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번 주 금요일, 뮌헨에서 만나요.

알햄여나 01

by 이해린

그는 알이고, 나는 햄이다.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는 다른 이야기다. 그냥 그렇게 됐다. 하여튼 우린 알과 햄이다. 내가 알, 하고 부르면 그는 햄, 하고 답한다. 같이 여행 가고 싶다, 하니까 그럼 햄이랑 여햄이나, 하더라.

우리 사이에는 7시간의 시차와 대강 두어 개의 바다, 열댓 개의 나라가 있다. 모르긴 몰라도 꽤 먼 거리긴 할 것이다. 그래도 소신껏 같이 여행 가고 싶다, 말했다. 나름의 희망 사항이었지 반드시 가라는 법은 없었다. 무릇 현대의 직장인은 바쁘고 고된 법이니까. 하지만 말이 나오고 얼마 안 되어서 어딜 갈지 논했다. 몇몇 나라가 나왔고, 다 마음에 들었다. 난 원래 대충 다 마음에 들어 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거론된 곳들은 하나 같이 평소에도 궁금했던 곳들이거나 얘기하다 보니 정말 흥미가 생긴 곳들이었다. 그러다 또 며칠 안 가서 비행기표가 어디서 튀어나왔다. 어라라라, 이러다 진짜 가버리겠는데? 아니, 정말로 여행을 가야 하니 티켓을 사는 건 당연하지만 보도 못한 굉장한 신속함이었다. 그 주에는 엑셀표도 생성 됐다. 칸에 입력하면 자동으로 계산도 되는 그런 진짜 엑셀이었다. 숙소 예약 했어, 오 벌써? 기차표 샀어, 그거 지금 해야 되는 거였나, 패스 종류 별로 뭐 사야 될지 고민하다가 비교표 만들어놨어, 비교표…? 놀라움과 감탄의 연속이었다. 제이는 괜히 제이가 아니구나, 이 정도면 대문자 제이가 아니라 태문자 제이야. 엠비티아이, 이 정도면 과학이 아닐까. 일정이 생기거나 새로운 예약을 할 때마다 스프레드 시트가 자가증식하고 있었다. 돌이켜 보건대 그때 이미 이토록 평탄한 생에 한 번도 하지 못한 여햄을 하겠구나 직감했던 것 같다.


뮌헨에서 만나 스위스를 거쳐 바르셀로나에서 작별하자는 대략 17여 일간의 여햄이 될 예정이었다. 디데이가 한 자리 수로 떨어질 때도 크게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 알을 만나러 공항 터미널에서 나오는 길에도, 서로 다른 터미널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을 때나 그래서 마치 1과 2분의 1 터미널이라도 있는 것처럼 씩씩하게 걸어가던 때에도 말이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포옹을 하고 나니 실감이 났다. 그제야 현실이 됐으니 말이다. 마침내.


비행을 극렬히 싫어하는 나로서는 두 시간 반 비행도 고단했는데 알은 14시간씩이나 비행을 한 것치고는 시들시들한 파김치까지는 아니었다. 그래도 나름의 각이 잡혀 있는 갓김치 정도는 되어 보였달까. 내 도착 시간이 더 늦어 3시간씩이나 공항에서 기다렸는데도 말이다. 다행이었다. 우린 당장 내일 기상하자마자 맥주를 들이키러 가야 했다. 첫 여햄지 뮌헨은 옥토버페스트를 위해서였다. 물론 둘 다 맥주에 조예가 깊은 건 아니었지만 축제와 사람들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보장되어 있을 것 같았다. 포옹, 포옹, 보고 싶었어 알, 나도 햄. 짐을 주섬주섬 챙기고 캐리어를 돌돌 끌었다. 비행기에서 잘 잤으려나, 그냥저냥, 피곤하겠다, 빈 좌석도 많아서 편하게 왔어. 두런두런 얘기를 하면서 지하철을 탔다. 저녁에 퇴근하고 만나서 저녁 먹으러 가는 길 같았다. 각자 비행기를 타고 오래간만에 만나 이제 막 뮌헨에 도착한 것만 빼면 말이다.


우리의 숙소는 운터하힝이었다. 뮌헨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는데 시내까지는 어차피 바로 앞 지하철역에서 20분만 타고 가면 되는 거리였다. 운터하힝 집은 숙소의 집을 통째로 빌리는 게 아닌 주인과 함께 공용 공간을 나누며 게스트인 우린 한 방에서 생활하는 식이었다. 예정보다 늦게 도착하게 됐다. 어둑한 밤에 기찻길 바로 옆에 난 쪽 길을 지나가는데도 전혀 위험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공기는 선선하고 주변은 고요해 어둠이 내려앉은 풀숲에 둘러싸인 철길과 그 옆의 쪽 길은 나름대로의 평화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집주인이 우릴 기다려주고 있었다. 그녀는 독일에 거주하는 프랑스 몽펠리에 사람이었다. 따뜻한 남프랑스에서 겨울이 지독하게 시리다는 독일까지 오다니. 집주인은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고, 집에 대해 간략히 알려 주었다. 밤이 늦었다. 우린 차례로 씻고, 짐을 풀었다. 그리고 침대에 뻗었다. 풀-썩.


그 자리 그대로 눈만 빼꼼 뜨니 아침이었다. 잠깐, 5분도 안 지난 거 같은데 밖이 왜 밝지? 옥토버페스트는 장내에 방문할 수 있는 텐트가 많은데 주로 유서 깊은 양조장은 관광객뿐 아니라 현지인에게도 인기가 많아 금방 자리가 빼곡히 찬다고 한다. 우린 두 명이어서 긴 테이블에 우리 앉을자리는 있겠지 싶었지만 만약을 대비해야 했기에 차라리 조금 부지런을 떨기로 했다 (여행 내내 답지 않은 부지런을 떨 줄이야 이 때는 미처 몰랐다). 화창하고 맑은 하늘에 비해 아침 공기는 어쩐지 서늘했다. 운터하힝 역으로 향하는 길에도 전통 의상을 입고 서 있는 사람들을 봤다 남자는 갈색 조끼에 반바지, 긴 양말을 신었고 여자는 블라우스와 치마를 입었다. 옥토버페스트가 열리는 놀이공원으로 향하니 전통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다들 한 손에 맥주캔을 액세서리처럼 달고 있었다. 얼굴이 상기된 저 사람은 벌써 술에 취한 걸까, 바람이 차서 그럴까. 아무래도 전자일 확률이 높겠지? 아침 아홉 시긴 하지만 말이다.


아직 옥토버페스트의 축제장이 열리려면 십 여 분이 남아있었다. 공식 웹사이트에 실린 축제장 지도를 보면서 우리가 어디에 서있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 어떤 양조장이 나올지 한참 따져보고 있었다. 어디가 어딘지 도통 알 수가 있어야지 말이다. 그러는 사이 문이 열렸는지 앞쪽에 서있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점점 사람들의 이동 속도가 빨라졌다. 내친김에 입구까지 뜀박질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로지 맥주 한 잔을 위하여. 세상에, 우리가 뮌헨에 오긴 왔구나. 아침 댓바람에 맥주 캔을 손에 들고 또 다른 맥주잔을 위하여 냅다 뛰어다니는 사람들을 다 보고 말이다.


keyword
수요일 연재
이전 22화잘 있어라, 나는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