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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린 Feb 20. 2022

포르토 알레그리의 작은 말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책을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열 두시 반을 넘어가는 시간에 너한테 물었다, 내가 바람핀다면 너는 어떻게 할 거야?

이곳을 이미 훑고 지나가버린 해가 중천에 떠 있을 그곳에 너는 창문을 열고 그 볕을 느끼고 있을지는 몰라도 수화기를 타고 흘러드는 목소리는 느릿했다.

그건 미친 과학자가 내 몸을 해부해서 햄스터로 만들어도 날 사랑할거냐고 묻는 것과 다를 게 없어.”

아니지, 다르지!” 난 언성을 높였다.

내가 확신을 구하려고 묻는 게 아니잖아!”

너의 짙은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대는 걸 보고 나서야 부질없는 도발에 넘어간 것을 뒤늦게 깨닫고 늦게나마 가자미 눈을 하고 화면을 흘겨본다.

너는 생각에 잠긴 듯 미동이 없는데 가끔 그럴 때면 난 와이파이가 잘 안 터져서 연결이 끊긴 건가 의심이 들 때가 많아 화면 속 네가 눈을 한 번 감을 때까지 기다리고는 한다.

두어 번 눈을 깜박거린 네가 입을 떼기 전 나는 작가가 프랑스 사람이고 이 작품을 감명 깊게 읽었던 38살 연하의 북부 도시 캉 출신 철학도와 16년간, 본인이 눈 감을 때까지 연인 관계였다는 것을 알렸다.

그래야 책에서 펼쳐지는 환상적 세계와 현실적 구성 전개 사이의 흐릿한 경계선을 조금이라도 지워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였다.

주인공 모두 파리에서 온 사람들이야. 이탈리아 북부 도시에 여름휴가를 보내러 온 거지. 하루가 멀다 하고 와인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 참고하라고. 그래서 어쩔 거야, 내가 바람피우면?”

책 이야기를 하고 등장하는 인물이 누구며,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인물들이 내린 굵직한 결정을 하나씩 짚어주다 보니 다시 답 칸이 비워진 처음 던진 질문으로 돌아오는데 한참이 걸렸다.

아주 힘들고 괴롭겠지만 너랑 함께할 수 없을 것 같아.”

넌 대단히도 신중하게 단어를 하나씩 던진 나머지 말을 마친 뒤에는 한 문장이라기보다는 얼기설기 얽힌 단어의 나열이라고 느껴졌다.

“헤어지겠다는 거야?” 나는 되물었다.

뭘 그렇게 복잡하게 말하는 건지는 몰라도 결론적으로는 헤어지겠다는 말 아닌가 싶었다.

그래.” 간결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어진 네 설명에 따르면 인간은 원초적 생물이라 본능을 따르거나 이끌리는 경우가 더 많지만 사랑을 이룩하기 위해선 그보다 더 복잡하고 정교한 능력이 요구되고 그에 응할 수 있는 인간만이 독자적인 사랑을 창조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바람을 피운다는 건 쌍방이 피워낸 사랑에 대한 모독이며 위반인 동시에 인간이라면 해선 안 될 행위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나는 듣고 있다는 표시로 가볍게 고갯짓을 하며 들었다.

내가 가만히 있다가는 또 그쪽에서 이곳 통신 상태가 안 좋은지 필요 없는 의심을 품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고 말이다.

그럼 단순히 육체적 관계가 아닌 정신적 끌림을 느낀 경우에는 어떻게 할 거야?”

회심의 반격을 가하듯 한번 더 꼬아 던진 질문에는 어떻게든 네가 골머리를 앓았으면 좋겠다는 꼬여진 심산이 깃들어 있었다.

끈질긴 태클에 너는 조금 어이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 올렸다.

안됐네, 서로 잘못 만나서 쓸데없는 고생만 하고.”


작중 인물인 루디는 사라에게 사랑엔 휴가가 없으며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권태를 포함한 모든 것까지 온전히 감당한다, 그게 사랑이다, 라는 말을 건넨다.

사라는 남자를 만나러 가지 않고, 혹은 못하고 강의 한쪽 편에 머무는 대신 남편 자크가 있는 집으로 회귀한다.

집에 도착한 사라는 침대에 땀을 흘리며 자고 있는 아이를 끌어안으며 자는 아이의 귀에 대고 ‘바람이 불고 시원한 밤을 누릴 수 있는 다른 휴가’의 가능성에 대해 속삭이고 잠에 든다.

그 생각을 품고 잠에 들었을 때 갖게 되는 실낱같은 희망이라든지, 그 다음날 변한 것 하나 없이 내리쬐는 무더위 속 수 통의 물통을 비워내며 샤워를 해야 하는 좌절감 같은 건 나오지 않고 책은 끝이 난다.

읽는 내내 사라의 시선으로 보게 되는 해변 마을의 풍경과 루디의 입을 빌려 그려진 타키니아를 뛰노는 작은 말들은 다행스럽게도 기운 빠지게 만드는 이야기 서사에도 불구하고 책을 떠나지 않게끔 묶어주는 장치로 작용한다.

줄기차게 피워대는 담배나 연신 들이키는 캄파리, 손에 잡히는 것들마저 녹아버리는 기습적인 더위와 바다에 유영하며 올려다보는 하늘은 인물들이 내뱉는 말 사이의 공백을 답답하게도 메운다.

간접적으로 더위에 노출되어 나까지 목이 타게 만드는 이 소설 속에 모로 비껴 서있는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제시하는 사랑의 정의와 이탈리안 해안가 마을에 휴가를 보내러 온 프랑스인 다섯 명이 제시하는 변증법적 대처 방식은 우리가 꿈꾸고 빚어나가는 사랑에 어떤 점을 시사해주는 걸지 곱씹어 생각을 하게끔 만든다.

휴식 없는 사랑이 지속 가능한 사업일까?”

사랑을 사업으로 보고 시작한다면 평생 성공하기는 어려울 거야. 휴식은 상호 협의 하에 가질 수도 있지. 대신 휴식의 본질적 의미를 서로 잘 파악하고 말이야. 그 휴식이 엉뚱한 데 쓰이면 큰일이거든.”

그건 그래. 그럼 사업보다는 합법적 도박? 근데 도박에 휴식이 있나, 중독자가 돼버리는 결말 밖에 난 못 들었는데.”

“특성만 따진다면 아무래도 도박에 가깝긴 하겠다. 대신 이득을 취할 생각은 버리고. 그럼 중독은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으로 배팅하는 사람이 어딨어? 다들 한탕하려고 이 한 몸 내던지는 거 아닌가.”

이야기는 이어져 나 자신이 타인 한 명과 제도에 의해 평생을 약속하는 현대 결혼 제도의 모순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요지는 예전에는 평균 수명이 턱없이 짧았기 때문에 한 사람의 인생의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수명이 늘어난 만큼 그러기가 어렵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풀어나가다 보니 늘어난 인간 수명과 비례해 현대 사람은 많이 늦춰진 시기에 결혼을 하므로 이 또한 바람을 설명하는 합리적 근거가 되지 않는다는 합의를 맺게 되었다.

어쨌든 바람은 비겁하거나 뻔뻔한 사람들이 택하는 수작일 뿐이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넌 바람을 피우면 안 된다는 거지. 어떤 이유에서건. 그전에 나한테 말해야지, 널 덜 사랑해, 요새 우리 위험해, 이렇게라도.”

널 덜 사랑해? 진짜 너무 말이 못 됐다.”

아무리 그래도 앞에선 널 사랑한다고 해놓고 뒤에선 다른 사람 쫓아다니는 것보단 백배 나을걸.”

흠, 그래. 듣고 보니 그건 동의해.”

맥없이 끌려다니는 대화의 흐름은 종횡무진 내달리다 끝에 가서는 사랑이 그런 거라면 그럼 넌 미친 과학자가 네가 사랑하는 날 햄스터로 만들어도 사랑해주지 않겠냐는 협박을 걸고 나서야 일단락되었다.


새벽 두 시를 가리킬 때쯤 통화는 마무리되었다. 나는 하루를 잘 보내라는 말을 했고, 넌 이어서 잘 자라는 인사를 했다.

사라와 자크는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을 보았을까. 도저히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들이 타키니아에 함께 가긴 갔을까. 떠오르는 물음에 답은 없고, 너한테라도 묻고 싶은데 통화는 이미 끝났으니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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