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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가 비자했다

2024년 2월, 스페인 학생 비자

by 이해린

2024년 2월

어쩐지 일이 쉽게 굴러갈 리가 없다. 비자의 ㅂ자만 들어도 치가 떨리던 게 엊그제, 시간이 약이라더니 그마저도 5년 전의 일이 되니 그때 얼마나 긴박하게 일이 흘러갔는지 기억도 안 나게 된 것도 당연하다. 그때 비자 처리했을 때 꽤 바빴다, 그나마 대행 맡겨서 한숨 돌렸지 혼자서는 어림도 없었지, 정도의 허심탄회한 세상다산 시니컬의 감회 정도로만 그치게 된 건 정말로 이미 지난 일이기 때문인 것이다. 다시 돌아서 2025년 봄학기 출국을 앞두고 비자 업무를 보게 되었다. 조금의 심적 여유를 갖게 된 건 이번이 벌써 네 번째 학생 비자를 발급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행정 처리의 복잡다단함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탓이다. 오산임을 깨달은 건 비자를 알아본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였다.


이번에도 역시나 비자 업무를 대행해 줄 유학원을 찾았다. 물론 혼자서 못하리란 법은 없다. 하지만 나는 하지 않길 택한다. 백가지 이유를 대라면 첫 번째부터 마지막 이유까지 동일하다. 나라는 사람은 비자 발급이라는 일련의 처리 과정이 요구하는 세심함과 꼼꼼함이 결여된 인간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나는 그냥 쉽게 살고 싶었다. 돈으로도 못 사는 게 세심함과 꼼꼼함이라면, 나는 그걸 해낼 수 있는 인력을 돈으로 사겠다는 마음가짐이다.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이런 미덕 또한 살 수 있다는 걸 내가 보여주겠다, 이거지.


순항을 예상했다. 어차피 떼야할 문서 이름도, 발급받아야 할 기관도, 각 문서마다 소요되는 시간도 나는 이미 다 안다고 생각했다. 대행비가 아깝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른 참이었다. 무참히 삼킬 수밖에 없었던 건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힌 그날 오후였다.

-포르투갈 비자 관련해서 전화 통화가 필요합니다. 전화 가능하신 때 메시지 남겨주세요.

유학원에서 연락이 왔다. 무소식이 희소식인 현대 사회에서 전화 통화가 필요하다니, 그것도 고릿적 시절 받은 포르투갈 비자 관련해서라뇨.


전화 통화 결과는 더욱더 상황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비자 신청일자를 기준으로 5년 이내 거주한 나라에서 범죄경력회보서 원본을 제출해야 한단다. 손가락을 꼽아 보았다. 장기간 거주라고 할 수 있는 건 3개월 이상의 체류일 것인데 포르투갈 거주 기간이 언제부터 언제까지였더라. 출입국 기록을 떼 본다. 2020년 초 1월부터 4월까지는 어떻게 버무려 볼 수 있다. 이 때는 포르투갈 입국 경로부터가 비행 편이 아닌 스페인에서부터 버스를 타고 이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2021년 1월부터 8월 말까지의 기간은 정직한 포르투갈 거주 기간이다. 게다가 실거주는 차치하고서라도 이미 떡하니 여권에 찍힌 비자 스탬프가 여실히 포르투갈의 존재를 담고 있었다. 저런, 와중에 학생 비자 사진은 귀엽게 나왔군.


여권을 갈아 끼우는 건 방법도 아니다. 어차피 동일한 쉥겐국가고 유럽연합 소속 국가이다 보니 여권을 바꿔서 비자를 없앤다 해도 전산 기록에 남아 있을 것이라는 게 유학원 측의 답변이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대행업체를 찾아서 경찰청 서류를 떼는 게 유일무이한 방법이란다. 일단 제3자가 대리 발급받을 수 있는지부터가 문제다. 만약에 대리 발급이 안된다면요? 포르투갈을 가는 방법밖에 없다. 포르투갈이 우리 집 뒷마당도 아니고. 서류 한 장 딸랑딸랑 떼온다고 편도 15시간 비행기를 타라는 말씀이신가요. 세상이 이리 가혹할 수 없다.


그리하여 백방으로 대행업체를 찾아 나선다. 여태 행정 서류를 해외 기관에서 떼와 전문 번역사의 번역 작업을 맡기고, 공증 처리를 하는데 느낀 것은 부르는 게 값이라는 것. 하지만 대행이란 단순히 작업의 수고비뿐만이 아니다. 내가 지불해야 하는 금전적, 시간적, 에너지적 소모를 모두 삭제시켜 준다는 어마어마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부르는 게 값이어도 좋으니 불러라, 내가 직접 비행기 타고 리스본 경찰청 가는 것만은 어떻게든 면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이름 좀 들어본 유학원에 연락을 해보아도, 검색 범위를 넓혀 일련의 행정 사무소를 수소문해보아도, 포르투갈에 현지 업무 서비스를 처리해 주는 곳은 없었다. 그나마 한 군데에서는 서류를 제3자 대리 발급해서 서류를 떼온다면 85만 원의 비용에 아포스티유 처리와 국내 우편 배송 업무를 해주겠다는 곳은 있었다. 아, 비자가 비자짓한다.


업체를 알아봄과 동시에 커뮤니티에 뛰어들었다. 스페인 여행객, 교환학생이나 유학생, 재외한인 신분의 사람들이 만든 네이버 카페와 포르투갈에 이주해 현지 생활하고 있는 분들이 모여 있는 오픈카톡방에 들어가 내 사연을 토로했다. 큰 도움을 얻기는 어려웠다. 일단은 포르투갈이라는 한인이 많이 거주하지 않는 국가라는 점, 스페인 학생 비자를 발급받는데 이전 국가 거주 이력으로 타 국가 범죄경력회보서를 발급받아야 하는 상황을 겪는 사람이 많이 없다는 점, 발급 기관이 포르투갈 경찰청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흔하게 접하는 상황이 아닌 점 등등. 그야말로 겹쳐져 있는 모든 레이어가 특수했다.


그러다가 몇 해전 비슷한 처지에 있던 분이 쓴 글을 발견했다. 이 분은 마찬가지로 북미 국가에 거주한 이력이 있어 스페인 비자를 만드는데 해당 국가 범죄경력회보서를 발급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말벌 아저씨처럼 달려가 냅다 댓글을 달았다. 'ㅠㅠ어떻게 하셨나요, 저도 지금 같은 상황입니다.' 며칠 뒤, 댓글이 달렸다는 알람이 울렸다. '저는 다행히 운 좋게도 그 나라로 출장 갈 기회가 생겨서 출장 간 김에 서류까지 발급받아 돌아왔습니다.' 누구 저 포르투갈 보내주실 분 없나요.


***


그리하여 백방으로 찾았다, 나의 포르투갈 변호사. 구글 창에 Portugal. Lisbon. immigration lawyer.라고 적고 상단에 뜨는 대여섯 명의 선한 인상의 인물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모스 부호로 구호 요청을 하는 심정이었다. 제발요, 절 위해 포르투갈 범죄 경력 회보서를 떼주세요. 아니면 저 당장 이번 주에 땡처리 타고 포르투갈 2박 3일로 다녀와야 된다고요.


이튿날 답장이 왔다. 너무 번지르르하게 생겨서 구글링을 했는데 포르투갈 변호사 자격증 유무가 확인돼 안심하고 답장을 다시 했다. 최대한 아쌉으로 진행시켜 주세요. 변호사님은 아주 고무적인 한 마디를 던져주셨다. 서류 떼는 것부터 국제 우편 송부까지 일주일이면 됩니다. 오, 너무나 든든한 나의 포르투갈 변호사.


그의 이름은 죠나따 되시겠다. 이 분은 내 다급함(아마 매 메일의 수미쌍관으로다가 닦달했기 때문이리라)을 중히 수용하시고, 모든 업무를 신속하게 처리해 주셨다. 리스본 시외에 있는 경찰청에 가서 범죄 경력 회보서를 제3자 대리수령 한 뒤, 받은 서류를 페덱스 익스프레스로 보내 이틀 만에 받을 수 있도록 하여 아낄 수 있는 시간을 모두 단축시켜 주었다. 유럽 행정은 느리다, 효율적이지 않다,라는 내 머릿속 고정관념(사실 틀린 말은 아님. 반박 시 유럽 행정 호되게 겪으면 알게 됨.)을 깡깡 깨부순 업적을 세우시며, 모든 과정을 내게 상세히 알려주셨다.


원래는 300유로에 달하는 가격이어서 갓나따께서는 할부로 요금 지불을 요청하였으나 일이 굉장히 휘리릭 마무리되는 바람에 그럴 필요조차 없어졌다. 심지어 죠나따씨가 우편을 보내기 전 내가 부친 송금 영수증을 확인하고 서류를 보내야 하는데 죠나따씨 왈, “미쓰 리, 일단 믿고 보냅니다.“ 이미 DHL 픽업 예약을 해두었다면서. 난 그의 자세에서 과연 그 옛적 대서양을 누비던 포르투갈인의 기개를 보았다. 덕분에 포르투갈 범죄 경력 회보서를 안전히, 예상보다 반도 못한 가격에 내 품에 안게 되었다. 이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도파민 터진다. 카카오 송금과 DHL 익스프레스로 지구 반대편 나라로부터 돈과 행정 서류를 고작 일주일 남짓한 시간에 쏘고 받다니. 정말이지 21세기에 살아 숨쉬고 있음에 무한히 감사하다.


이제는 스페인 대사관에 갈 일만 남았다. 스페인 비자야, 딱 대라. 넌 도망갈 곳이 없다. 넌 내가 거머쥘 것이다. 넌 내 거다. 너는, 너어는, 너어어느은 정말 지이이인짜 나한테 오기만 해라, 가만 안 둔다 이 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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