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Gente 02
<Jenn, the funny one>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감당하기 버겁던 그 에너지를 기억한다.
흘러넘치는 연료를 꼴깍꼴깍 용케도 그 작은 몸으로 다 담아낸 그녀는 에너지의 전환과 발산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제니퍼, 하지만 제니퍼라고 부르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자기는 젠 with a double n이라고 소개하던 미국에서 온 여자애였다.
9월 중순이었는데도 해가 한창 땅을 달구는 몇 시간 동안은 35도를 훌쩍 넘기는 무더운 날이 연이어지던 중 우리 클래스의 첫 개강 날짜가 잡혔다.
오리엔테이션 날에 젠은 알이 큰 까만 선글라스를 쓰고, 철제 접이식 의자에 다리를 꼰 채 비스듬히 앉아있었다.
얇은 오렌지 점프슈트를 입은 그녀의 팔과 다리는 까무잡잡하게 태닝이 되어있었고, 이를 씩 드러내고 웃을 때마다 하얀 건치가 찡긋 빛나는 듯했다.
프로그램을 처음 시작하는 날인만큼 다들 조금은 어색한 인사만 주고받았지만 젠만큼은 반짝거리는 미소를 흩뿌리고 있었다.
한 명씩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에 젠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목을 풀었다.
그녀는 타고나길 목청이 좋은 사람 중 하나임을 입을 열자마자 들리는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젠은 동북부에 위치한 메인 주에서 나고 자라 대학교를 졸업한 뒤부터는 쭉 콜로라도 주에서 지냈다고 한다.
그녀는 여름에는 해양스포츠, 겨울에는 스키를 가르치는 스포츠 스쿨 강사이자 운영자였다.
선명한 태닝 라인은 지난여름 동안 닻을 올리고 보트 위에서 백텀블링을 하며 다이빙을 한 결과물임에 분명했다.
이어서 그녀는 석사 과정을 통해 아동의 심리와 놀이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더 깊이 배우고, 고국으로 돌아간 뒤 스포츠 교육산업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던 젠은 말 그대로 열망에 가득 찬 야심가였다.
정식 일정이 끝난 뒤 우리는 다 같이 점심을 먹으러 시내 한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한낮의 태양이 이글거리고 있었고, 열 여명 남짓한 일행 전부 한 잔씩 차가운 음료를 먼저 주문했다.
젠은 갓 짜낸 오렌지 주스를 한 번에 들이켰고, 잔에서는 얼음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글라스 잔 표면 위를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엄지손가락으로 쓰다듬어 털어낸 그녀는 자국의 건강보험 정책과 트럼프가 지난 몇 년간 미국을 얼마나 끌어내렸는지, 사회의 양극화가 일상생활에 어떤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토로했다.
언성을 높아질 때면 의자를 달그락거리는 바람에 테이블 위에 놓인 접시와 오렌지 주스잔이 이따금씩 맞부딪혀 챙그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Piper, the fastest three-legged dog>
젠은 개를 키웠다.
그러니까 젠은 미국에서 올 때 이민가방과 니콘 카메라뿐만 아니라 개도 챙겨 왔다는 거다.
바다 건너온 그녀의 개, 파이퍼는 점박이 무늬를 한 세 발 달린 래브라도다.
사연인즉슨, 파이퍼는 젠에게 입양되기 전 큰 농장에서 살던 개였는데 생활하던 중 농기구로 인한 사고로 뒷발 하나를 잃었다는 거다.
튼튼한 다리 대신 뭉툭하게 튀어나온 몽우리를 만지면 이렇게 순한 개가 얼마나 아팠을까 하는 마음이 들지만 늠름한 파이퍼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는다.
어느 날, 젠으로부터 주말 동안 마드리드로 여행 가는 사이에 파이퍼를 돌봐 줄 수 있냐는 문자를 받았다.
물어 뭐하리, 난 부리나케 하우스메이트 야니스에게 이야기 한 뒤, 젠의 부재 동안 파이퍼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사료는 이 컵으로 퍼서 주면 되는데 내가 벌써 지퍼락에 소분해놨으니까 그거 한 번씩 열어서 주면 돼. 장난감하고 방석은 이 가방 안에 넣어놨고, 배변용 비닐은 저기 걸어놨어.”
여분 키를 미리 받은 나는 젠네 집에서 파이퍼 용품을 받아 들고 시내를 거쳐서 우리 집으로 다시 돌아가 이틀을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신경이 쓰였던 건 중간에 들를 곳이 있어서 왕복으로 한 시간 반은 걸릴 여정이 예상되는 거리였기 때문이다.
“젠, 혹시 파이퍼랑 한 시간 넘게 걸어도 괜찮을까?”
“당연하지. 좋아 죽을 걸?”
“애가 더워할 거 같아서.”
“물만 챙겨가면 괜찮아! 뭘 걱정해, 얘 산악 구보하면서 큰 애야.”
그 말에 한시름 덜고 파이퍼를 데리러 젠의 집으로 향했다.
열쇠 구멍에 키를 꽂자마자 현관문 너머로 꼬리가 윙윙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전 만남들에서 파이퍼와 친해지기 위해 간식을 마구 뿌려대던 나였는데 그에 대해 학습된 반사 작용인지 파이퍼는 헬리콥터처럼 꼬리를 돌리다가 별안간 헥헥 대면서 달려들었다.
젠이 가끔씩 파이퍼의 잔뜩 상기된 모습을 따라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젠은 온갖 얼굴 근육을 다 끌어다가 잔뜩 찌그러진 표정을 짓는데 그 얼굴이 별안간 떠올랐다.
누가 젠 강아지 아니랄까 봐 주인 닮아 에너제틱하다 못해 산만하다.
현관 옆에 박힌 못에서 목줄을 끌렀더니 파이퍼는 잠자코 고개를 숙이는데 그 와중에도 꼬리는 탁탁 거리며 바닥을 치고 있다.
“갈까?”
현관문을 여니 뒷발을 박차고 뛰어나가려고 한다.
파이퍼와 함께한 주말 동안 파이퍼가 세 발 달린 개여서 정말 다행이라고 거듭 생각했다.
네 발을 온전히 가졌더라면 아마 내 두 발로는 못 쫓아갈 게 뻔했으니 말이다.
<Jenn, with her biggest heart>
코르도바에 생활한 지 두세 달쯤 지났을까, 그동안 우린 무더운 날씨 속에서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는 행정 처리를 해나갔고, 차차 새로운 환경 속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낯선 거리들과 건물 사이에서 지나치게 짠 음식과 너무나도 빠른 언어에 둘러싸여 하루하루 정신없이 흘러가는 와중에 우리 반 24명 친구들은 제각기 비슷한 관심사와 취미 생활을 공유하며 우정을 쌓아나갔다.
두루두루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는 건 아무래도 학사일정이 하루 반나절 넘게 같이 보내도록 설계된 이유도 있지만, 이 작은 도시에 타지에서 온 이방인이라고는 사실 몇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뭉쳐서 다녔던 이유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추수감사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족들과 함께 추수감사절을 보내지 못하는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특별한 자리를 만들고 싶다던 젠은 Friendsgiving Day를 열겠다고 당당히 선언했다.
24명의 클래스메이트와 교수님까지 초대하는 담대함을 보인 젠은 그 전날까지만 해도 갖은 후회를 다 했다.
잠이 안 온다며, 파티 망할 거 같다며 온종일 좌불안석이던 그녀의 집 현관을 열어보니 추수감사절 그 자체를 피부로 느끼는 것만 같은 온기가 있었다.
일단,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대끼는 것만 해도 명절 분위기가 물씬 났는 데다가 각 나라의 음식을 다들 준비해왔기 때문에 파티의 맵시가 살았다.
젠은 친동생, 동생의 남자 친구와 함께 파티를 준비했는데 미국에서 추수감사절마다 먹는 음식들을 준비해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놓았다.
저녁을 다 먹고 나선 영화를 보기로 했는데 영화 상영을 위해 내 빔프로젝터를 빌려주기로 했다.
왜 영화 시청이 아니라 상영이냐면 천장에 빔 프로젝터를 쏜 뒤, 우린 온 집안에 있는 매트리스를 바닥에 깔아놓고 누워선 영화를 봤기 때문이다.
하얀 천장에 비추어진 아즈카반을 탈출한 시리우스는 해리와 함께 벅빅을 타고 하늘을 가로질렀고, 우린 감자칩을 먹으면서 혹은 이불을 목까지 덮고 그 날 하루를 따뜻하게 마감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에피소드가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건 그녀는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존재라는 거다.
미국 서부 태평양을 끼고 자동차 일주를 했던, 여름이면 닻을 올리고 넘실대는 파도를 넘어 항해했던, 설산의 능선을 따라 폴대를 찍어 누르고 스키 활강했던, 우쿨렐레를 치고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던, 그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그 반짝거림을 말로 다할 수 없는 젠.
천 조각을 맞추더라도 그녀를 다 알기 위해서는 무한의 조각들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