지났다고 예약한 중개 업체는 모른 척이에요. 혹시나 예약한 차종과 비슷한 걸로 지금 가져갈 수 있는 차가 있나 해서요. “
“상황 들었어요. 차를 한 대 맡아두고 있었어요.”
그녀의 손에는 키가 쥐어져 있다. 내 눈에는 그게 다이아몬드보다 더 번쩍여 보였다.
줄리아는 천사였다. 그녀는 우리의 상황이 빈번하개 일어나며, 몇 백개의 중개 업체를 쓰는 손님들도 비슷하게 난처한 상황에 처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렌터카 업체가 직접적으로 해결하거나 책임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도 덧붙이며 웬만하면 값이 조금 더 나가더라도 렌터카와 직접 계약 체결을 할 것을 권했다. 그걸 지금 온몸으로 절감하는 중입니다.
혹시나 이전 계약 취소나 변경이 필요할까 봐 온 김에 중개 업체에 다시 연락했다. 우린 예정된 픽업 시간 이전에 도착했으며, 도착했을 당시 예약한 차량이 없었다는 것을 중개 업체에 정확히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중개 업체 상담원은 렌터카 업체 직원과의 통화를 원했고, 줄리아는 흔쾌히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또 하나의 우려, 마찬가지로 중개 업체를 통해 맺은 운전자 보험이었다. 사고가 생긴다면 보상 역시 렌터카 업체와 직접 계약한다면 업체의 선제 처리가 가능한데 비해 중개 업체를 통해 지급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당장 해지, 중개 업체는 앞으로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다.
“고생하셨어요. 안전하게 운전하고, 우리 세 번째는 보지 않길 바랄게요. “
“네, 저희도요. 도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다시는 보지 않기로 해요!”
렌터카 직원들과 우린 정다운 인사를 나누고 작별했다. 이번에는 운전대를 거머쥐었다. 그놈의 렌터카, 기필코 사수해 냈다.
7/11 쿵짝쿵짝 아울렛
운전대를 잡은 우리는 천하무적이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곳은 바르셀로나 자치 대학교 기숙사로 바르셀로나 시내와는 다소 거리가 떨어진 곳에 있다. 바르셀로나 주 안에 있기는 하지만 시 행정 단위로 따지면 세로다뇰라 델 바예스(Cerdanyola del Valles)에 위치해 있다. 그러므로 시내 진입과 근교 도시를 돌아다니기에는 렌터카가 반드시 필요했음이 분명하다. 첫 행선지는 라로카 빌리지(La Roca Village)다.
이곳은 한국인 관광객들 사이에서도 쇼핑하기 용이한 곳으로 정평이 나있는데 외곽지에 있어 여행객들은 셔틀 서비스를 이용해 오간다고 한다. 우리 숙소에서는 차로 30분 거리에 있다. 여름 할인 기간인 데다가 회원 가입을 하면 할인을 추가로 해준다고 하여 출발 직전에 아울렛 회원 가입해서 큐알코드까지 발급받았다. 이 정도면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고 볼 수 있겠지.
운전이 능숙지 않은 관계로 3차선에 화물차 사이에 끼어서 라 로카 빌리지에 도착했다. 처음 인포메이션 센터를 가서 큐알 코드 사용에 묻고, 내부 레스토랑이나 카페 위치에 대해서도 안내받았다. 안내원은 지도를 쥐어 주면서 상냥하게 설명해 주었고,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피스타치오 크루아상을 파는 매점은 꼭 가보라고도 일러 주었다. 정말이지 이들의 태생적으로 타고난 태평한 상냥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상점을 하나씩 지나치면서 짐 가방이 한두 개씩 늘었다. 운동화는 반값, 주얼리는 말해 뭐 하며 의류 브랜드는 일단 들어가고 봐야지. 평소에 물욕이 없는 편이라고 자부하는데도 홀린 듯 돌아다녔다. 짠순이어서 그런지 옷을 살 때는 항상 신중을 기하고, 대부분은 언니 옷을 뺏어 입으며, 애착 아이템이 많아서 평소 옷을 구매할 일이 많이 없었다. 그렇지만 스페인에 올 때 28인치 캐리어 하나만 덜렁 가져온 터라 가을겨울 옷은 하나도 챙기지 않았다. 한국에서 국제 소포로 보내려면 어차피 택배비만 10만 원은 족히 나올 텐데 낡은 옷 한 더미 부치는데 그만한 돈을 쓰느니 여름 세일 기간일 때 동절기 옷을 마련하고, 상태가 괜찮은 의류품을 한국에서 보내주겠다는 것이 엄마의 말씀이었다. 그것 참 합리적인 소비 이유일세. 그걸 명분 삼아 니트 상의, 긴 팔 티셔츠, 러닝화, 원피스 등등을 마련했다. 이건 향후 10년을 책임질 옷이다, 되뇌면서.
엄마와 이모도 큰 거 건졌다. 이들의 소식에 따르면 라로카빌리지를 방문한다면 버버리 매장을 꼭 들려야 한다고 했다. 버버리 매대에 걸린 트렌치코트를 살펴도 가격 메리트가 큰지는 잘 모르겠다, 명품은 아울렛 세일가에 판매한다고 해도 값이 나가는구나, 생각할 무렵이었다. 매장 매니저가 다가와 핸드폰을 슬며시 꺼낸다.
"가격표 보는 법 알고 있나요?"
"여기 적혀 있는 가격 아니에요?"
노노, 매니저가 검지 손가락을 빳빳하게 들고 양 옆으로 까딱이신다. 그리고 목걸이에 두른 안경을 코에 걸쳐 쓴다. 어떻게 생겨 먹은 안경인지 반으로 갈라져 있던 게 콧등에 얹어지면서 찰싹 붙는다. 이 애니메이션 캐릭터처럼 홀연히 나타나신 매니저는 가격표에 붙은 초록 딱지를 가리킨다.
"초록색 스티커는 이 가격에서 30프로를 더 할인한다는 거예요. 주황색은 40프로, 파란색은 50프로. 오케이?"
세상마상에, 그렇다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지. 우린 긍정의 신호를 보낸 뒤 쇼핑에 다시 매진했다. 최종 가격은 할인에 또 다른 할인을 얹은 가격이라는 말에 엄마와 이모는 사기가 마구 솟아난 건지 더욱 분주해졌다.
집 가는 길은 충만함 그 자체였다. 오호, 렌터카를 빌리는데 고생은 좀 했다만 차가 없었으면 얻지 못했을 라로카 빌리지의 여정, 그의 부산물인 물질적 풍요로움과 정신적 만족감이었겠군, 싶어서 더없이 뿌듯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