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한 번도 궁금한 적이 없었다.
옛날 우리가 해외 생활했을 때 엄마가 어땠는지, 아빠 일은 힘들진 않았는지, 엄마가 친구는 있었는지, 언니와 내가 학교에 가면 뭘 했는지.
대학교 졸업하고 나서야 엄마가 사실은 엄마보다도 이름 석자로 더 많이 불리던 때가 있었고, 아침마다 교복을 개켜 입을 때가 있었으며, 졸업 앨범 마지막 장에 옹골찬 장래 다짐을 적어내렸던, 참 많은 이야기를 지닌 사람이었구나, 하고 깨달았다.
다만, 그 생각을 하게 됐을 무렵에는 내 머리가 많이 큰 이후였다.
엄마는 이미 이름 석자보다 아무개의 엄마로 불릴 때가 더 많게 되었고, 딸들이 다음 날 아침 교복을 입기 위해 꾸깃한 와이셔츠 주름을 다려야 했고, 현실에게 꿈을 양보해야 됐었다.
몇 해 전 여름, 한 학기 동안 틈틈이 모은 월급으로 비행기 표를 사고 에어비앤비를 예약해서 엄마와 동생과 함께 프랑스를 다시 찾았다.
프랑스에 대한 갖은 환상을 지녔던지라 대학 시절부터 파리만 일곱 번은 오다니던 나였는데 친구와 가거나 혼자 가면 갔지, 가족들과 간 적은 없었던 게 아쉬워 반드시 불이 들어온 에펠탑을 함께 보리라 마음을 먹고 티켓을 끊었더 차였다.
영국의 몇몇 도시를 돌고 비행기를 타고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날씨는 며칠 내리 맑았고, 덕분에 파리의 푸른 녹음과 탁 트인 하늘을 엄마와 즐길 수 있다는 게 사뭇 특별하게 느껴졌다.
파리에 묵은 몇 날 며칠 동안 우리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여행객이라면 가야 할 법한 곳을 발길이 가는 대로 걸어서 모조리 다 섭렵했고, 아무리 짜고 간이 세도 묵묵히 먹어야 할 음식들을 하나씩 처리했다.
마치 퀘스트를 깨나 가는 게임 캐릭터처럼 우리에겐 거침이 없었고, 반나절마다 레벨이 올라가고 때가 되면 음식을 먹어서 에너지바를 적당히 유지시켰다.
유럽에서 여름의 해는 게으르다.
느린 걸음으로 넘어가며 주홍빛으로 물드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다가 식당에 들어가 다시 한번 짜디 짠 고기 요리를 먹으며 배를 채웠다.
식당을 나왔을 무렵에는 풍경은 어둑해졌고 조명과 가로등만이 빛을 내리쬔 노란 파동을 일으켰다.
얼마 더 걷지 않아 조명등이 들어온 에펠탑이 시야에 들어왔다.
엄마는 20년 만에야 비로소 거대한 철제탑과 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
마른 잔디밭에 앉아 물었다, 우리 옛날에 프랑스 살았을 때 어땠어, 하고 운을 뗐다.
그랬더니 엄마가 뭐라 그랬냐면, 아빠가 일 나가고 너희들 학교를 데려다주고 나면 할 게 없었어, 그래서 너희들이 올 때까지 집에서 기다렸어. 장도 보고, 볼일도 다 보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너희들 기다렸지.
엄마는 우리를 기다렸다고 했다.
우리 주변에는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크게 틀으며 따라 부르는 스페인 사람들도 있었고, 술을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프랑스인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엄마가 하는 말들이 내 귀에는 제일 크게 울렸다.
엄마는 기다리면서 외롭진 않았을까. 지루하거나 불안하진 않았을까. 무슨 생각을 하면서 그 긴 시간을 채웠을까.
엄마는 그날 밤에 에펠탑 야경을 처음 봤다고 했다.
한 시간마다 한 번씩 점멸하는 그 불빛을 말이다, 파리 길거리를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으면서.
그래서 엄마랑 나랑 동생은 11시까지 그 자리에서 앉아서 조명이 켜지길 기다리다 몇 번이고 계속 봤다.
엄마는 언제까지고 그 불빛만 쳐다봐도 좋겠다고 했고, 그 말을 들은 나는 한 시간이 아니라 십 분마다 한 번씩 조명이 켜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언제 한 번은 저녁을 먹는 중에 아빠가 엄마한테 회사 슈퍼바이저 얘기를 하면서 도저히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듣겠다고 고개를 흔드는 걸 본 적이 있다.
그 장면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 당시에 들었던 말들이나 행동을 정확히 기억해서가 아니라 주변 공기의 무거움을 내 작은 몸으로 받아냈던 감각이 무심결에 떠오를 때가 있기 때문이다.
아빠는 한국에서 정말 똑똑한 사람인데 회사에서 어떤 일들을 겪었길래 집에서 그렇게 한숨을 푹푹 내쉬었을까.
지금이라면 아빠랑 술이라도 하면서 얘기를 들어줄 수 있을 텐데, 그때의 나는 정말 어렸고 아는 게 많지 않았다.
어른들이 해야 하는 일들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책임감의 무게에 대해서는 더더욱이나 알 턱이 없었다.
아빠는 주중에 그렇게 일을 하고, 주말에는 5시간 10시간이라도 운전을 해서 우리들을 데리고 다른 도시, 다른 나라, 또 다른 사람들을 구경시켜줬다.
내가 기억하는 한 아빠는 언제나 운전대를 잡고, 엄마는 보조석에서 오렌지를 까거나 딸기 꼭지를 따서 뒷좌석에 앉아 있는 우리 입에 넣어줬다.
뒷좌석 세 자리를 한 자리씩 차지한 우리 남매는 모이를 채가는 아기새들 마냥 입만 뻐끔 벌려 엄마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물어다 주는 과일 조각들을 냅다 집어먹었다.
휴게소에 들러 샌드위치를 사 먹고 과자들로 배를 채우다가 눈이 가물가물 감기면 그대로 잠에 빠져 도착하기까지 내리 잤다.
그렇게 두 시간이든 여덟 시간이든 열심히 달려 엄마와 아빠는 우리 셋을 들쳐 매고 니스 해변에 갔고, 로마 성곽을 올랐으며, 바르셀로나 미술관에 들렀다.
참 재밌는 건, 미술관에 걸려있는 명화들보다도 그날 밤 호텔에서 동생이 기저귀도 안 차고 돌아다니다가 침대에 실례를 한 일이 더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는 거다.
오늘날 내가 홀로 낯선 곳에서 제3언어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니까 90년대 그 당시에 어린 똥강아지 셋 데리고 그 시절에 나가 살았던 게 얼마나 힘들었을지 돌이켜보면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들이 많이 든다.
이를테면, 마트에서 장을 보더라도 꽂힌 푯말에 적힌 뜻이 파악이 안 되는 바람에 이게 무슨 채소인지, 어떤 제품인지 모를 때가 허다하다.
핸드폰을 꺼내 사전을 찾으려고 해도 막대기가 꼴랑 하나 둘로 떨어지면 데이터도 터지지 않아 그저 그림만 참고하거나 영어나 스페인어로 유추해 골라야 할 때가 더러 있다.
혹은 길거리를 지나갈 때, 시야에 들어온 사람들이 전부 백인일 때, 동양인으로서 드는 이질적인 감정을 무어라 설명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
그것은 어떤 불편함을 동반할 때가 있는데 그 내키지 않는 감정은 내가 동양인이라는 걸 스스로 자각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주변에서 보내는 무언의 시선이나 행동에서 발생하는 심리적인 방어 기제로써 발현된다.
그렇다면 90년대 엄마와 아빠는 어땠을까, 생각해보면 가슴이 뻑적지근해져 온다.
학교에 동양인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던 시절이었던 데다가 우리나라는 국가재난급 경제적 위기를 겪으며 휘청거렸을 때다.
우린 변방의 작은 국가에서 온 이방인들이었다.
길거리의 사람들, 표지판의 낯선 글자들, 들려오는 이질적인 소음들.
정말 사소한 것들마저 날 위협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순간들이 분명 이따금씩 있었다.
어린 동생을 태우고 유모차를 태우고 지나가던 엄마에게 담벼락에 붙어 원숭이 흉내를 내던 동네 어린애들이나 유치원 놀이 시간에 날 고의적으로 밀쳐 넘어트리던 같은 반 애와 같은 공간을 나누어 생활하는 것이란 쉽지만은 않았다.
그 시절 너무나 젊고 성실했던 엄마와 아빠를 떠올리면 톡톡 내리는 이슬비를 맞으며 옅게 떨리는 연잎처럼 마음이 연약하게 요동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걸 잠자코 등에 짊어지고 언덕배기를 걸었던 젊은 엄마 아빠는 내 눈에는 거인보다도 커 보였던 것이다, 300미터가 넘는다는 에펠탑보다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