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셋째날
여행의 구색을 나름 맞춘답시고 계획성을 살짝 가미한 날들이 있다. 8박 10일의 일정 중 유일한 이틀은 그나마 관광 명소와 볼거리를 구경하러 다니는 날이었다.
심지어 그마저도 반나절 투어를 예약했으니 성실하게 게으름을 피웠다고 볼 수 있겠다.
그 전날 스파를 받으며 비행의 피로를 떨쳤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탐방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여기고 미리 한국에서 투어를 예약했었다.
한인 투어의 가짓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 우리가 지향하는 바를 바탕으로 예약했다.
내 멋대로 정한 기준은 깐깐함과 느슨함 사이를 미묘하게 오갔지만 결국 여행자의 최대 만족을 위해선 위험 요소를 필수적으로 제거해야 됐으므로 사전에 미리 따질 수 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먼저, 우리 3인만 참여하는 단독 투어일 것. 지나치게 많거나 적지 않은 활동량을 요구할 것. 가장 중요한 건 오후에 시작하고 반나절을 넘지 않을 것.
우린 방콕을 잠시 떠나 근교 도시인 아유타야로 향했다. 내 안의 불심을 태울 환상적인 여정이 장장 반나절 동안 펼쳐지게 된다.
이 날도 물론 수영장에서 아침을 시작하고, 조식으로 공복 허기를 달래주었다. 말끔하고도 완벽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우린 12시에 한인 투어 업체의 픽업을 예약했는데 소수 단독 투어의 가장 큰 장점은 숙박 장소로 운전자가 픽업을 오는 것이었다.
파트너로 엮이는 기사와 하루동안 함께 지내게 되니 큰 변수로 작용할 수도 있긴 하지만 어차피 현지 투어는 가이드를 잘 만나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건 쉽게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나랑 성향이 잘 맞든 아니든 간에 여행을 즐겨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갖는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기사님은 과묵한 성격으로 보였는데 방콕의 도심을 벗어나며 외곽으로 향하는 한 시간을 넘는 시간동안 우리에게 별 다른 안내 사항이나 질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말을 꺼낸 건 우리가 어디서, 언제 점심을 먹고 싶은지에 대한 것이었다.
리조트에서 이미 거나하게 밥을 먹었기에 도착하자 마자 바로 점심을 먹고 싶지 않아 점심 시간을 바꾸고 싶다고 하자 흔쾌히 그러자고 하면서 그럼 방문 예정인 사찰의 순서를 임의로 바꾸겠다고 하셨다. 예예, 그러시지요. 생산적인 대화였다.
이 또한 단독 투어의 큰 장점으로 꼽을 수 있었고, 이런저런 작고 사소한 이유들로 우린 단독 투어를 예약한 것을 굉장히 훌륭한 선택이었음을 연신 깨달았다.
왓 로카이쑤타람, 누워서 불심 해제.
첫 도착지는 백 번을 봐도 백 번을 까먹게 되는 마력의 이름을 가진 사찰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냅다 드러누워 있는 거대한 와불을 목도했다.
어쩜 저렇게 거대한 몸집인데도 불구하고 새침한 자세를 유지하고 계실까, 뜬금없는 생각을 불어넣는 와상이었다.
제일 귀여운 포인트는 네모네모한 발바닥이었는데 꽤나 섬세한 곡선과 흘러내리는 옷깃의 수려함에 비해 발바닥은 투박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 그 투박스러움이 무성의로 치환 되는 것이 아니라 은근한 매력을 뿜어대는 것이 앙증맞은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굳이 안락한 소파를 두고, 소파 바로 앞에서 거실 텔레비전을 보는 오천만 한국인의 얼이 넌지시 비추어 져서 일까, 거대한 와불상 앞에서도 압도감을 느끼기는 커녕 도리어 친근함을 느끼고 만다.
게다가 부처님의 정수리 위에서는 깨진 돌 틈 사이로 피어난 들꽃이 있었으니 이 정도 비주얼이면 귀여움을 온 몸에 받지 않고 배길 수가 없지 않은가.
여기서 우리와 동행한 기사님은 여기서 사진을 찍어주시겠다며 다가오셨지만 날도 더운데 괜히 기사님께 수고로운 부탁을 하고 싶지 않았던 우리는 입구 앞 벤치에서 쉬고 계시면 우리가 한 바퀴 두르고 오겠다고 약조를 한다.
기사님은 다시 한 번 괜찮겠냐고 묻지만 우린 당연히 다시 한 번 사양을 한다. 이 때만 해도 우린 기사님의 프로페셔널한 예의에 감탄을 했지만 다음 사찰에서 드디어 진실을 알게 된다. 기사님은 사실 비공식 사찰 전문 포토그래퍼였다는 것을. 우린 재야의 고수를 몰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왓 프라시산펫, 무너져버린 황금탑을 보신 적 있나요?
다음으로 향한 곳은 왓 프라시산펫으로 아유타야의 사원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곳이라고 했다. 사원 안에는 몇 개의 파고다가 우뚝 서있고 그 안에는 역대 왕 중 3명의 유골, 의복, 그리고 불상을 넣은 상자가 묻혀 있다고 한다.
파고다는 동일한 모양과 높이를 하고 있고, 서로 비슷한 간격을 유지하며 서 있어 멀리서 보면 사이 좋은 세 쌍둥이처럼 보인다.
가파르게 이어지는 계단층이 끝나면 그 위로 탑을 덮은 지붕이 시작된다.
그 구조도 매우 신기한 것이 아이스크림 콘처럼 둥글게 이어지다 결국에는 첨예한 바늘 끝처럼 뾰족한 점을 찍는다.
사원을 돌다보면 머리가 사라진 불상이나 난잡하게 깨져버린 장식품을 빈번하게 볼 수 있는데 이는 버마와의 오랜 전쟁으로 파괴된 흔적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지리한 전쟁의 여파는 당대 찬란한 문화 예술품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 당시를 살아갔을 사람들은 전쟁과 잇달아 일어나는 자연 재해에도 불구하고
평화롭고 한적하기 그지 없는 2023년의 우리가 골똘히 그 흔적을 보고 있자니 그동안 흘렀을 세월의 흐름이 언뜻 느껴져 이상한 여운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