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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린 Jul 31. 2023

그 해 여름, 포르투갈 04 휴식

그 해 여름, 포르투갈 04 휴식

눌러앉은지 이틀, 생리가 터졌다. 그렇다 함은 기동성의 제약을 뜻한다. 생리통도 그렇거니와 생리를 하는 기간 중 여행을 한다는 건 수 많은 부수적 제약과 불편함을 수반한다. 여행이 뭐야, 바깥 슈퍼 마켓에 나가는 것도 고역인데 말이다. 예상치 못한 스케줄이었다. 아무래도 비행기를 타서 기압 차이로 인해 생리 일정이 거의 5일씩이나 당겨진 걸까? 의학적 문외한에게 그런 자문은 무답만을 불러 일으킨다. 어쨌든 생리로 인해 계획은 전면 수정되었다. 진실을 고하자면 수정할 계획은 없다시피 하니, 바른대로 표현하자면 생리로 인해 휴식을 먼저 갖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일단 하루는 6시에 시작한다. 말 그대로 농부의 삶이다. 한국에서 유럽 대륙으로 올 때 발생하는 시차 적응은 매우 일찍 자서 극단적으로 일찍 일어나는 양상으로 발생한다. 반대로 다시 극동 아시아 방향으로 갈수록 시차 적응은 늦게 자서 늦게 일어나는 걸로 발현되는데 사실 전자가 매우 더 생산적이기는 하다. 강제 얼리버드, 미라클 모닝 챌린지를 힘 들이지 않고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매일 새벽 5시 일어나기? 껌이다. 내 몸이 먼저 반응을 한다. 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하면 다섯시. 5시 반이 될 쯤이면 내 몸과 마음 모든 것이 다 깨어나 있다. 아무리 늑장을 부려도 여섯시다. 어차피 시차 적응하는 건 일주일 정도면 얼추 끝나니 이 기간을 최대한 즐겨야 한다. 이른 아침에 시작하는 하루는 나름의 낭만이 있으니 말이다.


일어나면 가장 먼저 책을 읽는다. 거짓말이다. 사실은 유튜브랑 인스타그램을 돌아다니며 기억의 자취에도 남지 않을 쇼츠를 내려 본다. 엄지 손가락으로 술술 내리다 보면 삼십분 뚝딱이다. 제발 엄지 손가락이 그만 내렸으면 좋겠는데 마치 백화점 자동문처럼 저절로 끌어 당겨 새로운 컨텐츠를 보려는 움직임을 이성적으로 포착할 때면 참 어이가 없다. 대체 에스엔에스를 끊는 특효약은 없는 걸까 싶어서 말이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거실로 나온다. 밤새 끼고 있던 드림 렌즈를 빼고 식탁에 앉는다. 밖은 이미 밝다. 이 때가 가장 평화롭다. 바쁜 직장인이나 학생은 집을 나섰거나 나설 채비를 하고 있고, 밖에선 새가 지저귀는 시간. 그럼 일기장을 펼쳐 대충 하루의 일을 정리한다. 별 거는 없다. 일기 쓰기, 여행 계획하기, 책 일기, 그 쯤이다. 그래도 뭔가를 해야겠다는 의지로 내용을 정리하면 얼추 시간이 또 간다. 그리고 나선 책을 읽는다. 지금은 양귀자의 천 년의 사랑을 읽고 있다. 단어 하나씩, 문장 한 줄씩 오물조물 씹어 먹으려고 한다. 쌉싸름한 문장의 맛이 너무 좋다. 다음으로 아침을 먹는다. 간단하게, 대충, 하지만 나름 성의 있게, 최소한의 모양새를 갖추어서 말이다. 그러면 이제 또 커피가 당긴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다음 수가 입력된 알파고처럼 식사를 끝내면 꼭 커피가 번뜩 떠오른다. 커피를 찾아 동네 어딘가로 향한다. 여태 다녀온 카페는 세 군데. 방문한 순서대로 Delta Coffee House, Zenith와 Simpli라는 곳이다. 제니스는 처음 갔을 때 줄이 길게 늘어 서 있어서 포기했던 곳이다. 두 번째로 시도 했을 때 실망을 금치 못했다. 밍밍한 아이스 라떼의 맛, 다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격이 그리 낮지만은 않았던 건 아마 힙의 값이리라. 제니스에서 긴 행렬을 목격하고 바로 발길을 돌려 향한 곳이 델타 커피 하우스였다. 델타 커피 브랜드에서 나온 원두를 갖고 커피를 만드는 카페였는데 큼직만한 대로변에 위치한 덕에 매장도 넓고 테이블 수도 많았다. 아이스 라떼와 에그 타르트를 포장해 나왔다. 가장 최근에 들린 카페는 시내 근처로 가는 길목에 있는 카페다. 시내에 이어지는 통로에 있어선지 적당한 인파와지만 지나치게 붐비지 않는 선에서 형성된 활기찬 분위기가 있다. 브런치 메뉴를 팔기도 하는데 아직 먹어본 적은 없다. 대신, 카페에서 직접 만드는 페이스트리류는 피스타치오 크로와상과 에그 타르트, 이렇게 두 가지를 먹어 보았는데 풍미가 일품이었다. 피스타치오 크로와상의 부드러운 결 속에는 커스터드 크림이 발려져 있다. 에그 타르트는 말해 뭐하나. 바삭한 크러스트를 한 입 베어물면 촉촉하고 달큰한 커스터드 층이 나온다. 거기에 쌉싸름한 라떼를 곁들이면 그보다 더 훌륭한 조합을 만들기는 어렵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카페에서 먹거나 포장해와 집에서 시간을 갖고 음미한 뒤에는 다시 휴식을 갖는다. 세상에 많은 종류의 휴식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몸소 체험하고 경험해보는 건 너무나도 멋진 일이다. 먹는 휴식, 읽는 휴식, 마시는 휴식, 가만히 누워 있는 휴식. 모두 다 다른 행동이지만 같은 목적을 갖고 있다. 완전한 쉼, 바로 그것이다.


휴식 뒤에는 노동이 있어야 한다. 그 또한 또 다른 휴식을 위한 막간의 노동이다. 저녁을 준비한다. 나는 저녁을 굉장히 일찍 먹는 편이다. 대부분 5시 반에서 6시 사이에 저녁 식사를 끝낸다. 평소에 요가를 하기 때문에 2시간 전에 식사를 미리 하기 때문이다. 요가가 아니더라도 일찍 식사를 해야 다음 날 속이 편하다. 몇 년간 그렇게 저녁 식사 습관을 딜이다 보니 너무 늦게 먹으면 속체하거나 소화가 잘 안되는 느낌을 받는다. 리스본 중심가에 있는 백화점인 el corte ingles와 대형 마트인 리들에서 산 재료로 식사 준비를 한다. 말린 토마토, 잼, 올리브, 페스토, 파스타, 와인등등 한국에서 샀으면 유류세가 붙어 비쌀 법한 재료와 브랜드를 척척 장바구니에 담아 산 것들이다. 대신 비상용으로 마련한 신라면 하나와 진라면 하나는 아직도 찬장 위에 고이 모셔 두었다. 저녁을 먹어 치워도 해는 중천이다. 슬슬 나설 채비를 한다. 공기는 낮에 내리 쬔 햇볕으로 이미 따스하다.


8월 첫 주에 교황이 온다고 한다. 몇 해 전에 한국에서 열렸던 행사기도 한 세계 청년 대회가 이번에는 리스본에서 열린다.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여는 행사기도 하고, 유럽 국가는 카톨릭 신자가 특히 많기 때문에 이번 행사에는 대단한 인파가 몰릴 예정이라고 한다. 심지어 리스본에 사는 사람들은 이 기간동안 잠시 몸을 피신하거나 일부러 여름 휴가를 조정해 리스본을 떠날 준비를 한다고 기사가 쏟아져 나올 정도다. 이 현상을 리스본 엑소더스, 라는 부르며 말이다. 단기 렌트비 또는 호텔이나 에어비엔비의 숙박 비용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물가가 오르기도 했다. 내가 처음 1달 렌트한 곳에 들어오며 집 주인을 만났을 때 들었던 말은 교황이 방문하는 기간동안 5일 렌트비랑 이 곳 한 달 비용이랑 거의 맞먹을 거란 말이었다. 에두아르도 공원이나 강변 광장을 가보면 이미 무대 설치가 한창이다. 평일에는 공연 팀이 리허설을 하는 장면을 볼 수도 있는데 무대 설치 스케일만 보더라도 어마어마한 행사가 될 것을 직감할 수 있다.

느지막이 6시나 7시를 넘어 나가더라도 햇볕은 노랗고 붉다. 오히려 이 때 나가야 길다란 건물과나무가 드리우는 그늘 아래 서늘한 바람을 만끽할 수 있다. 아침, 저녁은 여전히 서늘하다지만 8월로 다가서면서 낮 기온이 조금씩 올라가고 있다. 이번 주 주말만 넘기면 30도를 웃도는 기온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습식 사우나, 여긴 건식 사우나라는 표현이 제격이다. 지하철을 타고 에두아르도 공원이나 집 근처 언덕배기로 향한다. 미라두로라고 한다. 포르투갈어로 전망대를 뜻하는 미라두로는 높낮이가 다른 리스본 도시 지형으로 인해 도처에 널려 있다. 동네마다 한 곳 이상의 언덕이 있으며, 높이 위치해 있어 더 멀고 넓은 풍경을 안겨주는 것이다. 어느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려도 오르막이 있고, 내리막이 뒤따른다. 오르다 보면 가슴이 뻥 뚫릴 정도로 시원한 전망을 볼 수 있는 미라두로에 도착할 것이고, 내려오는 길목에는 좁은 골목을 비집고 들어오는 빛이 파스텔 톤과 영롱한 빛을 띤 타일에 반사되어 자아내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러니 리스본은 오르막 길이든 내리막 길이든 눈 부시게 멋진 장면을 도처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황금빛 햇볕이 부서지는 곳, 리스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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