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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있어라, 나는 간다

스페인 유랑단 10

by 이해린

세비야 대성당

세비야는 역시나 더웠다. 남부로 온 이후로 49도가 넘는 일관성을 보여줬기 때문에 더위는 놀랍지도 않았으나 그렇다고 적응될 만한 종류의 것도 아니었다. 뙤약볕 아래 세비야 대성당은 여전히 장엄하게 서 있었다. 무어인이 지었던 이슬람 사원이 13세기 다시 가톨릭이 지배하게 되며 대성당으로 재탄생한 곳, 그러니 가톨릭과 이슬람의 문화가 혼재하는 건 당연하다. 다만, 상이한 두 문화가 치열하게, 때로는 피를 흘려가며 뒤섞인 유구한 시간이 현재까지 다다른다는 것이 경이로운 것이다.


에스파냐 광장

1929년 박람회를 준비하며 완공한 에스파냐 광장은 세비야의 중심에서 두 팔을 벌리고 낯선 이들을 반긴다. 줄 지어선 기둥과 그 사이 놓인 각 도시를 상징하는 타일 벽화가 빼곡히 채운다. 그런가 하면 거대한 반원형 광장은 너른 품으로 구조물을 안고 있는 듯하고, 물길은 테두리를 타고 흐른다. 낮이 떠나며 드리워지는 붉은 그늘이 얇은 장막처럼 광장을 덮을 때, 그 안에 서있는 사람들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온기를 느끼기 시작한다. 붉은 기운이 점차 파랗게, 이윽고 보랏빛으로 물들면 일렬로 서 있는 가로등에 불이 새초롬히 들어온다. 가로수 등은 잔잔한 수면 위에 노랗게 피어오른 불빛으로 또 다른 에스파냐 광장을 그린다.


다시 바르셀로나

세비야의 시간을 마치고 다시 바르셀로나로 돌아왔다. 7월 26일,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이제 그리 길지만은 않다. 한 시간, 하루, 일주일, 시간을 겹치고 모아 한 달을 만드는 건 지난한 과정이기에 그 한 달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일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리본을 묶는 것보다 푸는 게 더 빠르고, 돈을 버는 것보다 쓰는 게 더 쉬운 것과 같달까. 새벽에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달도 멋지게 떴는데 우리 만나서 수다나 떨자. 아니, 지금 몇 신데. 새벽 한 시 반. 뭐야, 완전 새벽이잖아. 알아, 근데 잠이 안 와, 잠이, 시간 가는 게 아깝잖아. 그렇다. 엄마는 기어코 흐르는 시간을 붙잡으려 손이라도 뻗치고 싶었던 거다.


학교 탐방

아침에는 엄마 손 잡고 학교를 한 바퀴 빙 둘렀다. 여기가 도서관이고, 여긴 내가 자주 가는 카페. 그리고 저 쪽으로 올라가면 초등학교랑 중학교도 있어서 교육학부 학생들이 실습도 할 수 있어. 내가 자주 가는 교육학과 연구동은 여기. 2층에 교수님 사무실이랑 박사생 연구실이 있어. 어때, 멋지지? 여기 안전하고 좋은 곳이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밥 잘 챙겨 먹고, 좋은 곳에서 좋은 사람들하고 재미있게 지낼게. 우리 교육학과 건물 앞에서 사진 한 번 찍을까?


티비다보

마지막 날이다. 한 달간의 머무름 끝에 마지막 날은 어디에서 보내는 게 좋을까. 그때 룸메이트가 티비다보 전망대를 꼭 가라고 한 게 떠올랐다. 자기는 가족이나 친구들이 올 때 티비다보를 위한 날을 꼭 남겨 둔다고. 그 이유가 궁금해 티비다보 전망대는 미리 알아보거나 답사를 다녀오지도 않았다. 1868년에 지어져 스페인에서 제일 오래된 놀이공원이 있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다만, 티비다보 전망대를 위한 날을 남겨 두어야 한다는 건 내내 기억하고 있었다. 프랑스를 다녀오고 그 후 며칠은 쉬느라, 또 남부를 다녀오기 전과 후에도 짬이 나지 않아 티비다보 전망대는 여행이 끝나기 바로 전 날 가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마지막 대미를 티비다보 전망대에서 장식하게 되는 것이었다.


지하철에서 소동이 있었다. 푸니쿨라(꼬마 열차)를 타야 되는 역은 지하철의 중간 칸에서만 하차가 가능한데 그걸 모르고 앞차에 탔다가 놓쳐 버렸다. 영문을 모르고 되돌아가는 길에도 여전히 그 역에서 지하철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에요? 그랬더니 지하철에 탄 현지인 몇 명이 목소리를 높이고, 손을 휘저으면서 열성적으로 알려 주신다. 여기 말고, 가운데 칸! 앞뒤 열차 칸 말고 가운데 칸! 아이고, 그럼 지금이라도 가야지. 가운데 칸으로 지하철 내에서 이동하려니까 문이 안 열린다. 아, 이건 지하철 내 이동이 안 되는 구형 모델이었다. 문을 열어보려는 제스처만 했는데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날아든다. 저 문은 안 열려, 내려서 거꾸로 다시 타야 돼, 여기선 못 움직여! 이번에 다시 돌아가는 세 번째 지하철에서는 심기일전했다. 혹시 몰라 문 앞에 선 아저씨에게도 재차 확인했다. 여기 티비다보에서 내리는 문 맞나요? 척 올라가는 엄지 손가락. 아저씨는 출구 방향까지 짚어주고 그쪽으로 가는지 머리를 빼꼼 내밀어 살펴봐 주었다. 바르셀로나 시민의 타고난 오지랖이 우리 가는 길을 수호해 주었다


꼬마열차를 타고 언덕배기까지 올랐다. 거기에서만 해도 동네가 다 내려다보았다.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경만 봐도 이미 꽤 높은 지점까지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거기에서 버스를 타고 더 올라간다. 꼭대기까지.


꼭대기에서는 모든 바르셀로나가 다 내려다 보인다. 한쪽은 바다가 펼쳐져 있고, 다른 쪽으로는 낮은 산등성이가 보인다. 놀러 온 가족들과 친구들, 체험 학습을 나온 건지 단체 티를 입고 다니는 학생들과 선생님들. 날씨는 청명하다. 자이로드롭에서 탄 사람들이 손을 번쩍 들고 함성을 내지르고 있다. 붉은 레일의 끝까지 닿은 자이로드롭이 아래로 추락한다.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은 지중해 바다 너머로 사라진다. 범퍼카, 회전목마, 후룸라이드, 귀신의 집, 아이들을 위한 숲 속 놀이터. 한 바퀴를 걸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면 티비다보 놀이공원 곁의 지키는 하얀 벽의 성당을 마주한다. 사그랏 코르 성당으로 들어가려면 아치형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올라가는 길에 한 번쯤 어깨너머로 눈길을 던진다. 찰나의 시선에도 단번에 시야를 가득 메우는 건 바르셀로나. 도심과 지중해 바다 한 자락까지 전부 내려다보이는 풍경 속에서 오색조명이 켜진 회전목마와 관람차가 반짝거리며 돌아간다. 사람들의 발걸음 가볍고 경쾌하고, 얼굴 위를 스치는 바람은 선선하다. 들리는 소음, 보이는 경관, 만져지는 감촉은 모두 부드럽게 흐른다. 고개를 올려 성당의 지붕 끝까지 훑어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예수상과 마주한다. 예수는 이 모든 걸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예수의 손 끝을 스쳐 지나가는 롤러코스터는 눈 깜빡할 새 사람들의 환호성만 남긴 채 자취를 감춘다.


잘 있어라 나는 간다

여행은 너무나 멋지고 환상적이었기에 분명 아쉬울 것 하나 없어야 맞는데 왜 자꾸만 헛헛한 마음이 비집고 나오는지 도통 모르겠다. 넷이었다가 하나가 되어서 그런가, 곁을 채워주었던 체온이 사라져서 그럴지도, 아니면 도리어 그만큼 멋지고 환상적이었어서 그런 걸까. 답은 찾을 수 없고, 애초에 답이 있을 리가 없는 것도 알고 있다. 너무 맛있어서 한숨에 다 털어 넣고 싶던 걸 참고 참어 하루에 한 알씩만 까먹었는데 벌써 이만치 동난 30구짜리 마카롱 박스. 하지만 하나하나 까먹을 때마다 황홀한 달콤함이었다. 그 사실을 위안으로 여기고 아쉬움을 삼켜본다. 그리고 남겨진 빈자리마저 여정이 선사한 충만한 기쁨으로 채우려고 한다.


바르셀로나, 잘 있어라, 나는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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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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