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유랑단 02
7월 2일
첫날이 밝았다. 유랑단장은 어느 때와 같이 늦은 기상을 하였으나 유랑단원의 사정은 현저히 달랐다. 이들은 현지 시각에 아직 몸이 적응을 못한 관계로 시곗바늘이 새벽 4시를 가리키자마자 눈을 번쩍 떴다. 9시가 되어 4명이 모두 모였을 때, 단원들은 이미 기상한 지 다섯 시간이 넘은 때였다. 이들의 얼굴에는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나라에 온 기쁨과 흥분으로 잔뜩 지쳐버린 몸이야 어떻게든 되겠지 여기며 일단 광장으로 나가보기로 한다.
출발지는 바르셀로나 자치 대학교 기차역, 도착지는 S2라인의 마지막 종착역 카탈루냐 광장이다. 몹시 무더운 날이었다. 그것도 무려 38도의 무더위. 서남부 유럽 전역에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그 주간에 유랑단원이 일정을 덜컥 시작해 버린 것이다. 이들의 기숙사에는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고통과 괴로움은 배가 되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무더위도 이들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기어코 카탈루냐 광장에 두 팔 벌려 서서 첫 기념사진을 남겼다.
밥을 먹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 점심은 카탈루냐 광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엘 그롭에서 먹었다. 가성비 맛집이라고들 하던데 한국인들의 인증을 받았다면 그곳은 방문해 봄직하다. 여행객의 취향에 따라 한국인들이 모이는 맛집이나 쇼핑 장소는 부러 피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난 한국인으로서 동지 한국인의 선택을 굳건히 믿는다. 이들의 현명한 판단력과 상당한 객관성을 장착한 냉정함은 80프로를 훌쩍 넘는 성공률을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차로 심신이 잔뜩 지쳐버린 유랑단원들에게는 반드시 한국인 입맛에 제법 맞는 밥집을 찾아야 했다. 엘 그롭, 메뉴는 이미 정해졌다. 이베리코산 스테이크와 빠에야, 그리고 시원한 맥주.
7월 3일
날씨는 무르익었다. 더위는 절정을 찍었다. 그늘에 서면 서늘한 바람에 팔에 오소소 닭살이 돋는 게 지중해선 기후거늘 어째 7월 첫 주는 희한하게 그늘에 서도 더웠고, 햇볕에 나가면 익어 버렸다. 나는 이미 가우디 투어를 몇 해 전에 해보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유랑단원들끼리 즐기시라 하고 예약해 두었는데 폭염 속에 강행군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약속 장소에 늦지 않기 위해 6시에 기상해 6시 반에 학교 캠퍼스를 나섰다. 투어는 8시에 시작하고 1시 반이 되어서야 마쳤다. 녹록지 않은 반나절을 보내고 콩나물시루처럼 시들시들해져 이들은 돌아왔다. 시원한 걸 마시고, 밥으로 위장을 채워도 이들은 이미 녹아 흐르는 중이었다.
“선풍기라도 사다오.”
“선풍기? 일주일 뒤면 주말 사이에 비 오고 기온이 정상으로 돌아오는데 진짜 하루이틀 쓴다고 선풍기를 사야 돼?”
정말이었다. 게다가 이틀 뒤면 우린 남부 프랑스로 5일간이나 떠날 예정이었다. 돌아오면 기온이 훅 떨어져 있을 전망이었다. 물론 지금 낮 기온만 봐서는 썩 믿기지 않는 예보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유랑 단원들은 이미 시차 적응이 안 되어 매일 세네시간만 잠을 자고 새벽에 깨버리기 일쑤였고, 낮에는 통으로 구워삶아지고 있었다. 이들의 삶의 질은 수직 하락 중이었다.
“한 시간만 쓸 수 있어도 선풍기는 사야 된다. 한 대로는 안돼, 두 대. 나중에 당근으로라도 내다 팔면 되지.”
그리하여 단원들의 웰빙을 챙기기 위해 대형 마트인 알 캄포로 떠났다. 아빠와 함께 선풍기 두 대를 짊어지고 돌아왔다. 일단 한 대만 뜯어 써볼까. 위잉- 위잉- 팽글팽글 돌아가는 선풍기 날이 어째 허술했다. 이 나라는 선풍기 날마저 돌아가는 속도가 느린 걸까.
다음 날이 되었다. 선풍기 한 대는 그럼 반납할까. 엄마가 꺼낸 말이었다. 하루 선풍기 끼고 자니까 그나마 이성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선풍기 박스를 짊어지고 다시 알 캄포로 향했다. 목덜미며 이마며 땀이 주룩주룩 흘렀다. 햇볕에 달구어진 피부는 후끈후끈했다. 돌아오는 길 잔뜩 풀이 죽은 배춧잎처럼 열차에 실려 돌아왔다. 단원들은 유랑단장의 수고에 다시금 충성을 맹세했다. 후에 우리는 이 사건을 선풍기의 난이라고 지칭하기로 한다.
7월 4일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플라멩코 공연. 집시의 한이 서린 이 전통 춤은 물론 집시와 유랑민들이 떠돌던 안달루시아 지역에서 유래하기는 했다. 그러나 왜 우린 이걸 바르셀로나에서 보냐, 아빠가 남부 스페인까지 함께 가지 않고 2주 후 귀국을 먼저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도 전주비빔밥 굳이 매번 전주까지 가서 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때로는 타협이 필요한 법. 전주비빔밥 간판 달고 있으면 서울에서 먹든 대전에서 먹든 다 맛있기 마련이다.
플라멩코 공연장은 바르셀로나에서도 여러 군데가 있다. 우리가 무용과 춤에 깊은 조예가 있는 건 아닌지라 플라멩코 공연의 목적을 문화 체험에 두기로 했으므로 타란토스 극장에서 공연 시간이 제일 짧은 40분 극을 보기로 했다. 공연을 관람한 단원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것은 새로운 세계, 생경한 문화, 그러나 너무나도 황홀한 경험이었던 것이다. 열띠게 박수를 치고, 연호했다. 알레, 알레!
7월 5일
바르셀로나 산츠역으로 가방을 질끈 매고 떠난다. 스페인 땅에 온 지도 며칠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곧 국경 너머 땅에서 새로운 여정이 시작된다. 다음 행선지는 프랑스 남부, 라벤더 꽃길과 해바라기 밭을 따라가는 프로방스 여정이 되겠습니다. 친애하는 유랑단원 여러분들, 심호흡을 크게 들이마시고, 꽃향기와 풀내음으로 가득 메울 준비들 하십시오. 눈이 즐겁고, 코가 싱그러울 거예요. 또, 귀가 번쩍 뜨이고, 입맛이 다셔질 여행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