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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우가 내리치는 몬세라트 수도원

스페인 유랑단 05

by 이해린

이 글은 7월 12일 하루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해린, 주변인, 이해린의 아버지 시점에서 쫓아갑니다.


나는 이해린이다.

아침 8시. 등 뒤가 조금 축축한 것 같기도 하고, 몸이 찌뿌둥하다. 여름 방학을 맞이해 가족과 함께 시작한 스페인 한 달 살이. 고온 경보와 폭염이 계속되는 와중에 소화해야 할 일정이 쌓여 있다. 평소에는 꿈도 안 꾸는데 신경 쓰이는 거리가 한가득이다. 초보 운전자 주제에 매일 스페인 고속도로를 달려야 하고, 여행객의 건강과 상태를 살펴야 하며, 이 와중에 환장할 비자 연장 처리까지 얹혀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꿈을 꾼다. 개꿈도 아니고, 악몽도 아니다. 그저 요란하고 아무런 개연성 없는, 그런 아무런 영양가 없는 꿈을 꾼다. 8시 알람이 울리면 기상이다.

아침 9시. 씻고 준비를 하고 내가 사는 Q441동에서 가족이 한 달 동안 둥지를 튼 E308동으로 출근한다. 가는 길은 5분 남짓, 헤드셋을 끼고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한다. 엘렌 피츠젤러드의 won’t cha come home, Bill Bailey. 고개를 까딱까딱, 발걸음은 휘적휘적.


아침 10시. 밥은 한식 그 자체다. 햇반? 님아, 그런 섭섭한 소리 마오. 빠에야 쌀로다가 야무지게 전기밥솥에 밥을 안쳐 매일 따끈따끈한 쌀밥을 먹는다. 전기밥솥은 이곳에서 재해재난시 내가 가장 먼저 챙길 제품이다. 이 밥솥으로 말하자면 ‘당근’의 산물이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하자마자 한인 커뮤니티를 통해 매일같이 ‘당근’을 해댔다. 전기장판, 이케아 바구니, 전기밥솥, 돗자리, 조미료, 밥그릇, 하다못해 빨래망까지 50 센트 주고 ‘당근’했다. 한식 한 상차림 든든하게 먹고, 오렌지 착즙 주스 또는 말차 라떼를 한 잔 벌컥벌컥 마셔준다. 바로 이 맛이다, 아침을 일깨우는 맛.

아침 11시. 한 달 동안 가족 전용 바르셀로나 가이드가 되었다. 계획에 살고 죽는 가족원들 중에 유일한 무계획자인지라 자고 사소한 고난과 역경이 있었으나 결국에는 한 달짜리 다소 어수선하고 엉성한 계획을 수립했다. 나름 엑셀 시트도 마련했다. 물론 매일 실시간으로 수정되기는 하지만 이 스프레드 시트야말로 나름대로 계획자들에게 맞추고자 노력했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증빙 자료다. 매일 일정은 달라지지만 오늘은 조금 쉬엄쉬엄 가고자 한다. 목적지는 몬세라트 수도원, 바르셀로나에서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나오는 고즈넉한 작은 마을이다. 우린 일주일 동안 차를 빌렸다. 물론 운전 초심자인지라 유럽 남녘 땅을 누비는 무법자들 틈 사이에선 제대로 기도 못 펴지만 외곽 도시를 다니기에는 렌터카만큼 편한 방도는 없다는 걸 몸소 깨닫는 중이다.


정오. 출발.

우린 이해린을 관찰한다.

낮 1시. 여태 폭염이 기승을 부리다 일주일 새 날씨가 변했다. 오늘은 비 예보가 있는 날이었다. 해린은 긴장한다. 그녀의 떨어질 곳 없이 밑바닥을 기어 다니는 운전 실력은 놀랍게도 악천후에 지하층으로 떨어진다. 그래서 운전대를 잡은 그녀는 바짝 긴장한다. 현재 거주하는 동네에서 몬세라트 수도원 주차장을 구글 지도로 찍는다. 편도 1시간, 이 정도면 해볼 만하지, 그녀는 속으로 읊조린다. 해볼 만하겠지? 어느새 평서문은 일말의 의심과 함께 의문문으로 둔갑해 있다.


낮 2시. 두 번 했다가는 뼈도 못 추리겠다고 그녀는 재빨리 태세를 전환한다. C-58 고속도로를 타자마자 삽시간에 폭우가 내리 붓는다. 위에서는 비가 내리 치고, 양 옆으로 달리는 차들이 내뱉는 물 대포에다가 차선마저 보이지도 않는다. 모든 차가 비상 깜빡이를 켜고 기어가고 있다. 해린은 조그마한 트럭 뒤에 조심스레 붙는다. 제발, 이 비가 멎을 때까지 나의 수호 트럭신이 되어 주세요.


낮 3시. 해린은 단 한 시간에 족히 십 년은 늙은 듯한 시간의 왜곡을 온몸으로 느낀다. 다리가 조금 후들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면서 빗줄기는 멎은 듯하지만 몬세라트 수도원으로 들어서는 길은 꼬부랑 오르막이어서 핸들에 힘을 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낮 4시 비가 내리는 몬세라트 수도원에 운무가 낀다. 가파른 돌산 곳곳에 휘영청 솟은 돌기둥 사이로 천 년 수도원이 그 품 안에 둥지를 틀고 있다. 깎아지른 돌산 새로 연기가 피어오른다. 운무가 휘감아 오르며 느릿한 춤을 춘다.


낮 5시 빗줄기가 다시 거세어졌다. 해린과 가족은 카페테리아로 임시 대피를 결정한다. 수도원 지붕 아래 겨우 대피하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우산을 가져와 망정이지 없는 사람들은 비를 온몸으로 쫄딱 맞으며 뛰어다닌다. 뜀박질을 하는 길에 모든 사람들의 핸드폰이 동시다발적으로 세차게 경보음을 울린다. 저지대 침수 위험, 대피하세요, 집중 호우 위험, 안전에 유의하세요. 삑삑, 울리는 경보음을 미처 끄지도 못한 채 사람들은 물웅덩이를 찰박찰박 밟으며 뛴다. 혜린은 이 순간을 잊을 수 없을 거라고 되뇐다, 폭풍우와 뇌우가 내리치는 몬세라트 수도원의 어둑한 낮과 축축한 냄새를.

이행복(이해린의 아버지)은 이해린을 관찰한다.

저녁 6시. 오는 길마저 녹록지 않다. 그나마 수도원을 둘러볼 때만큼은 비가 약한 거였는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어두운 데다 폭풍우가 다시 거세어지고 있다. 보조석에 앉은 해린이는 눈알만 도록도록 굴린다. 한동안 운전대에 손을 뗄 모양인지 얼굴이 잔뜩 질려있다.


저녁 7시. 수도원 카페테리아에서 잠깐 쉬는 동안 챙겨 간 점심을 실컷 먹어서 그런지 배가 고프지는 않다. 나머지 가족들도 배가 고프지 않은 건지, 낮 시간 동안의 재난재해 상황 때문에 현실적인 감각을 잃은 건지 다들 나름대로 노곤해 보이기도, 지쳐 보이기도 한다.


저녁 8시. “오늘 진짜 대단했다.” 해린이가 한 마디로 일축한다. 내 말이 그 말이다, 대단한 하루의 사전적인 의미를 찾으면 오늘을 보여줘야 한다. 검은 수도원, 검은 수녀상, 검은 그림자들. 모든 것이 흑색으로 내려앉은 돌산의 풍경은 말로는 다 할 수가 없다. 겨우 꺼내는 말이라고는 대단하다는 것뿐.


저녁 9시 오늘 수도원에서 결혼식을 치른 한 쌍이 있었다. 그들을 축하하러 온 가족과 친지는 물론이고, 수도원을 방문한 여행객들도 호기심의 시선을 던졌었다. 내가 그들을 지나쳤을 때, 가족과 모여 웨딩 사진을 찍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사람 얼굴만 한 카메라를 들고 연신 플래시를 터트리며 컷을 담고 있었다. 저 렌즈에 어떤 사진이 남겨질까. 한낮이었는데도 비가 와선지 하늘은 어둑했는데 사진기가 어떤 풍경을 담을지 궁금했다. 그런데 방금 해린이가 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턱시도를 입은 신랑이 수도원의 광장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사진을 가족 방에 전송했다.

“오늘 비 와서 속상했겠다. 비 정도가 아니라 폭풍이었잖아. 스페인 여름 연중 강우량이 0에 수렴하는데 오늘 하루 다 쏟은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한다면 차라리 오늘처럼 특별한 날이 또 어디 있겠어. 우리 결혼한 날 기억나? 폭풍 치던 날, 이렇게 말하겠지.”

그랬더니 해린이가 마시던 오렌지 주스 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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