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첫 날
비행기에서 내린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일이다. 상공 몇 만 피트를 떠있는 동안 기내의 사람들은 시간의 선을 한 개 또는 그 이상을 건너고, 날씨와 계절을 자유롭게 넘나들게 된다.
시간의 흐름을 가장 먼저 느낀다. 비행기 바퀴가 모습을 드러내고 활주로에 둔탁한 소음을 내며 바퀴를 지면에 내리면서 기내 방송으로 현재 시각을 알려준다.
핸드폰 화면을 키면 도대체 어떤 현대 기술이 적용 되는지 우매한 내 머리로는 알 수 없지만 이미 현지 시각으로 바뀌어져 표시 되어 있다.
시퍼렇게 코팅된 동그란 창 너머로 움직이는 사람들과 오가는 비행기나 운반되는 수송 차량이 보였다. 어느 것 하나 고정되어 있는 사람이나 물건이 없었다.
내 몸은 저녁인데 두 눈이 담는 풍경은 해가 쨍쨍 뜬 낮이 되는 것. 그러면 동시에 모든 감각이 부자연스러워짐을 느끼며 털레털레 비행기 밖으로 나서게 된다.
빨대의 꺾이는 부분처럼 생긴 통로가 비행기와 건물 사이를 이어준다. 그 틈새는 에어컨 바람이나 히터가 닿지 않는다. 한 발은 여전히 기내에, 다른 한 발짝을 떼서 건물 바닥으로 옮기는 때 헐렁한 트레이닝 새로 미지근한 바람이 발목을 훑고 지나간다. 태국의 바람은 참 따뜻하구나.
수속을 마치고 나와선 택시를 찾으러 나섰다. 공항을 빠져나가기 전에 저마다 다른 푯말을 들고 몰려 서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승객의 이름이 써져 있기도 했고, 숙박 업체의 이름이 적혀 있기도 했다. 우리가 묵는 숙소 푯말을 들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어차피 리조트에 미리 택시를 예약하지는 않아 밖에서 불러도 되지만 혹시나 싶어서 시간과 가격을 물었다. 음, 엄청난 사전 조사를 하지는 않았지만 부르는 게 값이라는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미련 없이 택시 승강장에 가서 티켓을 끊었다. 은행 창구처럼 자동 발매기에서 표를 끊으면 어디로 가야할 지 알려주는 식이었다.
바로 이 순간이 네이버 블로그의 여행 후기를 훑어 정보를 얻게 된 많은 순간들 중 처음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온라인 상 정보 공유를 받지 못했으면 한국으로 헤엄쳐 돌아와야 되지 않았겠는가 생각이 든다. 그 정도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네이버 블로그나 구글 후기, 트립 어드바이저 등등의 온라인 플랫폼을 이용한 덕분에 여행은 순조로웠고 문제 해결도 매끄러울 수 있었다.
택시는 캐리어를 실어야 해서 승합차로 골랐고, 우린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 있는 밴 안에 몸을 실었다.
에어컨 위에 적힌 디지털 시계는 두 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우린 아난타라 리버사이드 리조트에서 4박5일을 보냈다. 처음에 일정을 계획할 때는 리조트에서 2박을 하고, 방콕 중심지로 이동해 호텔에서 나머지 일정을 보낼까 고려 했었다. 하지만 4박5일이 짧은 시간은 아니라고 해도 숙소를 옮기기에는 빠듯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게다가 호텔은 고층 빌딩이라는 게 영 어필이 되지 않았다. 아난타라 리조트는 시내 관광지와는 거리가 있는 편이다.
하지만 우린 관광보다는 휴양에 방점을 찍었기 때문에 위치를 굳이 중심부로 잡을 필요가 없었고, 무엇보다도 리조트의 부대 시설이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수영장과 조식 뷔페 같은 것들이었다. 특히, 수영장의 규모가 다른 숙박 시설에 비해 더 크다는 건 내가 가장 기대하던 바였다. 리조트의 메인 입구에 들어섰다.
사와디카, 또랑또랑한 인삿말이 들렸다. 물방울 젤리가 통통 튕기는 것처럼 재기발랄한 음의 높낮이였다.
리조트 실내는 초록 잎사귀 식물과 높다란 이파리 식물로 구석구석 채워져 있었다.
실내를 은은하게 맴도는 스파 향도 인상적이었는데 마치 무림의 요가 고수들이 금방이라도 보를 깔고 수련을 할 법한 정신적 수양 공간처럼 느껴졌다.
체크인을 하자마자 샤워를 했다. 테라스 바깥에는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고, 햇살 앉은 침대에 누워 있자니 온 몸이 흐물거렸다.
슬슬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저녁 8시에 킹 파워 마하나콘 타워에 있는 레스토랑에 저녁 식사 예약이 있었다.
미리 깔아둔 우버 어플로 택시를 불렀는데 관광지라고 생각한 곳인데도 기사가 빙빙 둘러서 헤매는 바람에 멀미 기운이 스멀거릴쯤 택시에서 내릴 수 있었다.
조금 혼미한 정신을 붙잡고 빌딩 안으로 들어섰다. 인포 데스크에 레스토랑 위치를 묻자 예약 상태를 보더니 우릴 냅다 엘리베이터에 밀어 넣었다.
롯데타워 꼭대기로 올라갈 때 타는 고속 엘리베이터처럼 우린 로켓에 올라탄 것처럼 위로 솟구쳤다. 엄마는 미약한 비명을 내질렀지만 엘리베이터는 기세 좋게 상승했다.
혀에 닿는 맛은 훌륭했고, 눈에 담는 광경은 황홀했다. 방콕의 곳곳이 보이는 경치는 속이 뚫릴 만한 홀가분함을 안겨 주었다.
높은 곳을 질색하는 엄마는 통창을 등지고 앉았다. 우린 이런 높은 데 있는 레스토랑인 줄 몰랐기 때문에 바들거리며 떠는 엄마에게 가여움을 느끼며 따듯한 음식을 주문했다, 속이 훈훈하게 덥혀지면 그래도 나아지겠지 싶어서.
우리 테이블을 맡은 웨이터가 바에 올라가겠냐고 물었다.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면 두 명은 바에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고 했다.
엄마는 물을 필요도 없이 거절했기 때문에 언니와 내가 야외 바로 올라갔다. 다른 장면을 보기 전에 먼저 유리창 바닥을 사람들이 기어다니고 있는 걸 보고선 조금 식겁을 하긴 했다.
계단을 올라가 사방이 트인 곳이자 건물의 가장 꼭대기인 공간에서만 가질 수 있는 시야는 짜릿했다.
고개를 돌려 구석구석을 살피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나중에 엄마한테 들어보니까 혼자 앉아 있는 엄마한테 서버가 왜 같이 안 가냐고 물었다고 했다.
택시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누우니 푹신한 침대가 어지간히도 편안해 마치 내 집처럼 느껴졌다, 라고 말하면 조금은 경망스럽게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든든하게 배를 채운 데다가 더 없이 멋지게 여행의 첫 날 밤을 보내니 출발점에 서 있는 설렘과 앞으로 펼쳐질 일에 대한 기대감에 가만히 누워 눈을 감기란 쉽지만은 않은 과제였다. 내일 아침은 꼭 수영으로 시작 한다, 굳은 다짐에 평소 일어나는 시간보다 일찍 알람을 맞췄다.
알람이 울리길 기다리며 잠드는 밤은 흔하지 않다. 그럼에도 알람 시각을 설정하는 내 손놀림은 깃털보다 가벼운 걸 보니 그 어려운 일을 방콕이 해냈구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