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둘째날
소싯적 신도림 물개였다. 수영 실력은 미천하지만 수영에 대한 열정만큼은 누구보다 뜨거웠기 때문이다.
집 근처 생활체육센터에서 월수금, 화목 반을 모조리 끊어 매일 출석 도장을 찍었으며 스페인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에도 안달루시아 아주머니들과 오리발을 나눠 끼곤 했다. 그러한 수영 이력이 있었기에 리조트의 수영장은 더없이 환희와 기쁨을 안겨주는 공간이었다.
일곱시에 알람이 울렸다. 여행 중 일곱시에 기상하는 것은 꼭두새벽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유난히도 눈이 잘 떠졌다. 목적지가 수영장이었으니 그럴 수 밖에.
바로 수영복만 입고 길을 나섰다. 우린 2층에 묵었기 때문에 계단으로 내려가 통로만 건너면 수영장이 나왔다.
언니와 나, 둘 뿐이었다. 하긴 누가 놀러와서 아침부터 공복 수영을 감행하겠는가. 흡사 전국 체전을 준비하는 비장함으로 준비 운동을 시작했다.
물이 차가워 꾸물거리며 물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데 언니가 난리판을 벌이며 수영장을 횡단했다. 수영장의 규모가 제법 커 이제는 내 맞은편으로 간 언니는 한결 작아져 있었다.
“죽는 줄.”
언니의 질주에는 원인이 있었다. 알고 보니 수영장은 점점 수심이 깊어져 중간 지점을 넘어서면 발 끝조차 닿지 않고 끄트머리에선 깊이가 3미터 가까이 돼서 멈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간 지점부터 아예 설 생각을 말라길래 나도 호기심이 퍼뜩 고개를 들어 수영장 벽을 치고 헤엄을 시작했다. 호기로운 출발이었다.
“이 정도면 올림픽 경기장 규격 아니냐.”
우린 제일 깊은 곳 바닥에 좁게 난 턱에 가까스로 서서 숨을 몰아 쉬었다. 여기 수영장에 구명 튜브가 몇 개인지 파악하는게 급선무가 되어버렸다.
수영을 하니 곧바로 출출하지 않아 느긋하게 아침 먹으러 나갈 준비를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미친듯한 허기가 들렸다.
수영을 하면 살이 안 빠지는 이유는 아는 사람만 안다.
엄마는 우리가 수영을 다녀 온 사이 이미 준비를 마쳤고, 우린 샤워를 후딱 하고 나와 조식을 먹으러 내려갔다.
조식을 이미 신청한 줄 알았는데 안 했다네요? 음식을 눈 앞에 두고 이대로 우린 내쳐지는가 싶었는데 룸에 차지하면 된다고 하길래 과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뷔페 안이 아닌 바깥에 자리를 잡았다.
”커피나 차 드릴까요?“
담당 서버가 물었다. 우린 여행지에서 기본적인 회화는 엄마에게 맡기기로 했다. 엄마에게 아메리카노와 라떼를 주문했다.
엄마는 훌륭하게 업무를 수행했고, 그간 엄마의 생활영어 독학이 헛으로 가진 않았다는 자부심을 느꼈다.
한 바퀴 돌자는 말에 어머니와 두 딸은 비장하게 일어나 각자 빈 접시를 챙겼다.
갓 구운 빵과 열대 과일 잼, 그 자리에서 짜주는 신선한 과일 주스, 느글함을 씻겨 내려주는 쌀국수와 치아씨드 푸딩, 새콤달콤한 요거트, 뜨끈한 볶음밥과 야채 볶음. 여기가 무릉도원이 아니면 그 이름을 어디에 갖다 붙이리오.
느긋한 식사를 즐기고 더 느긋하게 준비를 마치고 나와 택시를 잡았다. 바로 전날 밤, 사방을 헤매던 택시가 남긴 후유증으로 볼트 어플에 쉽사리 손이 가질 않았다. 대신, 호텔 로비에서 안전하게 콜 택시를 불러 목적지로 향했다. 한국인들이 관광을 하면 반드시 간다는 디바나 버츄 스파로.
게으르지만 우아한 휴양이 이번 여행의 테마인만큼 스파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물론 게으른 리서치로 엄청난 스파 장소가 아니라 네이버 블로그에 수두룩하게 나오던 디바나 스파로 가게 됐지만 여행자로써 한국인만큼 훌륭한 안목과 혜안을 가진 자는 없으니 단박에 믿고 사전 결제를 속행했다.
엄마는 압이 들어가는 마사지를 좋아하지 않아 간단하게 2시간에 달하는 오일 마사지를, 언니와 나는 3시간 짜리 시그니처 스파 코스를 예약했다.
이름마저 시적이고 그 안에 어떤 관리가 들어가있는지 나열해 놓은 건 마치 고대 시조를 읽는 것 같았다.
내가 받은 코스의 이름은 '자스민 만트라'였는데 족욕으로 시작해 카네이션 오일을 도포하고, 사우나실에서 아로마 허벌 스팀을 쐰 뒤, 전신 스크럽으로 각질을 제거하고, 자스민 오일 마사지를 받는다. 다음으로, 무슨무슨 잎과 뭐라뭐라는 소금을 싼 헝겊 주머니로 전신 찜질을 하고 나서 꽃잎이 동동 띄워진 욕조에서 반신욕을 하며 마무리된다.
언니가 예약한 코스의 이름은 '로즈 가든 콜라겐 트레져'였다. 마찬가지로 족욕을 하고, 화이트닝 효과가 있다는 바디랩을 한 다음 로즈와 콜라겐 세럼이 포함된 마사지를 받는다. 마스크를 한 뒤, 라벤더와 요거트 목욕을 한다는데, 음,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은 게 좋은거다.
3시간 동안 지지고 볶고 삶으면 갓 태어난 아기 사슴처럼 온 세상이 환하고 따듯하게 느껴진다.
여태 내가 알던 세상에서 한꺼풀을 벗겨 마침내 부드러운 속살을 만나는 느낌, 이라고 하면 터무니 없이 들리려나.
중간에 잠이 들려고 할 때마다 날 자꾸 깨워서 엎어라 뒤집어라, 하다가 또 노곤해지려고 하면 스팀실로 갔다가 샤워를 하라고 했다가 욕조로 들어가라고 해서 세 시간동안 누워서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정말 행복은 멀리 있지만은 않구나, 비행기 여섯 시간이면 올 수 있는 것을.
산뜻하게 스파를 나서서 향한 곳은 룸피니 공원이었다.
실제로 도마뱀이 출몰해 도마뱀을 뜻하는 '룸피니'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네이버 블로그가 그랬다.
처음에 방콕 지도를 요리조리 훑어 봤을 때 초록색으로 뒤덮인 녹지가 많다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라도 공원을 꼭 가고 싶었는데 어딜 향하든 녹지가 근방에 늘 있는 걸 확인하고선 시간 나면 바로 근처 공원으로 가면 되겠지 싶었다.
룸피니 공원은 가로로 넓은 것보다 위아래를 잡아당긴 것처럼 길쭉했다. 우린 중심이 되는 잔디밭과 호수 근처를 지나며 실제로 기다란 도마뱀을 봤는데 뱀처럼 물가에서 스윽 나타나는 광경은 조금 아찔하긴 했다.
과연 이름 값을 톡톡히 하는 공원이구나 싶었다.
나오는 길에 체조 군단을 만났다. 이건 아시아 종특이지 싶은데 아침이나 저녁마다 공원이나 공터에서 단체로 사람들이 모여 에어로빅이나 체조 같은 시민 건강 프로그램을 하는 거 말이다.
난 개인적으로 옹기종기 모여 들썩들썩 움직이는 그런 광경을 보는 것도, 같이 하는 것도 매우 좋아한다.
다들 엄청난 기운과 에너지로 움직이는 건 아닌데다가 각자의 리듬과 박자를 타느라 동작이 안 맞는건 부지기수지만 시민 하나하나가 모여 무리가 되고, 그 무리가 내뿜는 건강한 기운은 내게 매우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엄마랑 나와 언니는 오와 열을 맞추어 그 무리에 합세해 체조를 함께 즐겼다.
여기가 바다 건너 온 룸피니 공원인지, 집 앞 샘머리 공원인지...
이마에 촉촉하게 맺힌 땀을 닦는데 왜 이렇게까지 열심히 체조를 하는지 근본적인 물음이 들긴 했다.
체조를 빡세게 한바탕 하고 나니 배고픔이 따르는 건 당연지사였다.
우리가 예약한 곳은 '블루 엘리펀트'라는 타이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인데 언니의 회사 사수가 방콕 출장을 갔을 때 방문해서 꼭 가보라고 했던 곳이었다.
방콕 내에서도 전통이 있는 곳이고, 레스토랑과 요리 학교도 건물내 위치하고 있어 원데이 쿠킹 클래스도 운영한다고 했다.
우린 얌전히 테이블에 앉아 물티슈로 손을 비비적대며 메뉴를 연구했다. 뭘 먹어야 잘 먹었다는 보람을 물씬 느낄 수 있으려나, 자고로 모든 음식은 먹고난 뒤 후회가 없어야 하거늘.
지금 다시 돌이켜 생각하려니 뭘 먹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은은한 미소가 다시 입가에 맴도는 걸 보니 맛있게 잘 먹긴 했나보다 싶다.
심지어 메인 메뉴도 아니고 사이드로 치부되지도 않을 자스민 밥의 알알이 스며든 촉촉함까지 떠오르는 연유는 블루 엘리펀트의 경험이 순수한 행복을 안겨주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사료된다.
둘째날 밤이 깊어갔다. 블루 엘리펀트에서 나오며 멋진 외관을 두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직원은 흔쾌히 요청을 받고선 최선을 다해 연신 플래시를 터트렸다.
결과물은 내가 생각했던 대로는 아니었다. 왜곡된 조명과 기울어진 피사체로 마치 술 취해서 안경 못 찾고 방바닥을 기어다니는 내가 바라보는 시야 같았다.
그래도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며 떠오르는 그 날의 조명, 온도, 습도. 그저 완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