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끓여 주는 라면은 영 맛이 없었다. 짭조름해야 할 면발은 아무리 쪽쪽 빨아 보아도 밍숭맹숭하기만 했다. 면발조차 탱글탱글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퉁퉁 분 면발은 쇠젓가락의 인질로 잡힌 것처럼 그 사이 힘 없이 끼여 선풍기 바람이 회전해 불어올 때 마다 덜렁덜렁 매달려 있기만 했다. 희끄무레한 국물은 금방이라도 밥그릇에 넘칠 것처럼 아슬아슬한 수위를 보였다. 그래도 내 젓가락질에는 쉼이 없었다. 그렇게 맛 없는 라면을 끓이기도 힘들텐데, 할머니는 그 어려운 걸 어떻게 이렇게 해냈지, 생각하면서도 라면 한 그릇을 비워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오후 3시가 되면 책 가방을 매고 집에 왔다. 가방은 그 안에 든 빈약한 내용물에 비해 제법 크기가 컸다. 고작 해봐야 알림장 한 권, 필통, 교과서 두어권이었을 건데 금싸라기도 싸들고 다니는 것처럼 유세를 부리던 나는 5학년이었다. 5학년은 공부도 많이 하고, 외워야 될 것도 많고, 시험도 많이 본다고 했다. 책 읽는 게 얼마나 재밌는지, 학교에서 어떤 상을 받았는지, 국어 수업 시간에 뭘 배우는지도 말해 주었다. 할머니는 내가 대단하다고 했다. 내가 아주 똑똑하다고 했다. 나는 할머니 앞에서 아닌 척 자랑하는 걸 좋아했다. 아무 것도 아닌 게 모든 것이 되어 버리는 순간을 만끽하고는 했다. 할머니가 앉혀주는 구름 위는 세상에서 제일 높은 곳이었다.
우리 집에는 작은 화이트 보드가 있었다. 할머니랑 나는 검정 보드 마카로 글씨를 썼다. 할머니 글씨는 반듯했다. 그래서 할머니가 글씨를 잘 쓴다고 생각했다. 빨리 쓰고 싶어서, 귀찮아서, 다른 거 하고 싶어서. 갖가지 이유로 내 글씨는 휘청이고 구부러지기 일쑤였는데 할머니 글자는 똑바르고 곧았으니까. 할머니가 글씨를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아주 나중에, 할머니가 없어지고서야 알았다. 내가 아는 걸 자랑하느라 몰랐나보다. 작달막한 화이트 보드에 내가 아는 걸 꾸물꾸물 써내려가느라 할머니가 똑같은 글자만 반복해서 쓰는 걸 알아채지 못했던 건가?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떠올릴 수가 없다. 할머니는 배 옥 희 배 옥 희 배 옥 희, 자기 이름만 반복해서 썼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이 혜 린 이 혜 린 이 혜 린, 내 이름만 반복해 썼을 수도 있다. 도저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할머니는 머리가 길었다. 치렁치렁 길었다. 할머니가 등받이 의자에 앉아 있으면 그 머리가 어디 끼거나 걸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길었다. 겨울에는 목이 시리면 머리카락을 둘러도 되겠다 할 정도로 길었다. 그렇지만 그걸 모를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할머니는 늘 비녀로 치렁치렁 긴 머리를 한 번, 두 번, 세 번도 넘게 꼬아서 틀어 올렸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이유는 할머니가 욕실에서 머리를 감으려고 욕조에 걸터 앉아 베베 꼰 머리를 푸는 걸 보아서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언제까지고 할머니의 치렁치렁 머리가 어디까지 오는지 알 턱이 없었을 거다.
할머니는 우리 집에서 여름을 지냈다. 뭉게뭉게 구름처럼 흩어지고 날아간 기억 속에 여름이 유독 선명하게 새겨진 건 그 뒤에 몇 가지 단서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먼저, 할머니가 끓여준 맹탕 라면을 후후 불면서 먹을 때 선풍기가 왼쪽으로 탈탈, 오른쪽으로 탈탈, 고개를 까딱이면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바닥에 한 쪽 무릎을 세워 앉아 있을 때 한 손에는 언제나 부채가 들려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빈약한 내용물에 비해 제법 학생다운 가방을 매고 집에 돌아오던 기억 속의 나는 항상 반바지와 반팔 차림새였고, 할머니는 반팔 레이온 셔츠와 얇은 냉장고 바지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희끄무레하다, 할머니 라면이 뿌얬던 것처럼. 하나씩 하나씩 집어서 꿰어 보면 퍼즐처럼 어떤 조각과 다른 조각이 맞추어 질 때가 있다. 주홍색 라면 국물, 바깥에서 맴맴 울던 매미 소리, 탈탈 돌아가는 선풍기, 펄럭이는 할머니의 손 부채, 한 번 두 번 세 번도 넘게 돌려야 되는 할머니의 치렁치렁 머리. 희한한 건 아무리 열심히 조각을 맞추어 보아도 할머니가 완전하게 보이지 않는다. 도저히 생각이 안 나서도 그렇고, 떠올려도 이게 맞는지 저게 맞는지 헷갈릴 때가 많아서 그렇다. 그래서 내 마음 속 할머니는 언제나 채도도 낮고, 명도도 낮다. 뜨듯미지근하다. 할머니 라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