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넷째날
13:00 리조트 출발
전날 아유타야 반나절 투어를 이어 그 다음 날도 내친 김에 관광 명소 더 밟아 보겠다고 방콕 왕궁 투어를 신청했다.
묵고 있는 숙소가 관광지와 거리가 꽤 있어서 투어를 신청하며 한 번에 간편하게 관광 명소를 둘러볼 수 있다는 점과 역사 문화적 배경 지식이 필요하다면 당연히 가이드가 옆에서 더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편이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이래저래 게으른 탓이다. 그래서 물론 이번 투어도 오후에 시작해 저녁 쯤에 마무리되는 반나절 투어였다.
1시 40분 아속역에서 모여 출발하는 계획이어서 우린 1시에 리조트 로비에서 택시를 잡아 미팅 장소로 향했다.
방콕의 교통난이 심하다는 건 말로만 들었지 실제 체감을 하지 못했었다. 당연하다, 우린 방콕에 도착해서 시간 약속을 지킬 일이 없었다.
신호등 불은 계속 바뀌는데 우리가 탄 택시는 도통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뭐지, 저 신호등은 조명인가.
어디선지 몰라도 차는 계속 진입했고, 우린 시간이 주구장창 흘러도 제자리였다.
그제야 방콕의 교통 체증에 대해 전날 택시 기사님이 농담조로 한 말이 떠올랐다.
방콕 사람들은 8시까지 회사에 나가려고 새벽 5시에 일어난다는 당시에는 웃겼지만 지금은 입가에 미소 한 점 걸리지 않는 그 말.
40분을 넘어선 순간 우리는 아직 역 앞에 도착하지 않았는데 내려달라고 했다. 그 시점에선 차라리 육교를 건너 역까지 걷는게 빠를 것 같았다.
투어 웹사이트에는 방콕의 교통 체증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면서까지 시간을 엄수해달라고 했으니 40분이 지난 지금 미팅 장소에 간들 투어 일행이 기다릴 가능성도 극히 희박했다.
사기가 급격히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속도를 늦추지는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뜀박질을 멈출 수 없었다.
13:45 아속역
아속역에 도착했을 때, 커다란 밴과 일행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게다가 이미 미팅 시간을 넘겼음에도 우리가 마지막에 도착한 참가 인원이 아니었음에 왠지 모를 안도감까지 느꼈다.
명단을 다시 체크하고 우린 다 같이 승합차에 탔다. 오늘 함께 움직일 10명은 혼자 여행객들과 우리처럼 가족끼리 온 사람들이었다.
차는 천천히 움직였다. 혼잡한 아속역 지대를 빠져서 외곽 도로를 탈 때는 잠깐 속도가 붙더니 다시 시내로 진입해 왕궁 근처로 가려니 도로가 꽉 막혀 있었다.
가다 멈추길 반복하니 멀미가 일어 머리가 띵하게 울릴 때 쯤에야 차는 왕궁 길목으로 들어섰다.
우린 이미 예정 스케줄보다 한참 지각이었다.
14:50 왕궁
우리와 함께 해주신 가이드분은 태국 현지인이었는데도 한국어가 유창했다. 왕궁으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태국의 정치 상황과 역사를 수려한 어휘로 막힘없이 설명 하셨다. 우린 태국의 역사보다도 가이드님의 술술 나오는 한국어가 더 궁금해진 나머지 왕궁으로 입장하는 길에 여쭈어 보았다.
도대체 한국어를 어떻게 그렇게 잘하시나요? 가이드님이 대답하시기를 드라마를 많이 보셨다고. 넷플릭스 시청 기록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그 나라의 역사는 궁궐 담 안에서 엿볼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건 내가 방금 지어낸 말이긴 하지만 궁은 확실히 그 나라의 독특한 문화적 풍습이나 역사적 배경을 어느 정도 드러내는 장소임은 분명하다.
궁궐 사이에 비죽이 삐져 나온 길다란 의자가 있길래 그 용도가 무엇인지 질문했다.
돌아온 답변은 우리나라 궁에서는 상상도 못할 장면을 그리게 했다.
왕이 코끼리에 올라타거나 내릴 때 사용하는 의자였던 것이다. 이를테면 코끼리 정류장, 이라고 가이드가 덧붙였다.
또, 궁이 맞대어 이어지는 길을 걷다가 건축 양식이 뒤섞인 건물을 한 채 발견했다. 건축에 문외한인 나조차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상단과 하단의 차이가 극명해 마치 무지개 떡으로 시작해 스펀지 케이크로 끝나는 디저트를 목격한 듯 했다.
가이드님의 설명에 의하면 이 건물은 유럽으로 유학을 다녀온 라마5세가 조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 건축 양식을 도입해 궁을 개조했기에 서양식 석조 건물에 전통 태국의 뾰족한 지붕이 얹어져 독특한 양상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15:30 왓 프랏깨우, 에메랄드 사원
다음 목적지는 왓 프랏깨우, 즉 에메랄드 사원이었다.
이 곳에선 태국에서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존재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신성한 존재이니 종교적 의미를 지니는 것일테고, 그렇다며 불상일 수 밖에 없다는 추측을 했다. 태국 각지에서 이 불상을 보러 성지순례를 하고, 하물며 왕들마저 계절별로 이 불상의 옷을 날씨에 맞게 옷을 바꾼다고 하여 엄청나게 거대한 형상을 한 불상일 거라고 상상을 했다.
하지만 사원 내부로 들어선 순간, 엥, 김이 빠져 버렸다.
크기가 작다 못해 앙증맞은 불상이 저 꼭대기에 우두커니 앉아 우릴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작은 사이즈에 실망을 하려던 찰나에 외려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주변에 앉아 있던 방문객들의 자세와 태도였다.
이들은 차분히 앉아 저마다 기도문을 외거나 손을 모아 존경의 마음을 표하고 있었다.
우리가 삼배를 올리고 무릎을 꿇고 불상을 올려다 보듯이 이 곳 불자들은 성별이나 나이를 가리지 않고 다리를 다소곳하게 한 방향으로 돌려 앉는 자세를 취하는 것 같았다.
경건함이 녹아 있는 그 모습에 다시금 옥돌을 정교하게 빚은 불상을 바라보니 왠지 광채가 형형하게 빛나고 있어 보였다.
기분 탓인가, 아니면 내 안에 불심이 동하고 있는 건가 헷갈렸다.
16:30 왓 아룬, 새벽 사원
보트를 타고 건너 편에 있는 새벽 사원으로 이동했다. 보트는 관광객들 뿐만 아니라 오히려 현지인들이 더 애용하는 교통 수단인 듯 했다.
현지인은 너무나 매끄럽게 승차하는 반면 우린 일렁이는 파도에 치솟는 보트 때문에 벌벌 떨며 올라타야 했다.
선착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새벽 사원에서 우뚝 솟은 탑인 프라 쁘랑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저녁이 되면 조명이 켜져 더욱 그 존재감을 빛을 발한다.
해가 가장 먼저 도달하는 곳이기에 새벽 사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만큼 해가 오래 머물다 가는 건지 사원을 돌아다니다 보면 모서리와 구석까지 햇볕이 들고, 층층이 쌓인 벽돌마다 온기가 느껴졌다.
18:00 아속역 귀환
아속역으로 다시 귀환했을 때는 어둠이 내려 앉기 시작했을 때였다. 게다가 오는 길에도 교통 체증은 우릴 실망시키지 않고 거센 헤드라이트 불빛과 적색 신호등으로 마음껏 반겨 주었다.
차 문이 다시 열렸을 때 불빛에 번뜩인 가이드님의 얼굴은 거의 환희로 물들어 있다 싶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현지인으로써 매일 이 고통을 겪는 가이드님마저 고개를 내젓게 한 방콕의 교통 체증은 십사리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우린 아속역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리조트로 향하기로 했는데 레스토랑만 보고 예약한 동네가 그만 유흥 지역일 줄은 미처 몰랐다.
지뢰 밭을 지나듯 빨간 조명과 허름한 간판으로 도배된 긴 골목을 내질러 동네에서 유명하다는 로컬 레스토랑에 들어왔다.
힙하댔는데, 로컬 맛집이랬는데…
식겁한 엄마는 레스토랑에 도착해서 식사를 하는 내내 밖에 나가 또 험한 꼴을 볼까봐서 마음 졸였고, 얼른 먹고 귀가하자는 쪽으로 뜻이 모였지만 구글 맵을 켜서 확인하니 교통난은 여전히 빡빡해보였다. 답답한 마음에 언니와 나는 말없이 와인만 들이켰다.
러시아워가 지나가길 인내하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로변으로 달려 나갔다.
지하철을 한 정거장 타고 환승을 하려고 했더니 엠포리움 백화점이 환승통로랑 이어져 있어 홀린듯이 들어갔다.
백화점이 문 닫기 얼마 전이어서 한산한 내부를 훑어보다가 나오는 길에 백화점 인포 센터에서 택시 서비스가 있어 콜을 하기로 했다.
리조트가 상대적으로 거리가 먼 곳이다 보니 택시를 잡는 것도 애 좀 먹었다.
겨우 잡은 택시에 몸을 싣고 짜오프라야 강을 가로질렀다. 오늘도 꿀잠 예약, 이라는 생각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