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일곱째날
구정의 아침이 밝았다. 언니랑 나는 그 날 아침부터 리조트에서 진행하는 요가 클래스에 등록했어서 대충 얼굴 씻고 정원으로 나갔다.
요가 매트를 깔고 한 시간동안 진행하는 동안 상쾌한 공기와 멋드러진 풍경을 보며 몸과 마음을 정화했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자세를 취하는 내내 작은 벌레 떼의 습격으로 몸이 근질거려 집중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마저도 수행의 일부로 여기고 이겨내야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할 말이 없다.
여차저차 요가 수련을 마치고 다시 숙소로 올라오는 길에 어제 밤 열심히 작업하던 결과물이 눈에 띄었다.
이 곳 저 곳에 빨간 등불과 띠를 둘러 치장을 한 것과 중국식 전통 복장을 입은 리조트 직원들, 정말로 차례라도 지낼 모양인지 정원 한 가운데에 놓인 음식 상까지. 이 날을 벼르고 있었던 건지 눈치도 못 차린 사이에 제법 구정다운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안 그래도 전날 체크인을 하던 중국인 관광객들이 많아 보였던 터라 언니랑 나는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빨리 조식을 먹는 게 좋지 않겠냐는 공통 의견을 내놓았다.
숙소로 올라가서 해야할 중대한 일이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온라인 차례를 지내는 것이었다.
8박9일의 여행 기간은 구정 연휴를 끼고 있었기에 처음에 여행 날짜를 잡을 때 가족끼리 얘기를 했었다. 이번 설 차례는 어떻게 지낼 것인가에 대하여.
우린 본래 일가 친척 방문 없이 우리끼리만 차례를 올린다. 거창할 거 없이 조상님들께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감사함을 표시하고 다가오는 새로운 해에도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길 기원하는 것 뿐이다.
다만, 여행 중에 이 연례 행사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행사 주최자인 엄마와 아빠가 다른 땅에 있는 중에 같은 행사를 진행할 수 있을까, 창의적인 문제 해결법이 필요했다.
대 코로나의 시대, 온갖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공동의 목표 달성을 가능케한 원격 소통의 힘을 믿어보기로 했다.
이번 차례는 줌이다, 부모님께선 아주 합리적이면서도 통상적이지 않은 새로운 해결책을 내놓았다.
설날과 차례는 허례허식으로 치루고 끝내는 게 아닌 마음을 담아 맞이해야 한다는 통일된 의견이 있었기에 우린 뜻을 모아 하나의 결정을 내렸다.
줌 차례, 진행시켜보자고.
“상 보여?”
“과일상 잘렸어. 거기서 왼쪽으로 좀만 더. 어, 어, 좋아.“
“됐어? 이제 시작한다.“
그렇게 아빠와 동생은 추운 한국의 본가에서, 우린 무더운 태국의 리조트 발코니에서 경건한 의식을 시작했다.
화면은 선명한 화질로 차례상을 잡았다. 우린 화면을 향해 절을 하고, 한 명씩 차례 차례 인사를 드렸다.
조상님들, 코쿤카. 조상님들께서 우리 가족을 지켜주시고 돌봐주신 덕분에 저희가 환상의 나라 태국까지 와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인사를 드린다.
화룡점정으로 실제 엄마와 핸드폰 속 아빠를 나란히 두고 세배까지 드렸다.
세배를 올리고 나선 단정하게 앉아 새해 덕담을 들었다.
올해도 다들 건강하고, 하고 있는 일과 프로젝트가 하나씩 좋은 결과를 내길 바라며,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가족끼리 얘기하면서 풀어 나가길 바란다. 어쩌고 저쩌고.
이 정도면 2023년에 걸맞는 모습을 선보인 셈이다. 초등학교 시절, 과학의 날 행사 때마다 미래 도시를 상상할 때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동차와 진공 터널을 뚫는 열차를 그리기 급급했다. 원격 통신망을 사용해 차례를 지내는 것까진 미처 당시 어린 나의 상상력이 닿지 못했던 모양이다.
조식을 다 먹은 뒤에는 당연한 수순으로 수영장과 바다로 나갔다. 풀바에서 와인 한 잔씩 시켜 놓는 건 이유불문 밟아야 하는 통상적인 절차다.
1시에는 호텔 스파에서 마사지를 예약해 두었다. 앰버서더 멤버십으로 부대 시설과 서비스 할인을 받을 수 있어서 우린 호텔 밖 마사지 샵을 이용하지 않고 안에서 모든 걸 해결하기로 했고, 이미 첫 째날 어플로 미리 시간을 잡아 놓았다.
나는 아로마, 언니는 타이 마사지. 스파 안에선 향긋한 아로마가 은은하게 풍겼다. 발을 먼저 씻고, 베드에 올라가 눕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한 시간 반이 이미 지난 시각이었는데 대체 어떤 술수를 부렸기에 내가 기절을 한 건진 알 수가 없다.
한참을 부드러운 마사지사의 손길로 인도 받은 황홀경에서 헤매다 다시 햇볕을 쐬러 수영장으로 나왔다.
정신 차리고 수영, 다시 썬베드에 드러 누워 건조, 버석버석하게 말랐으면 바다로 입수. 네버엔딩 싸이클이 오후 시간까지 이어졌다.
시계를 보고 숫자를 확인하기도 전에 해가 저물어 갔다. 한층 낮아진 색조를 인식하고선 시계를 볼 필요도 없겠구나 싶었다.
해가 뜨면 물 속으로 들어가고 햇볕을 쐬다가, 해가 지면 다시 이부자리 속으로 들어가면 그만이었다. 후아힌에서 지내는 우리에겐 일정이랄 게 없었다.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 되고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도통 질리지가 않았다. 눈에 담는 바다의 청량한 풍경과 귀에 들리는 철썩이는 파도의 청량한 소리가.
내내 보고 있고, 듣고 있어도 좋았다. 오히려 단조롭지 않았다. 구름의 형태가 달라지고, 내리쬐는 햇볕의 빛깔이 변하면서 시시각각으로 보이고 만져지는 것들의 느낌은 유동적으로 움직였고, 변화를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모든 시간을 빈 틈 없이 채울 수 있었다.
지금과 현재를 누리는 이 시간이 영원해도 마냥 행복할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