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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린 Jul 27. 2023

그 해 여름, 포르투갈 03 비지니스석, 돈 값 한다.

그 해 여름, 포르투갈 03 비지니스석, 돈 값 한다.

비지니스 석을 끊었다. 물론 결제를 하며 카드 번호를 적는 손가락이 조금은 떨렸던 것 같다. 0이 몇 개 붙어있는 거지, 의아함을 갖기도 했다. 이래도 되는 걸까, 라는 생각을 하다가 이래야만 한다, 라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왜냐하면 18시간 비행이었기 때문에, 왜냐하면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으며 거기서 더 나빠질 것을 알았기 때문에, 왜냐하면 허리 건강을 잃는 것보다 통장 잔고를 잃는 것이 더 나았기 때문에, 왜냐하면 이런이런 또 저런저런 이유 때문에. 그래서 사치가 아닌 정당한 소비라는 주장의 이유를 찾으면 수 십 가지가 나올 수 있었다. 머리는 그렇게 이해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기회 비용은 늘 그런 것이다. 거기에 돈을 쓰지 않았다면 이 곳에 또는 저 곳에 쓸 수 있을 건데, 라는 아쉬움이나 일말의 후회가 남기 마련이다. 하지만 비지니스석을 끊은 건 황홀한 선택이었다.

애초에 턱턱 부담 없이 비지니스석을 탈 수 있으면 그랬겠지, 나는 아쉬운 입장이었고 아쉬운 마음이었다. 인천 공항에서 라운지에 들어가자맞 그런 마음이 싹 가셨다. 너무 배가 고파 밀어넣은 가래떡 때문에 가슴에 남아있던 체기가 내려가듯이 말이다. 처음 라운지를 이용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 조금 애를 쓰긴 했으나 그러기에 내 눈은 너무 동그랗고, 데굴데굴 굴러 다녔다. 어쩔라운지, 신기하고 재미있는데 뭐 어떡합니까.

그래서 결국 뷔페 음식 조금, 와인 몇 모금 아니 몇 잔, 컵라면 하나를 때렸다. 먹은 게 아니라 때렸다. 그리고선 실실 캐리어를 끌고 나와 보니 이미 보딩이 시작되고 있었다. 척척 망설임 없이 걸어나가 퍼스트 클래스, 비지니스 우선 탑승 선에 섰다. 두루마리 휴지가 술술 풀리듯이 모든 게 순조롭고 매끄러웠다. 이게 돈 맛인가, 궁금해졌다.

***


여객기 안에 들어가보니 평상시처럼 오른쪽이 아닌 왼쪽으로 보내졌다. 매번 항공기에 탑승할 때마다 닫혀있던 커튼이 열려 져있고, 젖혀진 커튼 안으로 들어가는 건 처음이었다. 이런 데 앉아가면 30시간 비행도 가능하겠다, 라고 처음 생각했다. 딱 봐도 널찍하다 못해 뒹굴거려도 될만큼 여유로운 자리였다. 승무원이 와서 물었다. 샴페인, 애플 주스, 망고 주스, 포도 주스? 말 해 뭐해. 축배를 들어야 한다. 샴페인 한 잔이요.

샴페인을 홀짝 거리며 이거저거를 눌러보고 만져 보았다. 그럴 때마다 여기가 움직이거나 저기가 미끄러졌다. 매번 탐냈던 장난감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것처럼 작고 세세한 것 하나하나가 멋지고 웅장해보였다. 새로운 경험은 역시 늘 짜릿한 걸 알지만 새로우면서도 비싼 경험은 거의 감전 급이란 걸 깨달았다. 아마 앞으로도 자주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란 걸 무의석적으로 알아서 일 수도 있다. 이번이 처음이지만 곧 마지막일수도 있으니 그저 즐겨, 오로지 즐겨, 눈 딱 뜨고 일분일초를즐겨, 비장한 각오를 하고 벨트를 채웠다. 그리고 이륙, 여기 앉아서라면 지구를 네 바퀴 돌아서 도착해도 될 것 같아요, 속력을 올리며 너무나도 빠르게 지나치는 작은 건물과 그보다도 작은 사람을 작은 창문 너머로 쳐다보며 어이없는 소망도 스쳐 지나갔다.

***

음식을 주문하란다. 이걸 어떻게 골라, 다 먹고 싶은 걸요. 컵라면 왜 먹었지, 시간을 돌리면 컵라면부터 내 과거에서 지우고 싶다. 눈을 질끈 감고 메뉴를 하나씩 짚었다. 아랍식 전채 요리, 구운 넙치, 오레키에떼 파스타(오레 뭐요?), 큰 느타리 버섯과 토마토 새프론 크림 소스, 아티잔 크래커와 과일, 바닐라 소스에 버무린 초콜릿 퐁당. 기나 긴 메뉴명을 하나씩 줄줄 읋으니 음유 시인이 따로 없다. 7.5조 음수율을 띤 고전 시가를 운치 있게 메뉴명을 읽는 것처럼 큰 기쁨은 없으리라.

주문한 걸 잊고 있을 즈음에 전채 요리가 도착했다. 이게 어떻게 전채예요. 나머지 요리는 어떻게 먹으라고, 내 과민성 위장 어떡하라고! 더없이 환희스러운 절망 속에 포크와 나이프를 집었다. 아랍식 전채요리라고 했기에 뭐가 나올까 호기심이 일었는데 그 모습을 드러내니 세계 테마 기행 프로그램에서 언뜻 본 듯한 비주얼의 차림이 나왔다. 뭔지 모르겠지만 맛이 있었고, 표현하기 애매모호하고 익숙치 않은 맛이지만 자꾸만 입에 들어 갔다. 캄파리 한 잔도 시켰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에서 등장 인물보다 더 자주 나오는 캄파리에 막연한 환상을 지녔기 때문이다. 배경이 이탈리아인 소설 속에서 주요 인물인 4명의 프랑스인은 여름 바캉스를 떠나 갈증을 해소시키기 위해 끊임 없이 캄파리를 들이킨다. 그래서 나도 캄파리를 시켜 보았다. 그 붉은 빛 음료에 담긴 남부 이탈리아의 열기를 마시고 싶었다.

본 요리는 생선이었다. 왜 생선인고 하니, 하늘위에서 생선을 먹고 싶었을 뿐이다. 오레어쩌고 파스타와 새프론 크림 소스의 궁합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입 안에 최대한 오래 씹어서 소화 과정을 늦추고, 남김 없이 싹싹 긁어 먹고자 애라는 애는 다 썼다. 이미 인천 공항 라운지에서 배를 두둑하게 채워온지라 애석하게도 위장은 이미 빈 자리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모든 가능서을 열어두어야 했다. 차곡차곡 빈 틈을 찾아 고귀한 음식을 넣어야 했다. 그것이 내가 스스로에게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였다.

후식까지도 안 가려고 했지만 초콜릿 퐁당을 안 먹으면 후환이 뒤따를 것 같아 쫓기는 마음으로 주문했다. 바닐라 시럽이 뿌려진 초콜릿 퐁당은 바삭하게 결대로 갈라지며 촉촉하고 뜨끈한 자태를 드러냈다. 초콜릿 퐁당을 시럽에 찍어 한 입, 새큼한 캄파리 한 입. 이 곳이 상공 4만 피트 극락이었다.

***

아부다비에 도착할 쯤에는 자정에 가까울 무렵이었다. 저녁을 거나하게 먹고 몇 잔을 더 홀짝이다보니 기내 전등이 꺼졌다. 주무셔, 라는 뜻인가보다 하고 침대를 눕히는 버튼을 눌렀다. 징- 하고 울리는 소리와 함께 안락 의자 같았던 좌석이 안락 침대가 되었다. 그대로 누워 식사 하면서 보던 여자 월드컵 경기를 마저 보았다. 경기가 후반전 마지막을 향할 무렵 눈을 감고 깊은 수면에 빠졌다.

다시 눈을 뜨니 침대, 이 방향 저 방향으로 구르고 다리를 올려 뻣뻣해진 몸을 잡아 당겨 스트레칭을 해주었다. 기내에서 누워서 스트레칭이라니, 과연 호사로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아부다비로 도착하는데 30분이 남았다. 하강을 시작한다고 해서 다시 의자를 올려 앉고 착륙을 기다렸다. 문이 열리고 먼저 나와, 먼저 셔틀 버스에 타는 동안 생각했다. 시간을 돈으로 산다는 게 이런 거구나. 모든 서비스를 제일 먼저 받을 수 있고, 모든 편의를 제일 빠르게 제공 받는 다는 건 오로지 자본 주의에 입각한 결과인 것이니까 말이다. 재화만으로 서비스, 시간, 품질의 모든 면에서 우대를 받는다는 건 이런 상황을 연출하는구나, 이론적으로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도 직접 겪어보니 새로웠다. 처음이니 그럴 수 밖에 없겠거니 싶었다.

아부다비 공항의 라운지에서도 푹신한 소파에 다리 쭉 뻗고 누워 휴식을 취하다가 바에 가서 홀짝이고, 카페를 돌아다니며 과일을 몇 조각씩 주워 먹었다. 다음 비행에서도 더 먹어야 되는데, 경각심을 가져야 했다. 위장의 크기가 더 이상은 불어날 수 없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셔틀 버스를 타고 다시 여객기로 향했다. 이번에는 7시간 반의 여정이었다. 자정에 출발하니 아마 타자마자 다시 곧 바로 잠이 들 것만 같았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요, 막테일 한 잔과 과일 플레이트를 시켜 성실하게 먹었다. 바클라바 조각과 벨리니 칵테일도 금방 뒤를 따랐다. 이 날만큼 진심으로 음식과 음료를 섭취한 적은 없었는데 아마 본능적으로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님을 장기가 감지한 게 아닐까 싶다.

자기 전에 아침 식사를 미리 선택해 말해 달라는 승무원의 요청이 있었다. 이거랑, 저거랑, 요고요. 하나씩 짚으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신에게는 아직 한 끼의 식사가 더 남았답니다. 깊은 잠을 청한 뒤, 일어나 한 차례의 스트레칭을 마쳤다. 아침으로 앙증 맞게 프렌치 토스트를 시켰다고 생각했는데 거창한 게 나왔다. 배가 부른데 계속 들어가는 건 인체의 신비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정도였다. 두 번의 비행 새 이틀 치 음식을 다 먹은 것 같았다.

***


창문 밖으로 리스본 앞 바다가 보였다. 그 바다는 굵은 강줄기로 이어지고, 도시의 전경으로, 또 동네의 풍경으로 이어졌다. 도심 속 위치한 리스본 델 가르도 공항에 일접해 가고 있었다. 비행이 끝났다. 내 처음이지만 마지막이어선 안 될 비지니스석 여정의 종착지에 도달했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비행기는 너무나 편리한 운송 수단이자 필수적으로 선택해야 할 교통 수단이다. 하늘을 날아 아예 다른 대륙, 다른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도 경이로운데 그 안에서 온갖 편의와 안락함을 누린다는 건 또 다른 기쁨이었다. 비행기를 내리며 난 내가 누린 기쁨과 만족감을 돈으로 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돈은 현대 사회의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해주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수단이다. 목적이 아닌 수단. 재화가 많으면 물론 선택지가 다양해지고, 취할 수 있는 스펙트럼이 넓어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더 잘 맞는, 내가 더 선호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으므로 선택의 자유에서 오는 행복이 뒤따를 것이다. 개인이 누리는 행복의 총량도 마찬가지로 증가할 수 있겠다. 그래도 수단은 언제까지나 수단일 뿐이다. 기쁨을 누리는 주체는 결국 사람이고, 그 사람의 마음이 동해야 하는 것이다. 비행 내내 말 그대로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는 기분이었다. 비지니스석 하나를 구매한건 내 고민스러운 계획의 결과였다. 그 결과로 가기 위한 과정은 행복과는 굉장힌 먼 감정도 있었다. 괴로움, 힘듦, 울적함, 슬픔, 외로움 같은 것들. 그래도 다 보상 받았다. 요란스럽게 바쁘고 아팠던 상반기여서 요란스럽게 행복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다. 그래서 기다렸다는 듯 안 좋은 감정, 힘들었던 개인적인 일은 하늘 위에 다 흩뿌리고 던져 버렸다.

문이 열리고 리스본의 서늘한 바람이 맨살 위에 닿았다.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리스본의 하늘은 여전히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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