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아힌일지 10 붉은 낮과 푸른 밤의 사이

여행 여덟째날

by 이해린

백 번을 말해도 백 번 모두 진심이다. 수영은 해도 해도 질리질 않는다. 나 정말 전생에 물개였나봐, 아니면 해달이든가. 하다못해 심해어라도.

뭐가 됐든 난 진짜 인간으로 태어나기 전에 아가미가 있었던 거 아닐까?

물 속에 있으면 기운이 충만하게 차오르는 느낌이다. 퍼석퍼석한 땅에 두 다리를 딛고 서 있을 때면 아무리 날씨가 좋을 때여도 조금만 시간이 갔다 싶으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땀이 줄줄 흐른다.

물 속에 뛰어 들면 온 몸에 힘을 쭉 빼도 괜찮다.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둥실둥실 오르내리는 수면의 흐름에 몸을 맞추고 코와 입으로 자연스럽게 호흡만 하면 된다.

첨벙, 요란한 킥을 차고 물 속으로 들어가면 세상의 모든 소리와 소음과 단절된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다.

차원이동이란 건 별 다른 마술도 아니고,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지금 이 세상에 날 괴롭게 하는 게 있다면 어디론가 뛰어가거나 숨어 버릴 게 아니다.

물 속으로 뛰어 드는 것만이 답이다. 우울은 수용성이라 물에 씻겨 나간다는 말을 난 철썩 같이 믿는다.

비록 서울아산병원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에 따르면 “전혀 연관이 없고, 관련된 연구는 단 한건도 없다”라지만.

이처럼 수영장과 바다를 오가며 끊임없이 헤엄치면 떨쳐버릴 수 있는 건 약간의 열량과 스트레스지만 그보다 더 증폭되어 돌아오는 건 허기다.

물놀이는 왜 이렇게까지 사람을 극단적으로 허기지게 하는지 모를 일이다. 이거야말로 연구 주제 아닐까.

천막 아래 썬베드에 누워 있던 엄마와 나는 노곤한 기운을 겨우 떨치고 일어났다.

허기가 피로를 마침내 이기고 말았던 것이다. 어디로 가서 뭘로 배를 채울지 고민하다 얼마 안가 어렵지 않게 답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블루 포트 몰이었다.

지하로 가면 푸드코트 옆에 푸드 트럭처럼 옹기종기 모여서 간식과 주전부리를 파는 마켓이 있다.

우린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며 간식을 하나씩 건져 댔다. 한량이 따로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여유로움과 게으름을 과시하며 우린 무거워진 봉지를 들고 털레털레 다시 수영장으로 복귀했다.

우리가 담은 디저트 중에는 코코넛 팬케이크도 있었고, 카오 니아오 마무앙 이라고 불리는 망고 찹쌀밥도 있었다.

대충 어디서 보고 들은 건 있어 갖고 태국을 여행하거나 방문하면 꼭 여행객들이 찾는 디저트인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 시도해 본 적은 없었다.

사람들이 줄 서서 사고 있ㄴ느 걸 보니 또 지나칠 수는 없어서 예의상 하나씩 샀는데 정작 맛은 보장할 수 없었다.

망고라는 과일에 밥을 같이 먹는다는 발상부터가 지나치게 창의적이어서 경계심까지 품게 되었다.

한 입을 떠먹어 보았다.

“와, 이거. 그냥, 와아, 미쳤구만?”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어떤 상태가 지나치게 또는 비정상적으로 높은 만족감을 안겨 주면 웃음을 띠기 보다 얼굴을 오만상 찌푸리게 된다는 거.

횡설수설하면서 퍼뜩 숟가락을 다시 들었다. 하나밖에 안 사서 방심하면 언니한테 털려 버릴 걸 예감했기 때문이다.

늦은 오후와 이른 저녁 사이쯤에 해변을 걸었다.

오후의 소란이 차츰 잦아들고 채도와 명도가 가라앉기 시작하는 때, 고요한 저녁이 찾아오는 시간이다.

좁고 긴 모래 사장을 걸으며 끝없이 이어져 나갈 것 같은 바다는 오후 내 머금고 있던 햇빛을 잃어 물 색이 조금 더 짙어졌다.

해가 사라져 밝지는 않지만 햇살이 남기고 간 자락이 있어 마냥 어둡지 만은 않은 시각, 난 하루의 이맘때 쯤을 가장 아낀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 터럭만 한 시간은 시계의 시침과 분침으로는 계산할 수 없을 만큼 허무한 무게감을 갖는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뜨면 깜깜해져 공기 중의 냉기가 뒷목을 서늘하게 만들기 일쑤다.

때문에 이 시간을 온전히 누리고 싶다면 딴 생각이 비집고 들어 올 틈이 없을 정도로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붉은 오후와 푸른 저녁 사이에는 수 만 가짓 수의 빛이 서려 있다는 걸 자각한다면 하루의 끝은 그만큼 다채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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