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유랑단 06
7/13 몬주익의 낮
몬주익 언덕은 꼭 올라가 봐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돌이켜 보건대 올라가야 한다는 건 굳이 도보로 가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지금이야 에어컨 바람 빵빵 쏘이면서 던지는 말이지만 그날 뙤약볕 아래 그늘 한 점 없는 오르막을 오르는 건 굉장한 훈련이 아닐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냈는지는 몰라도 결국 몬주익 언덕의 가장 꼭대기 성벽까지 올랐으니 해내긴 해낸 셈이다.
우선 렌터카로 몬주익 성을 가기 위해서 어디에 주차하는 게 좋을지 고민해 봤다. 찾아보니 사람들은 주로 몬주익 언덕을 올라가는 길가에 차를 대야 한다고 했다. 길가가 아니면 주차장이 따로 없으니 주차 난도가 높은 편이라고. 그래선지 차를 몰고 언덕길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주차장이 보이자 반드시 저곳에 주차를 해야지 싶었던 거다. 아차차, 이것은 실수였다. 하지만 하필 1칸이 남은 탓에 럭키다, 럭키 하면서 주차를 했다. 조금만 걸어가면 되겠지, 분명 지도에는 20분 걸으면 나온다고 하긴 했다. 그 20분이 언덕길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게 무슨 일이지, 그놈의 20분은 가도 가도 줄지를 않았다. 결국 땀방울을 줄기차게 흘리며 엄마와 이모는 포기를 선언하고 만다. 차를 끌고 오게나, 아니면 나는 여기서 더 움직일 수 없소. 단호한 선언에 아빠와 나는 다시 왔던 길을 터벅터벅 내려갔다. 차를 끌고 엄마와 이모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니 5분도 안 되는 거리였다. 언덕길의 위엄이란 대단한 것이었다. 거기서부터 몬주익 성을 도착지로 찍고 운전을 재개했다. 올라가는 길은 내내 포장도로였다. 여길 걸어서 오겠다는 건 대단한 포부였음을 점차 깨달았다. 그나마 일찍이 숙려를 거쳐 차를 되찾아 온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헥헥대며 올라온 길이 한참이었건만 차를 타니 5분 거리였다. 이것이 기만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지쳐버린 육신이 현대 기술에 무릎 꿇었다는 패배감을 지울 수 없었으나 동시에 차 안 가져왔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안도의 한숨을 몰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몬주익 언덕의 정상이자 몬주익 성의 꼭대기에 도착했다. 내려다보이는 바르셀로나 전경은 도심과 바다 모두를 담고 있었다. 아래에서 몬주익 성을 올려다보았을 때는 그렇게까지 높지 않아 보였는데 가장 위에 다다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모든 것이 작은 점과 반점, 실선과 점선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도시가 작아지는 와중에 내가 그만큼 커져버린 것 같았다. 걸리버가 된 것처럼 바르셀로나를 내려다보았다.
7/14 포트벨의 밤
우리 가족의 가장, 유랑단의 물통맨, 나의 똥개콤비의 귀국날이 성큼 다가왔다.
“바르셀로나 시내에서 야경은 한 번 봐줘야지. 안 그래? 가우디 가로등에 불 들어오는 것도 보고. “
엄마의 제안이었다. 우린 당연 콜을 외쳤다.
포트벨은 지난번 아예 근처 몰에 차를 대고 반나절 동안 시간을 보냈던 곳이었다. 항구를 둘러보면서 시간이 나면 꼭 야경을 보러 와야겠다고 엄마는 생각했단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인 게 밤이 되면 조명이 켜지고, 바다의 색도 변하니 낮 시간에 봐온 모습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질 게 그려지지 않는가. 하지만 바르셀로나에서 야경을 본다는 건 적어도 10시 넘어서까지 시내를 배회해야 한다는 걸 의미했기에 여태 야경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아빠가 귀국하기 전 제대로 날을 잡았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포트벨 근처 몰에서 식사를 하고 바다가 펼쳐져 보이는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씩을 마셨다. 오늘은 식당의 건너편에서 간단한 타파스와 시원한 음료를 한 잔씩 하기로 했다. 레몬 맥주라고 불리는 클라라와 별이 그려진 에스트레야는 유랑단원의 단골 픽이었다. 레몬 맥주는 이모가 한참 궁금해하던 중에 메뉴 판에 보여서 시켜보았다.
“이게 무슨 맛이고?”
반응은 싱거운 맥주보다 더 싱거웠다. 맥주를 마시지 않는 내 입맛에도 별 맛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이곳저곳 둘러보고 찌르고 다니며 노상 돼지꼬리와 별표를 쳤던 지점은 결과가 뭐가 됐든 한 번 둘러보고 찔러보았다는 그 점이었다. 맛은 없었으나 클라라는 한 번 마셨으니 됐다.
타파스 접시와 맥주잔이 비워져 가고, 남겨진 빈 공간은 주홍빛 석양이 채웠다. 해는 느리게 기우는 것처럼 보였지만 떨어지는 붉은 석양빛은 넓게 바다를 덮었다. 넘실대는 파도 위로 포개어진 붉은 겹은 수면에 부딪힐 때마다 보랏빛이었다가 다시 진한 주홍색으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엄마와 아빠는 사이좋은 원앙 한 쌍처럼 포트벨 주변을 한 바퀴 거닐었다. 나와 이모는 사촌 동생의 근황 얘기나 얼굴 본 지도 꽤 된 친척들 소식을 하며 원앙 한 쌍이 복귀하기를 기다렸다. 깜깜한 밤이 되었다. 우리가 주차해 놓은 곳으로 가려면 막차를 타야 했다.
“우리 시간 넉넉한가?”
응, 여기 밤늦게까지 버스 다녀,라고 호언장담을 했으나 혹시 몰라서 다시 한번 구글 지도를 켰다. 이게 뭐람?
“20분 뒤에 막차다. 가자, 일어나, 일어나. “
우르르 일어나 가방을 챙겨 나섰다. 단체로 도망 태세를 취하려는 우리를 보고 당황했는지 종업원 한 명이 미어캣처럼 퍼뜩 고개를 든다. 저희 돈 안 떼먹어요, 그냥 막차를 잡아야 될 뿐이에요.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대자로 누웠다. 오늘도 하루가 간다. 달력에 하루를 찌익 그으면 다음 하루가 기다리고, 그 뒤에는 또 다른 하루가 서있었다. 하루의 끝은 다른 하루의 시작이어서 여행이 끝날 틈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과 내일 하루 사이에는 비껴진 틈이 서있다. 그 틈 사이에 끼여 있는 건 아빠의 귀국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