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아힌일지 08 후아힌의 여름은 새빨갛고 새파랗다

여행 여섯째날

by 이해린

이건 공식이다. 맛있는 것과 스윗한 보금자리, 눈부신 해변이 날 보다듬어주면 그거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행복이라고.

후아힌은 그 불가능에 가까운 것을 한 큐에 해결해냈다. 브라보, 후아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조식 뷔페로 향했다. 시계를 볼 필요도 없다 어차피 제일 정확한 건 배꼽 시계다.

앞뜰로 이어지는 곳에 좌우로 뷔페가 있고, 안 또는 바깥 테이블에서 먹을 수 있지만 정원으로 가는 길목에 따로 독립적인 공간을 마련돼 있었다.

정원 연못 사이사이 놓인 테이블은 뷔페 테이블과는 거리가 있으면서도 나무 데크로 이어져 있어 음식을 가져오는 데도 큰 무리는 없는 곳이었다.

첫 날이니까 여유를 부리며 먹자는 생각에 우린 연못 편에 놓인 테이블에서 먹기로 했다.

커피를 주문하고 우리 셋은 비장한 마음으로 접시를 들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오늘부터 부지런하게 수영을 해야하니 먼저 배를 두둑하게 채워줘야 했다.

아직 바다 수온이 따듯해졌을 것 같지는 않아 우린 수영장에서 먼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룸으로 오가는 수고를 덜하기 위해 가져올 수 있는 모든 물품은 바리바리 챙겨 내려왔다. 읽을 책, 핸드폰, 헤드셋, 선글라스, 선크림. 이 정도면 반나절은 순삭이다.

오늘의 계획은 수영장과 해변가를 앞 뒤로 오가며 썬베드에 드러누웠다가 헐레벌떡 나가서 모래사장에서 모래 찜질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수영장에서 계단 한 층 내려가면 해변이니 마음 내키면 바다로 뛰어들면 그만이어서 딱히 구체적인 계획이 필요하지는 않긴 했다.

수영장에서는 풀 바에서 와인 마시고, 해변으로 나가려고 치면 바로 옆에 있는 라운지에서 칵테일 시키는 건 진정한 의미의 휴식을 실현코자 함이었다.

썬베드는 수영장을 따라서 놓여 있었고, 수영장에서 계단 식으로 이어지는 구역에도 즐비해 있어 마음 내키면 누워서 햇볕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린 더 오랜 시간을 바깥에서 보낼 것이어서 지붕과 천막이 있는 곳에 짐을 풀고 선크림을 치덕였다.

수영장의 맑고 청량한 푸르름에 지겨워지면 곧장 파도 치는 바다로 뛰어들었다.

넘실대는 파도에 몸을 내던지다 지쳐 나가 떨어질 쯤에 다시 썬베드로 기어들어와 낮잠을 청했다.

그러다 눈 뜨면 다시 와인 한 잔 때리고, 수영장에 입수.

마치 반건조 오징어처럼 데쳤다, 익혔다, 적시는 걸 반복하니 몸 안에 남은 반듯한 선 하나 없이 흐물한 모양으로 늘어졌다.

정신 차리고 보니 구름 한 점 없던 하늘 위로 오렌지 광선이 몇 줄기 훑고 지나가고, 선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축복 받은 이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다는 묘한 황홀감에 한참을 해가 꼴딱꼴딱 넘어가는 지평선 끝을 바라보았다.

주황색과 분홍빛이 그어진 사이로 연한 청회색을 적신 두꺼운 붓이 그 위를 눅눅하게 덧입혔다.

해의 꼬리가 아직 남아있는데도 어디가 하늘의 끝이고 바다의 시작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어둠이 찾아들고 나니 하루종일 물배를 채워 은근히 허기도 못 느끼고 있었는데 그제야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안 봐도 뻔하지, 누구 한 명 말 꺼내지도 않았는데 우린 블루포트 몰로 향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카페테리아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그 전 날, 몰 안을 구경하다 보니 카페테리아에서 사람들이 티켓을 끊어 메뉴를 주문하고선 음식을 시키는 걸 봤었다.

우리도 어떤 줄인지도 모르면서 냅다 사서 식권을 교환해 카페테리아 메뉴를 빠르게 스캔했다.

뭐 모르겠으면 일단 팟타이. 성공 확률이 100프로에 달하니까 자신 있다.

몰에서 뜨끈뜨끈한 팟타이를 먹고선 야무지게 버블티까지 후식으로 먹어 주었다.

다시 다리를 건너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바깥을 내다보니 신년 준비를 하는 모양인지 구조물을 세우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토끼의 한 쪽 귀를 손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 맞다, 올해는 검은 토끼 해구나. 그러고 보니 바로 다음 날이 구정이었다.

따지고 보니 갑작스럽게 몰에서도, 리조트 안에서도 중국인 관광객들이 보였던 건 구정을 낀 긴 연휴동안 놀러온 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라 아시아의 다른 편일 뿐인데 서양인 관광객이 너무 많기도 하고, 둘러 보는 풍경이 우리나라와는 많이 다르다 보니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것조차 깜빡하고 있었다.

그 날 밤, 하늘이 갈라지는 소리에 발코니로 나가보니 새빨간 불꽃이 하늘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빨갛고 노래졌다가 다시 초록색으로 빛나는 불꽃이 한 발 빠르게 앞서 나가면 펑펑 터지는 소리는 바로 뒤이어 쫓아갔다.

불꽃놀이는 한동안 요란한 소리와 그보다 더 현란한 모양으로 쉴새없이 공허한 밤 하늘을 메꾸었다.

우린 알람을 맞추어 두고 잠을 청했다. 알람 시각은 일곱시. 우리 나름대로의 구정을 태국에서 보내기로 했기 때문이다.

차례상은 한국에서, 새해 인사는 태국에서. 2023년쯤 됐으면 인터내셔널하게 차례를 지낼 때도 됐지 싶었다.




이전 07화후아힌일지 07 유후 앤 아힌, 잇츠몰댄라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