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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의 방랑자들

올리 바비 옥사나 크리스

by 이해린

우리 넷은 소크라테스 클럽의 마지막까지 남은 자들이었다. 두 시간의 토론을 마치고도 할 말이 많았던 자들, 의견을 굽히고 설득하는 과정에 계속 쏟아져 나온 질문에 계속해서 답을 찾아가고 싶던 사람들이었다. 일곱 시 반에 시작해 아홉 시까지 있던 정규 토론 시간을 마치고도 우린 계속해서 질의응답을 이어 나갔다. 성 차별, 성 역할, 사회적 편견과 교육의 역할 등등. 어느 것도 하나로 답이 모이지 않았고, 모든 건 여러 갈래로 나누어졌다. 그래서 열한 시까지 이야기가 이어졌을 뿐이었다. 헤어지는 길, 크리스가 말했다.

“우리 아직 할 말 여전히 남아있는 거 같은데 다음 주 중에 다시 볼까?”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다. 특별히 뭘 하자, 재밌는 데 구경 가자, 이런 것도 아니고. 다들 하나 같이 자기 할 말 많아서 들어줄 사람을 찾아야 돼서 모이게 된 거다. 크리스와 옥사나 커플이 먼저 9시에 만나자고 제안해서 낮부터 시내에 나가 있던 나는 설렁설렁 모임 장소로 걸어갔다. 그러다 결국 50분이나 걷게 되었지만 이 날은 날씨가 유난스레 좋아서 망정이었다. 가는 길 받은 문자.

-독일인으로써 수치스럽지만 늦는다는 걸 알려야겠어. 4분 늦을 예정임.

늦으면 늦는 거지, 4분 늦는 걸 예고하는 건 대체 어떤 계산법인가. 우리가 만나는 장소는 시내 거리의 펍이었고, 카탈루냐 지역 사람들이 즐겨 마신다는 베르무트를 위해서였다. 베르무트란 무엇이냐, 와인의 한 종류고 여러 향료를 섞어 만들었다는데 이건 마셔봐야 맛을 안다. 달큰쌉싸름한 맛이 아주 기가 막히다. 언제쯤 오나 거리 너머를 내다보는데 긴 인영이 휘적거리며 다가온다. 크리스와 옥사나였다. 둘 다 다리가 어찌나 긴지 가로수 길에 심어진 나무를 내려다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장신의 커플이다. 손을 휘적이며 걸어오는 이들. 소크라테스 클럽의 재결합 시간이다. 시각은 정확히 9시 4분이었다.

우리는 쉴 새 없이 떠들었다. 현대 사회의 민낯, 사회가 정한 성 역할이 한 인간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트럼프 2기 정부, 멀리 떨어진 친구들과의 우정을 나누는 방법, 연인에게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 인문학 독서가 불러일으킨 내면의 변화 등등. 정치사회적 사안과 인간 내면의 고찰을 오가며 대화는 때로는 얇고 길게, 팽팽하다가 느슨하게, 끊임없이 이어졌다. 베르무트를 한 모금씩 들이킬 때마다 입 안에 달콤한 첫맛이 들이차고 씁쓸한 여운이 맴돌았다. 빈 잔이 쌓여가고 있었다.


오늘은 함께 모인 바비의 생일. 그녀는 바르셀로나에 위치한 한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공학 엔지니어였다. 그녀는 연구 기관의 초청을 받아 이곳으로 이사와 거주한 지 거의 10년이 다 되어간다고 한다. 친구와 콘서트를 다녀와 늦게 합류한 그녀에게 준비한 초콜릿 케이크 한 조각을 선물했다.

“정말 고마워. 케이크라니, 이건 진짜 생각지도 못했네!”

“그래도 생일인데 먹어줘야지!”

바비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오는 길에 가볍게 산 단출한 케이크 한 조각에도 우린 쉽게 즐거워졌다. 가게에서 건네어준 포크를 받아 들고 작게 한 입씩 초콜릿 케이크를 잘라먹었다.


“늦었다, 이제 슬슬 가야겠는데?”

“늦은 정도가 아니라 막차가 끊기겠어.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갈까?”

새벽 한 시 반이었다. 이미 정규 노선은 끊기고 기숙사로 돌아가려면 야간 버스를 타야 했다. 시곗바늘이 우리들 말소리를 타고, 웃음소리에 밀려 더없이 빨리 흘러간 게 분명하다.

“다음에 볼까?“

“당연히 다음에 봐야지.“

“못 물어본 게 있어.”

“마찬가지. 넣어뒀다 다음에 꺼내자고.”

그래도 모든 걸 터놓고 보여줄 수는 없어, 스스로가 너무 연약해지는 걸, 하고선 조금씩 숨기고 가리려고 했다. 그런 내게 건네지는 질문은 다정하게 명료했다. 네 생각은 어때,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데, 왜 그렇게 생각해, 넌 어떤 부분에 반대해, 그런 경험이 있어? 연이어 꼬리를 물고 거리낌 없이 들어와 버리는 질문들.


마음의 경계선이 조금씩 흐려져 갔다. 올리 바비 옥사나 크리스, 말도 많고 감정도 헤픈 바르셀로나의 소크라테스들. 고민거리도, 걱정거리도, 생각할 거리도 많은 우리들 앞에 현명한 길이 펼쳐지기를. 혹은 현명한 길을 밟아나갈 용기와 결단력을 갖기를. 어쩌면 길은 길일뿐, 현명한 길과 바보 같은 길로 나누어져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누구에게는 현명함이 다른 이에게는 어리석게 보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럼 우린 방랑하며 살아야 겠다. 바르셀로나의 방랑자들이 언제까지고 즐거운 방랑을 이어 나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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