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덤’의 개념은 우리 역사 속에서 유구히 존재해왔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덤을 제 값어치 외에 거저로 조금 더 얹어 주는 일. 또는 그런 물건이라고 정의하니 이보다 더 의미를 확장시켜 무언가를 값을 치지 않고 더 얹어주는 행위라고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시장에서 엄마 심부름으로 콩나물을 살 때 덤이라며 한 움큼을 더 잡아주신다든지, 동네 가게에서 떡볶이를 먹을 때 종이컵에 흘러 넘 칠 정도로 조금 더 담아주신다든지 하는 일은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겪어봄직하다.
특히, 십여 년 전만 해도 덤을 주고받는 행위는 특별히 인식되지 않을 정도로 흔했던 걸로 기억한다.
내게 덤이란 작은 행복을 한 움큼 더 집어다 상대방의 손에 쥐어주는 따듯함의 표식이다.
검은 비닐봉지에 조금 넘치게 담아온 콩나물을 받아 든 엄마는 많이도 받아왔다며 냄비에 쏟아 넣고 얼큰한 콩나물 찌개를 끓여주었고, 방과 후에 친구들하고 달려간 떡볶이 집에서는 오백 원 동전으로 둘이 입김을 불어가며 간식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덤은 늘 내게 일렁이는 기쁨을 안겨다 준 고마운 존재였다.
리스본에서 3월 마지막 주부터 덤으로 햇빛을 더 받는다고 한다.
물론 뉴스에서는 그런 어조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일을 연중행사로 겪지 않는 한국인으로서는 생경한 일이면서도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가 없다.
햇빛을 덤으로 더 받는다니, 그러면 모든 하루가 한 시간씩 길어지는 거니까 그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일들을 머릿속에 세봐야겠다.
한 시간을 더 잘 수도 있다.
또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귀하게 얻은 한 시간이 너무 무용지물로 돌아가버리는 느낌이다.
머리를 다시 한번 더 굴려본다면 한 시간을 더 조각내서 쪼개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니까 덤으로 얻은 이 시간은 십 분을 더 자고, 그 뒤에 이십 분은 침대에서 유튜브를 보다가, 느지막이 일어나고 나머지 삼십 분은 수업 듣기 전에 책을 읽거나 커피를 내려마실 수도 있는 시간이다.
고작 한 시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걸 담아낼 수 있는 시간임에 틀림이 없다.
어쩌면 태엽이 조금 늦게 풀려버린 새로운 시간의 흐름에 익숙해져 다시 원래대로의 루틴으로 돌아올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첫 몇 주만큼은 내 몸이 시간의 차이를 온몸으로 흡수할 거라고 생각한다.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라고 생각을 굳혀보려다 다시 돌아보니 굳이 비장한 다짐까지 해가며 열심히 살고 싶지는 않다.
더 정성스럽게 살아야겠다, 난 이렇게 마음을 고쳐먹는다.
덤으로 얻은 콩나물을 더 고맙게 여겼던 엄마의 두 손처럼 조심스레 햇빛 한 줄기를 받아들여야 한다.
덤으로 한 국자 더 받아온 떡볶이를 꼭꼭 씹어 삼켰던 어린 나와 친구들처럼 한 번이라도 더 햇살을 마주해야 한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맞이해야 했던 리스본의 우중충한 하늘을 기억한다.
흐린 잿빛의 먹구름은 상시로 천장을 가렸고, 작게 방울져 부서져 내리던 약한 빗줄기는 땅을 하루가 멀다 하고 적셨다.
겨울의 막바지가 그렇게 가고 난 뒤, 이제야 드디어 봄이 찾아왔다.
길거리를 걸어내려가면 마스크를 썼음에도 향긋한 꽃내음이 맡아진다.
가로수로 심어놓은 보랏빛 자카란다 나무들이 줄지어 서있고 가지마다 수놓아진 꽃망울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공원 옆 양계장에서도 닭들이 돌아다니며 푸른 잔디밭 위의 모이를 쪼아댄다.
높게 세워진 첨탑 위 동상도 내리쬐는 볕에 표면이 반질거린다.
한 시간의 햇빛을 더 받게 될 이 곳의 모든 사물과 생명들이 더 따듯함을 오래 머금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