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유랑단 07
7월 15일 작별
한 명의 유랑 단원을 고국으로 떠나보냈다. 아빠였다. 아빠는 현재 근무 중인 연구소에서 최대한 길게 2주의 휴가를 던지고 나섰지만 역시나 이곳에서의 시간은 한국보다 빨리 흐른다. 2주는 쏜살 같이 지나갔다. 프랑스 남부에서의 일주일 유랑을 마치고 돌아오니 고작 며칠을 앞두고 아빠의 복귀는 코 앞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렌트한 차를 몰고 엄마, 아빠와 함께 아빠 배웅을 나섰다. 넷이 뭉쳐 함께 여기저기 파헤치고 다니다가 단원 한 명을 먼저 떠나보내는 건 정말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아빠는 나와 뭉쳐서 작게는 선풍기 나르기부터 크게는 렌터카 운전까지 잘잘하고 굵직한 임무를 함께 수행한 콤비였던 만큼 날이 갈수록 전우애가 두터워지고 있었으니 환송의 날이 되니 아쉬움이 파도처럼 밀려들 수밖에.
아빠는 내년을 기약하며 우리의 베이스 기지를 떠났다. 이거 할 걸, 저렇게 해볼걸, 잔해처럼 남겨진 생각을 모으다 보면 다음 여정을 꾸리기 위한 출발선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아쉬움은 곧 기대감으로 불거졌다.
7월 16일 휴식
차를 반납하는 날이었다. 반납 시각은 대여한 시각과 동일한 오후 1시, 우린 그전에 재빠르게 장을 봐오기로 했다. UAB 기숙사 근처에는 알캄포와 메르까도, 두 군데의 대형 마트가 있다. 나는 손질된 생선을 즐겨 요리해 먹어 알캄포를 주로 가는 편인데 여기는 바르셀로나 외곽으로 더 나가는 방향에 있어 대중교통편으로 zone1이 아닌 zone2로 분류된다. 엄마, 이모가 가진 교통권으로는 지원되지 않는 존이었는 데다가 이런 대형 마트를 한 번 가면 가벼운 마음으로 갔다가 무거운 짐을 들고 오게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왕 차도 갖고 있겠다,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마지막으로 운전대를 잡기로 했다.
늘 보조석을 아빠가 홀연히 사라진 탓일까, 10분 거리를 몇 번이나 돌아 겨우 마트에 도착했다. 상추, 착즙 오렌지 주스, 납작 복숭아, 이베리코 돼지고기. 이제는 4인분이 아닌 3인분을 요리해야 한다.
7월 17일 Sant Cougat
산 쿠가트, 내가 거주하고 있는 대학 캠퍼스에서 열차 역으로는 3개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한적진 동네다. 종합 대학 근처에 있는 만큼 대학 교수가 많이 거주하고, 산 쿠가트 근처 연구 단지가 있어서 연구원들도 많이 사는 동네라고 한다. 바르셀로나 시내와는 물론 거리가 꽤 있기 때문에 관광할 거리보다는 여유로운 주거 단지가 조성된 동네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 왜 가게 되었냐. 아빠와 작별하고 남부 스페인 여정을 떠나기 전 우린 대략 4일의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마냥 놀고 퍼질러 있기에는 여름 낮이 너무나 길었던 탓에 누워서 뒹굴거리다 가까운 동네 구경 다녀오자,라고 생각하던 차였다. 퍼뜩 떠오른 곳이 산트 쿠가트, 지도 교수님의 동네였다. 커피 좋아하면 산트 쿠가트 놀러 와, 괜찮은 브런치 집하고 카페가 많거든, 언뜻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장면이 스쳐 지나갔던 것이다.
산트 쿠가트 시내 중심 쪽에는 몬세라트 수도원과 마찬가지로 11세기경 지어진 역사 깊은 수도원이 있다. 수도원 내 미술관도 있길래 안내 직원에게 물어보려고 하니 재잘재잘 묻지도 않은 걸 신나게 설명해 주셨다.
“산트 쿠가트 동네 좋아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기가 부자 동네라서 여름에는 거의 매일 공연이나 행사가 있거든요. 시청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확인하고 공연 즐기는 것도 재밌을 거예요.”
정말 이 동네는 깔끔하고 정갈했다. 집집마다 발코니는 소박하게 꾸며져 있었고, 벽돌과 타일로 잘 포장되어 있었다. 알고 보니 산트 쿠가트는 바르셀로나에서 손꼽히는 부촌이라고 한다. 교수님께서 말한 것처럼 마냥 커피만 맛있는 곳은 아니었던 셈이다.
점심 먹을 곳으로 찾아본 곳 중에 시에스타 시간에도 영업하는 곳은 한 군데였다. 유일한 선택지였던 이곳은 알고 보니 최고의 선택이었다.
우리나라 맛집에 유명인 방문 사진을 걸어놓듯 이곳도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정성스레 액자에 끼운 사진이 한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게 심상치 않았다. 일렬로 길게 이어진 테이블석은 깔끔하고, 웨이터도 많은 걸 보니 규모가 큰 동네 맛집처럼 보였다. 우린 착석해서 메뉴판을 뒤적이며 이베리안 돼지고기, 익힌 버섯 요리, 빵 등을 주문했다. 맥주와 화이트 와인도 잊지 않았다.
“이런 로컬 맛집 오면 뭐야 그거, 꼰빤, 빤똔, 뭐시기야. 그거 있잖아.”
“빤꼰또마떼?”
“어! 빤꼰 그거 먹어줘야 되는데 말이야.”
우리가 빵에 토마토와 마늘을 발라먹는다는 현지 메뉴에 대해 묻자 넉살 좋은 웨이터 아저씨가 오셔서 우리에게 소매를 걷어 붙이고 몸소 시범을 보여 주셨다. 토마토를 잘라 벅벅, 마늘을 반틈 내서 또 벅벅. 우리도 아저씨의 벅벅 리듬에 따라 토마토와 마늘을 조각내 빵에 세차게 문질렀다.
7월 18일 막간의 행정 처리
오늘은 잠시 쉬어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더 급한 용무가 있었다. 거주증 연장을 위한 행정 업무 처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8월 1일부터 연장 신청을 할 수 있어 7월 중에는 천천히 여유를 갖고 문서를 하나씩 만들어 가는 중이었다. 7월 18일부터는 25/26년도 등록금을 지불하는 기간이 시작된다. 챙길 서류가 한 두 개냐며 투덜대는 마음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만 적어도 많은 부분이 전산화되어서 직접 발로 안 뛰어다니는 것만 해도 어디냐며 감사한 마음을 갖기로 한다. 연간 등록금은 70만 원 정도, 시간 있는 때 현지 은행 계좌를 만들어 두길 잘했다. 카드 결제도 수월하게 마칠 수 있었다. 등록금 지불 완료, 영수증과 등록금 청구 문서를 소중히 저장했다.
7월 19일 고딕 지구 골목길
유랑단의 단장으로 출근 시각은 10시다. 오백 개 키링이 달린 나이키 가방을 메고 짤랑짤랑 기지로 가면 엄마와 이모는 이미 아침을 시작하셨다. 아침 식사는 주로 한식, 된장찌개나 미역국. 흰쌀밥과 반찬도 빼놓지 않는다. 여태 마트 하나 놓치지 않고 부지런히 구경했기에 이들의 안목은 날카롭다. 더없이 신선한 재료로 만든 오이김치, 감자채볶음, 계란 프라이 등등. 매 아침 식사는 미슐랭 레스토랑 부럽지 않은 화려함을 뽐냈다.
오늘은 가볍게 고딕 지구를 둘러보기로 했다. 지난번 엄마, 아빠, 이모는 이미 고딕 지구 투어를 신청해 둘러본 바가 있었지만 워낙 피곤에 지쳤던 탓에 오히려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었다. 이번에는 동네 구경에다가 고딕 지구 골목 사이사이 놓여 있는 가게나 흥미로운 상점을 둘러 보가로 했다.
산타 카테리나 시장은 지난번에 잠깐 들렀던 시장보다도 한결 깔끔했다. 고딕 지구 안에 있어 여전히 구경하러 온 관광객도 있지만 장바구니를 끌고 장거리를 보는 현지인들이 더 많았다. 얼음에 파묻혀 있는 생선, 돼지고기 뒷다리를 통째로 걸어두고 잘라서 파는 하몽, 가지각색의 치즈와 올리브. 풍성하게 구비된 식재료는 눈으로도 구경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한국 사람들이 오면 들린다는 가죽 수제화 가게를 이모가 알아왔다. 가게 이름은 코쿠아, 여기 수제화가 그렇게 질이 좋고 편하다고. 상점은 널찍하거나 목이 좋지는 않았다. 고딕 지구가 그렇듯 좁은 골목 사이사이를 다녀야지만 찾을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사이즈 별로 선반 위에 올려둔 수제화는 다양한 색깔과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만약 내가 마음에 든 서제화가 사이즈가 맞지 않는다면 더 크거나 작은 사이즈로 나오지 않을 확률도 높았다. 무지개 깔린 듯 색색별로 진열해 놓은 수제화를 구경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요긴한 재미였다.
엄마와 이모는 집에 돌아가 친구나 지인에게 선물할 거리를 고민하다 뚜론을 생각해 냈다. 뚜론은 설탕 반죽에 견과류를 넣어서 만든 스페인의 전통 간식이라고 한다. 누가나 카라멜, 우리나라의 엿처럼 끈적끈적 이빨에 달라붙는 식감이 그 특징이다. 비센스라고 뚜론 전문 상점에 가서 둘러보는데 종류가 어찌나 많던지. 수십 가지의 맛과 재료로 다양하게 뚜론이 판매되어 하나씩 시식해 보고 엄선한 맛을 장바구니에 담는 것도 일종의 작업이었다.
7월 20일 남부 가기 전 재정비
프랑스 남부를 돌며 쌓였던 여정의 피로는 요 며칠간 쉬엄쉬엄 풀어 주었다. 우린 다시 짐을 챙겼다. 가장 중히 챙긴 건 물론 밥통이었다. 이번 여정도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될 예정이니 캐리어에 밥솥과 쌀이 들어갈 자리를 만드는 건 필수였다. 아침은 밝고, 한낮은 뜨거우며, 저녁마저 환한 남쪽 동네, 우리의 다음 여정은 스페인 남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